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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심판론'은 이미 실패한 전략이다

[주장] 무책임하고 소용없기까지 한 투표심판론

등록|2016.03.12 11:38 수정|2016.03.12 20:56
민주화, 총알(Bullet)에서 투표용지(Ballot)로

길고 어두웠던 권위주의 독재 시대를 끝낸 민주화의 가장 큰 성과는 권력의 교체 수단을 총알(Bullet)에서 투표용지(Ballot)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민주화를 위해 돌을 던지고 파이프를 휘두르던, 휘둘러야만 했던 시대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지나갔다는 말이다. 권력의 교체(추구) 수단이 총알과 돌에서 '페이퍼 스톤(Paper Stone)'이라 불리는 투표용지로 바뀌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분명하다. 어찌 되었건 폭력이 아닌 평화가 도래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87년 6월의 민주화는 민중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이루어진 아래로부터의 민주화(Democratization from Bottom)이 아니라 민주화 세력과 독재 세력의 온건파들의 상호 타협에 의해 이루어진 타협에 의한 민주화(Pacted Democracy)라는 한계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태생부터 보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민주화라는 성과는 이루었으나 막상 민주화 세력은 꽤 큰 타격을 입었고, 그 이후 조금씩 거리에서의 정치가 설 곳을 잃어갔다. 그 빈틈을 투표소에서의 정치가 서서히 채워서, 작금에 이르러서는 거리에서의 정치가 거의 실종되고 투표가 거의 절대적인 힘을 가지는 상태가 되었다.

투표는 현재 민주주의 사회에서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인 정치 참여 수단이다. 그리고 범(凡)진보, 민주주의 진영은 길게 보면 87년 민주화 이후로 계속 이 강력한 투표를 통해 정권을 심판하자고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이후로 그나마 진보적이라는 대통령은 김대중과 노무현 두 명이 다였고, 계속 보수적이고 어찌 보면 반민주적이기까지 한 정치 엘리트들이 계속해서 국회와 청와대에 들어갔다. 심지어는 군사 독재자의 자녀까지.

반대로 말하자면 계속 투표로 심판하자는 이야기를 하던 이들은 번번이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결국 야권이 얼마나 안일하고 무능하게 대응해왔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무능함은 아마 '심판'이라는 두 글자에서 오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반사적으로 '심판'을 이야기하다 보니 정책이 아무리 좋아도 두각을 드러낼 수 없게 되고 범야권의 후보자들이 고리타분하게 여겨지기 쉽게 만드는, 자충수라는 것이다. 즉, 투표를 통해 심판하자는 '투표심판론'은 오히려 야당의 발을 묶었고 이른바 '중도 유동층'을 사로잡는 것을 실패하도록 만든 것이다.

흐지부지 된 필리버스터와 "투표로 심판" 메시지

마지막 주자로 나선 이종걸 '울먹'지난 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 나선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선거법 처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게 됐다"며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할 때까지 서 있겠다"고 말한뒤 울먹이고 있다. ⓒ 남소연


지난달 테러방지법을 둘러싼 야당의 필리버스터는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의 지지율 또한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일종의 '정국'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야당, 특히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도 테러방지법을 두고 '수정'과 '폐기'를 두고서 의견이 갈렸고, 필리버스터를 중단시켜가며 당론으로 결정된 '수정'은 원내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새누리당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하지만 승패 구도와는 상관없이 제1야당이 정국 막판에 보여준 태도는 매우 무기력했고, 기껏 쌓은 공든 탑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로 "민주당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냉소와 포기가 섞인 반응이었다.

당의 지도부라 할 수 있는 박영선 의원과 이종걸 원내대표의 "나중에 투표로 응원해 달라"는 투의 무책임한 발언들은 '져도 잘 지면 된다'라는 우호적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 버리고 말았고, 결과적으로 '졌는데 심지어 잘 지지도 못했다'라는 인식만 주고 말았다.

이들 말고도, 많은 야당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에게 표를 줘 정권과 여당을 '심판'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많은 지지자들도 이른바 '투표심판론'을 들먹이곤 한다. 그런데 사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길게 보면 87년 민주화 이후로 지금까지 여러 번의 선거 동안 반복되어 온 이 '투표심판론'은 사실 별로 힘 있는 말이 아니게 된 지 오래다.

지난 정권 때부터 지금의 야당은 사실상 '정권 심판' 외에는 중요한 공약이 한참 부족했고, 민생 정당의 프레임까지 사실상 가져가 버린 여당에게 유동층 또한 빼앗겨 버리다시피 했다. 지키지 않더라도 당장 민생의 이야기를 하는 여당에 대항해 그들의 표심을 잡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실패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투표만이 해답이고, 선거를 통해 심판하자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수 차례의 선거를 거치며 그것만으론 절대 정권과 여당을 심판할 수 없음이 여실히 증명된 '심판론'을 가장 앞에 내세워 선거에 임한다는 것은 야당 스스로 학습능력이 부재함을 인정하는 꼴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투표 안 하면 '개새끼'라고요?

