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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언론은 중력파를 검출할 수 있을까

등록|2016.03.04 17:41 수정|2016.03.04 17:41
최근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던 중력파를 실제로 검출한 과학계의 대발견이 있었다. 과학에는 문외한이라 그것이 신기원이라고 하는 것만 알뿐 그것이 왜 신기원인지는 사실 잘 모른다. 필자가 관심이 있는 것은 중력파 검출보다 그걸 검출해낸 기계다.

지난 1960년대 조지프 웨버(1919~2000)라는 과학자가 '웨버 바'라고 이름 붙은 중력파 검출기를 제작했다. 웨버 바는 실제의 중력파를 찾기 위한, 역사상 첫 검출기다.

웨버 바는 물론 중력파 검출에 실패했지만 그 뒤 검출기는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성능이 개선되어 왔고 비로소 지난 2월초, 아인슈타인이 1916년 중력파의 존재를 예견한지 꼭 100년 만에 미국의 라이고 검출기가 중력파를 탐지했다.

중력파는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고 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지만 우린 전혀 느낄 수 없다고 한다. 신호가 너무 미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능개선을 거듭한 검출기는 과학계의 오랜 숙제를 해결해냈다. 이 검출기가 없었다면 당연히 중력파의 발견도 없었을 것이다.

훌륭한 정치와 감동을 주는 국회의원도 그간 우리 주변에 적지 않게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경제, 문화, 사회, 스포츠 등 우리 사회에서 영웅없는 곳이 없고 미담없는 곳이 없는데 여의도라고 그게 왜 없겠는가.

이번 필리버스터 정국은 정치에서의 감동을 탐지해냈다. 예기치않게 시작된 국회 대토론회는 끊임없이 중력파를 발산하고 있는 정치와 정치인들의 존재를 검출했다. 그들이 일으키고 있는 파동은 신호가 미약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평소 우리는 그런 정치와 정치인을 알지 못했다. 우연히 시작된 필리버스터 말고 항상 작동해야 하는 제대로 된 검출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검출기의 역할을 해야 하는 건 무엇일까.

이번 국회대토론에서 증명된 것은 정치와 국민 사이에, 그리고 특히 야당과 국민 사이에 몹시 두껍고 뿌연 가림막이 쳐져 있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그 가림막의 이름은 언론이다.

날것 그대로, 정치인과 그들의 신념과 행동이 잘못 포장되지 않고, 오도되거나 변질되거나 정쟁의 이름으로 도매급으로 취급되지 않고 유권자들에게 오롯이 전달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정치라는 단어가 혐오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이 해괴한 문화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야당의 얼굴엔 괴물을 들씌우고 권력자의 얼굴엔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를 달아매는 그들이 있는 한 특정 정치권력의 아성은 굳힐 수 있어도 우리 민주주의는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국회방송'이 현란한 편집도 없이 거액의 제작비를 들이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을 뿐인데 갑자기 인기채널이 되고 '마국텔'이 된 것에 언론은 자괴감을 느껴야 한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가장 기본적인 반성마저 없는 언론은 아마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의 도색잡지가 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죽어가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최근 총선을 앞두고 현지 민심탐방이라며 어떤 매체가 이런 말로 기사를 마무리하는 걸 봤다.

"결국 이번 총선은 어느 당이 훌륭한 후보들을 많이 내느냐에 따라 향배가 엇갈릴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성능의 검출기로 중력파를 탐지할 수 있을까. 이게 검출기가 맞기는 한가.

최근에 나온 이른바 '힐링서' 가운데서는 이런 문장을 봤다.

헬조선에 신음하는 청춘들을 위로한다면서 "잠 잘자고 나면 좋아져요. 토닥토닥." "삶에 역경이 없으면 내가 발전하기 힘듭니다."

이런 문장들은 어처구니없지만 그나마 잠시라도 스치는 힐링의 기운을 느낄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좋은 후보를 내느냐에 향배가 결정된다'는 기사들을 던지는 그런 저질 검출기를 갖고 우리가 도대체 무슨 재주로 중력파를 탐지할 수 있단 말인가.

중력파 검출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고 싶어 여기저기 기사들을 숱하게 살펴봤지만 과학자들이 쉽게 풀어쓴 칼럼 몇 편을 빼면 중력파 검출의 의미와 가치를 알려주는 기사들은 정말이지 찾기 힘들었다. 국회와 정치를 숱하게 비난하는 기사들을 십수년 봤지만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유권자의 삶과 생활을 어떻게 바꾸는 것인지 아직도 알지 못하듯이.

이 글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언론계 종사자들이 많을 것 같은데 이 말이 위안이 되길 바란다.

'여러분이 지금 느끼는 그 불편함은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선배들과, 그리고 그 선배의 선배들 훨씬 이전부터 우리 정치문화와 독자들이 여러분들에게서 항상 느껴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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