서대문형무소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으려면
[한국 다크투어리즘의 현실과 발전 방향 ②] 결론 : 기술이 아닌 예술이다
[지난 기사] 다크 투어리즘을 아십니까, 한국의 현실은...
처음 VR(가상현실) 영상을 봤던 때를 기억한다. 1993년 대전엑스포에서였다. 관람 후에 어린 나의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집에서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당시에는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VR 영상을 보려면 영화관이나 그에 준하는 시설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영화관은 물론 어떠한 전문적인 장치도 필요 없다. 휴대전화 하나와 카드보드만으로도 충분하다. 배송료 포함 5000원 남짓의 비용으로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간단한 조립 과정을 거친 후, 나는 VR 영상의 세계를 탐험해 볼 수 있었다.
나의 '가상현실' 입문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생생하네.'
처음 영상을 보면서 느낀 감정이었다.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1인칭 시점으로 움직이는 영상이었는데, 그래픽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누가 봐도 그래픽이라 생각할 3D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럼에도 직접 탑승해 있는 듯한 현장감이 느껴졌다. 다음에 본 건 360도 영상이었다. VR 조선이 제공한 영상으로, 잠실 롯데월드 타워 건설 현장을 찍은 것이었다. 시점이 고정돼 있는 롤러코스터 영상과는 달리,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사방을 둘러볼 수 있다. 잠시나마 다른 장소에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잠시 뿐이었다. 처음에야 신기하지만, 곧 할 수 있는 게 지극히 제한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360도 영상조차도 시선을 움직일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 걷거나 물건을 집어드는 등의 행동은 전혀 할 수 없다. 후각과 촉각이 빠져있음은 물론이다. 더욱 발전하여 4D 영화를 넘어서는 수준이 되지 않는 이상, 직접 체험하는 느낌을 주는 건 어려우리라.
하지만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의 역할이라면 할 수 있으리라 본다. 다크 투어리즘 유적의 시설 일부를 VR 영상으로 재현하여, 현장의 느낌은 어떨지 와서 직접 보고 싶도록 하는 식으로. 유적답사와 영상 관람을 모두 한 후 내린 결론이었지만, 아직은 불충분했다. 적어도 다크 투어리즘을 다녀온 다른 한 사람의 의견 정도는 들어봐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티 슈피겔만의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를 다룬 팟캐스트 방송(http://m.podbbang.com/ch/10822) 녹음 중, 멤버 한 명이 아우슈비츠에 다녀왔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다크 투어리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아우슈비츠를 직접 보고 온 그야 말로 가장 적합한 인터뷰 대상일 터. 한국보다 더 선진적인 시스템을 가진 독일의 다크 투어리즘 운영 방식에 대한 호기심은 덤이었다. 나는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는 선선이 승낙했다. 그리하여 홍대 근처의 한 카페에서 닉네임 '희제(27)'와 인터뷰를 하게 됐다.
'보존'이라는 가치에 충실했던 아우슈비츠
- 아우슈비츠로 다크 투어리즘을 다녀온 계기는?
"원래 독일에 대한 동경이 좀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는 제 2외국어로 독일어를 선택하려 했다. 하필 내가 입학 하던 해에 없어지는 바람에 못했지만. 대학생 때는 아예 교환 학생으로 갔다.
왜 동경했냐면, 그처럼 잘 사는 나라임에도 자신들의 과거사를 숨기지 않는 모습이 멋져보였던 거 같다. 일본이 독일을 보고 배웠음 하는 마음이었다. 일단 온 이상 무조건 나치나 유대인과 관련된 곳에 방문해 볼 생각이었다.
사실 바로 아우슈비츠에 간 건 아니었다. 처음 간 곳은 유대인 박물관이었다. 기하학적으로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는, 수업시간 중 교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원래 건축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그곳의 전시물들을 관람한 후, 실제 수용소는 어떨까 하는 마음에 아우슈비츠로 향했다. 가는 중에는 실제 생존자의 수기인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을 백 퍼센트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 아우슈비츠의 시설들은 어땠는가? 설명이 잘 돼 있다거나, 기술력이나 기타 흥미를 끌 만한 뭔가를 활용한 시설이 있었는가.
"그런 건 없었다. 여기는 어디까지나 보존이 목적이었으니까. 자료는 그다지 자세하거나 풍부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대인 박물관에 더 잘 갖춰져 있는 편이었다. 다만 투어 가이드는 잘 돼 있는 편이었다.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도착한 순서대로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가이드를 받았다. 가이드의 설명이야 당연히 충실했고.