▲ 21세기대학생연합 소속 대학생들이 지난 2012년 3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반값등록금·교육공공성완전실현 프로젝트<보고있나>국민대회'에서 이명박 정부와 새누리당의 반값등록금 정책을 규탄하며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해 '20대의 투표 참여로 20대의 삶을 바꾸자'라고 적힌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투표심판론'을 이루는 중요한 기둥 중 하나는 바로 '타자화'이다. 대상을 정하고 계속 타자화해 가며 스스로를 정당화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점이 오히려 이 이론(?)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20대 개새끼론'인데, 이는 20대, 특히 대학생이 투표일에 투표에 참여하지 않고 여가만 즐기기 때문에 범진보 계열이나 야당의 후보가 당선되지 못한다는, 그렇기 때문에 20대는 시쳇말로 '개새끼'라는 정치 괴담이다.

그런데 이 괴담은 기성세대의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무슨 과학처럼 퍼지곤 하는데, 사실 이것은 이른바 '꼰대질'에 불과하다. 예컨대 <나는 꼼수다>의 김용민씨 같은 경우는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이 괴담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전파자인데, 김용민 씨 외에도 많은 '꼰대'들은 앵무새처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여러 조사에 의하면 20대 투표율은 평균치보다 낮은 편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점점 적어지는 추세이기도 하고 비난의 주된 대상이 되는 대학생 계층의 투표율은 집계되지 않는다. 출구 조사에서도 직업은 잘 묻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정치 괴담은 근거 없는 타자화와 대상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지점 중 하나는, 이 근거 없는 괴담의 신봉자들은 그 '20대'가 투표를 야당 –정확히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거대 야당- 에 할 거라는 생각을 너무도 쉽게 한다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생각이 없었다면 이 '20대 개새끼론'은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물론 20대를 비롯한 젊은 층이 기성 세대에 비해 조금 더 진보적 경향을 보인다지만, 그렇게 넘겨짚는 것은 오류를 넘어 망상 수준이다.

그리고 비슷한 방식으로 여성과 군소 진보정당 지지자 또한 타자화되곤 한다. 여성은 "여자는 집안일하느라 정치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수준에 머무르는 성적, 정치적 인식에 의해 진보적이기는커녕 정치에 관심도 없는 반정치적인 객체로 타자화되고, 군소 진보정당 지지자들은 "연대와 통합을 통한 승리를 저해한다"는 이유로 일종의 반역자 취급당하곤 한다.

심지어 2012년 18대 대선에서는 노동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무소속 김소연 후보(득표율 0.05%)와 김순자 후보(0.15%) 때문에 표가 갈라져 문재인 후보(48%)가 박근혜 후보(51.6%)에게 패배했다는 근거 없는, 그리고 불가능한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다.

20대와 여성, 군소정당 지지자 모두 일종의 정치적 소수자인데, 결국 이른바 'XX 개새끼론'은 그러한 정치적 소수자들에게 선거 패배의 책임을 돌리려는 동시에 자신들은 할 만큼 했다는 일종의 자위에 불과하다. 그것도 매우 질 나쁜 자위 말이다.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키는 '투표심판론'

정치학자들과 여론조사 기관 등에서는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콘크리트 지지율을 약 35% 선으로 지레짐작한다. 아무리 지지율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평균 약 30~40% 선의 지지율은 유지하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숫자이기도 하고, 정치라는 것은 무릇 게임에 가까운 법이기에 과반을 넘어야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투표심판론'은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또 투표를 통해 선거에서 승리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정권을 '심판'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느 곳에도 없다. 더군다나 야당과 투표심판론을 굳게 믿는 기성 지지자들이 이런 '꼰대질'만 하고 있는 이상은 더욱 그렇다. 오히려 그들 때문에 정치혐오나 탈정치화와 같은 참여의 문제가 생긴다면 모를까, 그것이 해소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것 또한 권리다. 이를 두고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 권리'라고 이야기하곤 하는데, 자신의 정치적 의사에 따라 투표를, 선거를 보이콧하는 것 또한 참정권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 투표를 하지 않는다고 보이콧한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투표는 매우 훌륭한 정치 참여 수단이다. 실제로 투표는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다만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투표가 유일하고 전지전능한 해답은 아닐 것이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들 –예컨대 지금도 진행 중인 미국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운동, 3월 9일부터 시작된 프랑스 국영 철도(SNCF) 노동자들의 전면파업 등- 과 지금까지의 역사 또한 별로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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