디지털스러운 시설 같은 건 없었다. 실제 수감자가 된 듯한 느낌을 주려는 시설들이었지만, 기술력 같은 건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 시설들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당시 수감됐던 인물들의 사진이 그들이 수감된 방 앞에 붙여져 있다거나. 수감자들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자료들을 보관해두던 곳에 그대로 전시해뒀다거나…. 말했다시피 보존에 충실한 구조였다."
- 느낌이 어땠는가? 꼭 수감자들의 기분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자유롭게 말해 달라.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공기 자체가 매우 무겁다. 싱싱한 풀이 자라던 바깥 풍경과 대조될 정도였다. 아우슈비츠가 협소한 공간이기 때문이어서는 아니었다. 그보다 몇 배는 큰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의 광활한 토지로 넘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죽은 이들의 넋이 아직도 남아있는 거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 오기 전에 아우슈비츠의 시설들에 대한 사진을 보고 왔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마음에 더 와 닿았던 게, 사진으로는 안 보이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기차에 막 실려 온 유대인들을 오른쪽·왼쪽으로 나눠서게 했던 장소가 있었다. 사진에서는 유대인들이 선 곳만 보여주지만, 실제 장소에서는 그 주위의 건물이나 감시탑 같은 게 함께 보이니 더 위협적이게 느껴졌음."
- (VR 영상을 보여준 후) 생동감이 느껴지는가? 그리고 직접적인 체험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가?
"확실히 입체감은 느껴지지만 대체는 무리일 듯. 다만 기술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직접 체험했을 때의 느낌은 주지 못할 거다. 학생 때 증강현실 반려동물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본 적이 있었다. 화면에는 개가 내 손을 핥으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나오지만 거기까지일 뿐이다.
집에서 개를 키우고 있는데, 그 애와 교감할 때 느꼈던 감정 같은 건 받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아우슈비츠라는 장소에서 느꼈던 것들을 VR로 얻을 수는 없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 사진보다 입체감이 있으니, 실제로 가보면 더 흥미롭겠다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정도로 끝날 거 같다.
오히려 유대인 박물관처럼, 건물의 구조와 배치를 통해 체험을 전해줄 수 있다고 본다. 바닥에 얼굴 모형들로 가득찬 곳이 있었는데, 밟으면 절그럭 소리가 났다. 불편한 느낌이 들었는데, 유대인들의 아우성과 고통을 느껴보라는 취지인 듯했다.
가장 인상적인 곳은 한 널찍한 방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짙은 쥐색으로 된 방이었는데, 찬바람이 계속 불고 서늘한 기운이 증폭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홀로 있어야 했으니, 시간이 지나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정말 감금된 듯한 기분이었다. 갑작스럽게 죽음의 수용소에 끌려온 이들의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기술력 보다는 오히려 감각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설치물이 더 훌륭한 체험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서대문형무소가 나아가야 할 길
인터뷰가 끝나고 한동안 멍해 있었다.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예로부터 예술이야 말로 체험의 매개체였다. 자신의 오만가지 감정과 생각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받아들이는 이들로 하여금 공감하도록 하는 것이 예술 아니었던가.
첨단 기술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기술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 주체가 될 수는 없으니까. 현장의 느낌을 전부 살릴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다면 모르되, 그 전까지는 현장에서 직접 체험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기술과 예술 모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수천 년간 발달해온 예술 쪽이 100년도 채 안 되는 역사의 첨단 기술보다는 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으리라.
한국의 다크 투어리즘의 발전 방향에 대한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서대문 형무소에 있던 것 같은, 어설픈 체험시설들은 없애고 최대한 원형 그대로를 보존한다. 그 대신 유대인 박물관처럼, 건물의 구조와 배치로서 체험을 전해주는 전시관 건물을 개축하거나 신설한다.
VR은 홍보 영상에 활용하여 관람객들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그대로만 된다면 한국에도 아우슈비츠 못지않은 훌륭한 다크 투어리즘 유적이 만들어질 것이다. 큰 비용이 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손해가 아니라고 본다. 다크 투어리즘이 한국 사회의 인식을 바꿔 놓는다면, 그래서 더 이상의 참사를 막을 수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투자이리라.
처음 VR(가상현실) 영상을 봤던 때를 기억한다. 1993년 대전엑스포에서였다. 관람 후에 어린 나의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집에서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당시에는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VR 영상을 보려면 영화관이나 그에 준하는 시설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영화관은 물론 어떠한 전문적인 장치도 필요 없다. 휴대전화 하나와 카드보드만으로도 충분하다. 배송료 포함 5000원 남짓의 비용으로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간단한 조립 과정을 거친 후, 나는 VR 영상의 세계를 탐험해 볼 수 있었다.
나의 '가상현실' 입문기
▲ 구글 카드보드구글 카드보드의 모습. 인터넷에 설명이 올라와 있기에 누구나 쉽게 조립하여 vr을 즐길 수 있다. ⓒ 이범희
'생각했던 것보다 더 생생하네.'
처음 영상을 보면서 느낀 감정이었다.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1인칭 시점으로 움직이는 영상이었는데, 그래픽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누가 봐도 그래픽이라 생각할 3D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럼에도 직접 탑승해 있는 듯한 현장감이 느껴졌다. 다음에 본 건 360도 영상이었다. VR 조선이 제공한 영상으로, 잠실 롯데월드 타워 건설 현장을 찍은 것이었다. 시점이 고정돼 있는 롤러코스터 영상과는 달리,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사방을 둘러볼 수 있다. 잠시나마 다른 장소에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 롤러코스터 영상롤러코스터 영상의 모습. 카드보드로 보면 두 화면이 합쳐져서 나온다. 카드보드 영상을 찍을 수 없었기에 부득이하게 컴퓨터 화면을 촬영했다. ⓒ 이범희
하지만 잠시 뿐이었다. 처음에야 신기하지만, 곧 할 수 있는 게 지극히 제한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360도 영상조차도 시선을 움직일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 걷거나 물건을 집어드는 등의 행동은 전혀 할 수 없다. 후각과 촉각이 빠져있음은 물론이다. 더욱 발전하여 4D 영화를 넘어서는 수준이 되지 않는 이상, 직접 체험하는 느낌을 주는 건 어려우리라.
하지만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의 역할이라면 할 수 있으리라 본다. 다크 투어리즘 유적의 시설 일부를 VR 영상으로 재현하여, 현장의 느낌은 어떨지 와서 직접 보고 싶도록 하는 식으로. 유적답사와 영상 관람을 모두 한 후 내린 결론이었지만, 아직은 불충분했다. 적어도 다크 투어리즘을 다녀온 다른 한 사람의 의견 정도는 들어봐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티 슈피겔만의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를 다룬 팟캐스트 방송(http://m.podbbang.com/ch/10822) 녹음 중, 멤버 한 명이 아우슈비츠에 다녀왔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다크 투어리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아우슈비츠를 직접 보고 온 그야 말로 가장 적합한 인터뷰 대상일 터. 한국보다 더 선진적인 시스템을 가진 독일의 다크 투어리즘 운영 방식에 대한 호기심은 덤이었다. 나는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는 선선이 승낙했다. 그리하여 홍대 근처의 한 카페에서 닉네임 '희제(27)'와 인터뷰를 하게 됐다.
'보존'이라는 가치에 충실했던 아우슈비츠
▲ 아우슈비츠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정문. 체르노빌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다크 투어리즘 유적지이다. ⓒ 위키피디아
- 아우슈비츠로 다크 투어리즘을 다녀온 계기는?
"원래 독일에 대한 동경이 좀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는 제 2외국어로 독일어를 선택하려 했다. 하필 내가 입학 하던 해에 없어지는 바람에 못했지만. 대학생 때는 아예 교환 학생으로 갔다.
왜 동경했냐면, 그처럼 잘 사는 나라임에도 자신들의 과거사를 숨기지 않는 모습이 멋져보였던 거 같다. 일본이 독일을 보고 배웠음 하는 마음이었다. 일단 온 이상 무조건 나치나 유대인과 관련된 곳에 방문해 볼 생각이었다.
사실 바로 아우슈비츠에 간 건 아니었다. 처음 간 곳은 유대인 박물관이었다. 기하학적으로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는, 수업시간 중 교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원래 건축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그곳의 전시물들을 관람한 후, 실제 수용소는 어떨까 하는 마음에 아우슈비츠로 향했다. 가는 중에는 실제 생존자의 수기인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을 백 퍼센트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 아우슈비츠의 시설들은 어땠는가? 설명이 잘 돼 있다거나, 기술력이나 기타 흥미를 끌 만한 뭔가를 활용한 시설이 있었는가.
"그런 건 없었다. 여기는 어디까지나 보존이 목적이었으니까. 자료는 그다지 자세하거나 풍부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대인 박물관에 더 잘 갖춰져 있는 편이었다. 다만 투어 가이드는 잘 돼 있는 편이었다.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도착한 순서대로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가이드를 받았다. 가이드의 설명이야 당연히 충실했고.
디지털스러운 시설 같은 건 없었다. 실제 수감자가 된 듯한 느낌을 주려는 시설들이었지만, 기술력 같은 건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 시설들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당시 수감됐던 인물들의 사진이 그들이 수감된 방 앞에 붙여져 있다거나. 수감자들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자료들을 보관해두던 곳에 그대로 전시해뒀다거나…. 말했다시피 보존에 충실한 구조였다."
- 느낌이 어땠는가? 꼭 수감자들의 기분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자유롭게 말해 달라.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공기 자체가 매우 무겁다. 싱싱한 풀이 자라던 바깥 풍경과 대조될 정도였다. 아우슈비츠가 협소한 공간이기 때문이어서는 아니었다. 그보다 몇 배는 큰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의 광활한 토지로 넘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죽은 이들의 넋이 아직도 남아있는 거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 오기 전에 아우슈비츠의 시설들에 대한 사진을 보고 왔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마음에 더 와 닿았던 게, 사진으로는 안 보이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기차에 막 실려 온 유대인들을 오른쪽·왼쪽으로 나눠서게 했던 장소가 있었다. 사진에서는 유대인들이 선 곳만 보여주지만, 실제 장소에서는 그 주위의 건물이나 감시탑 같은 게 함께 보이니 더 위협적이게 느껴졌음."
- (VR 영상을 보여준 후) 생동감이 느껴지는가? 그리고 직접적인 체험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가?
"확실히 입체감은 느껴지지만 대체는 무리일 듯. 다만 기술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직접 체험했을 때의 느낌은 주지 못할 거다. 학생 때 증강현실 반려동물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본 적이 있었다. 화면에는 개가 내 손을 핥으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나오지만 거기까지일 뿐이다.
집에서 개를 키우고 있는데, 그 애와 교감할 때 느꼈던 감정 같은 건 받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아우슈비츠라는 장소에서 느꼈던 것들을 VR로 얻을 수는 없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 사진보다 입체감이 있으니, 실제로 가보면 더 흥미롭겠다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정도로 끝날 거 같다.
오히려 유대인 박물관처럼, 건물의 구조와 배치를 통해 체험을 전해줄 수 있다고 본다. 바닥에 얼굴 모형들로 가득찬 곳이 있었는데, 밟으면 절그럭 소리가 났다. 불편한 느낌이 들었는데, 유대인들의 아우성과 고통을 느껴보라는 취지인 듯했다.
가장 인상적인 곳은 한 널찍한 방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짙은 쥐색으로 된 방이었는데, 찬바람이 계속 불고 서늘한 기운이 증폭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홀로 있어야 했으니, 시간이 지나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정말 감금된 듯한 기분이었다. 갑작스럽게 죽음의 수용소에 끌려온 이들의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기술력 보다는 오히려 감각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설치물이 더 훌륭한 체험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서대문형무소가 나아가야 할 길
▲ 낙엽작품명 ‘낙엽.’ 가본 적은 없지만 이런 곳을 걷다보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오를거 같다. ⓒ 위키피디아
인터뷰가 끝나고 한동안 멍해 있었다.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예로부터 예술이야 말로 체험의 매개체였다. 자신의 오만가지 감정과 생각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받아들이는 이들로 하여금 공감하도록 하는 것이 예술 아니었던가.
첨단 기술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기술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 주체가 될 수는 없으니까. 현장의 느낌을 전부 살릴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다면 모르되, 그 전까지는 현장에서 직접 체험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기술과 예술 모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수천 년간 발달해온 예술 쪽이 100년도 채 안 되는 역사의 첨단 기술보다는 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으리라.
한국의 다크 투어리즘의 발전 방향에 대한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서대문 형무소에 있던 것 같은, 어설픈 체험시설들은 없애고 최대한 원형 그대로를 보존한다. 그 대신 유대인 박물관처럼, 건물의 구조와 배치로서 체험을 전해주는 전시관 건물을 개축하거나 신설한다.
VR은 홍보 영상에 활용하여 관람객들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그대로만 된다면 한국에도 아우슈비츠 못지않은 훌륭한 다크 투어리즘 유적이 만들어질 것이다. 큰 비용이 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손해가 아니라고 본다. 다크 투어리즘이 한국 사회의 인식을 바꿔 놓는다면, 그래서 더 이상의 참사를 막을 수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투자이리라.
▲ 유대인 박물관베를린 소재 유대인 박물관의 모습. 국내에서도 하루 빨리 이런 전시관을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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