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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에 따라잡힌 뇌? 두려워 말라

[문화비평] 알파고가 보여준 기술의 발전, 사회가 개입해야

등록|2016.03.17 09:47 수정|2016.03.17 09:47

<세기의 대국> 이세돌 9단과 알고리즘이세돌 9단이 지난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구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의 5번기 제3국 맞대결이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캐논 1DX 2회 다중촬영. ⓒ 연합뉴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세기의 대결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다. 칸트는 살면서 두 번 산택을 중단한 적이 있는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와 루소의 <에밀>을 읽었을 때였다. 만약 칸트가 현대에 살았다면 그는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 때문에 산책을 중단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물론 많은 과학자들이 지금 인공지능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에 냉랭하다. 인공지능으로 인한 변화에 그간 무관심하다가 이제야 호들갑을 떤다는 듯한 뉘앙스를 받는다. 하지만 원래 인식은 구체적 사건을 통한 체험의 형태로 일어난다. 이번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을 통해 많은 대중들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 두려움의 의미는 문화비평의 관점에서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하나의 비극적 서사구조를 갖는다. 원래 비극은 남녀간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비극은 영웅적 인물이 가진 본연의 약점, 즉 하마르티아로 인해 땅으로 추락해버리는 상황을 다룬다. 이때 추락은 관람객에게 카타르시스라는 이름의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카타르시스가 감정의 정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비극을 가장 훌륭한 문학 장르라고 봤다. 문학사에서도 세월이 지나며 '비극 구조'가 함께 발전하고 변화한다. 비극이 부활한 르네상스 시대에, 작가들은 신의 질서(Great Chain of Being)로 꽉 짜인 세상에 혼란을 일으키는 사람을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그래서 맥베드가 던컨 왕을 살해하는 대목에서 천둥이 치고 동물들이 두려움에 떤다. 이들은 모두 거대한 존재의 고리에 묶인 이들이기 때문에, 서로의 죽음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에 비극적 영웅의 죽음은 그로 인해 흔들린 질서를 회복시키며 마무리 된다.

현대에 와서 예술의 정의가 깊은 차원에서 재발견되는 과정에서 비극과 같은 거대한, 혹은 정형화된 이야기를 다루는 작가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문학이 예술이라는 전문 영역과 대중문화로 구분되기 이전 시대에, 비극을 통해 거대서사를 구상한 한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자면 안톤 체홉을 떠올리겠다. 그의 <벚꽃동산>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에 다들 너무 부족하다. 세상 변하는 지도 모르고 흥청망청 써대던 봉건적 귀족들이나 근대적 자본주의 세계로 급속하게 사회가 변하며, 속물적으로 변해가는 인간 군상들 중 누구도 전통적 의미의 비극적 서사에 어울리는 캐릭터는 없다. 하지만 벚꽃 동산의 주인이 수대에 걸쳐 동산의 귀족을 주인으로 모신 하인으로 바뀌는 대목에서. 독자나 관객들은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된다. 이때 비극적 영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근대 사회의 도래로 붕괴된 전근대 세계 그 자체였기 떄문이다. 체홉은 이렇게 비극이라는 방식을 통해 세계의 몰락을 그렸다.

비극적 서사구조로 각인된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인공지능과 알파고의 대결은 대중들에게 비극적 서사구조로 각인되었다. 이세돌은 스스로 인간의 대표가 아니라 말했지만, 그는 인간의 대표성을 가진 인물이다. 냉정하게 말해 이세돌보다 바둑을 더 잘 둘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전 세계에 3~4명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가 인공지능을 이기지 못한다. 그보다 세계 랭킹에 상위에 있는 기사들에 대한 검증은 아직 하지 않았지만,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드러났듯 약간의 가능성을 제외하곤 인간이 인공지능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바둑에 있어서 인공지능은 검증된 것 만으로도 대다수 인간을 훌쩍 초월했고, 앞으로 인간이 알파고를 따라잡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바둑은 분명 하나의 보드게임일 뿐이다. 인간 세상은 훨씬 많은 변수들이 무한히 작용하여 발생하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상적 뇌활동을 따라잡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영역과 경계를 넘나드는 직관과 창의성의 묘체를 인공지능이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직 무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 우리가 '이성'이라는 이름 안에 넣었던 수 많은 능력들이 인공지능에게 추월당한 것은 사실이다. 바둑이란 직관과 연산능력으로써 이성의 조화가 필요했던 게임에서 인공지능이 승리함으로써, 앞으로 인간은 많은 영역에서 인공지능에게 추월당할 것임이 자명해졌다.

인간의 뇌가 따라잡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다

이 문화현상의 진짜 의미는 '인간의 뇌가 따라잡혔다'라는 사실에 대한 호들갑이 아니라, "빠른 속도로 추월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이다. 그리고 이 약간의 추월만으로도 인간이 이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뇌과학자들이 생각하듯, 인공지능의 갈 길이 먼 것과 별개로. 많은 노동의 영역에서 인공지능은 이미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지능적 존재가 되었다. 고도의 지성이 필요한 바둑에서도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진다면, 다른 영역에서는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의 등장. 이건 근대적 세계가 기본으로 설정했던 이성 중심의 세계관이 근본에서부터 허물어지는 것이다. 또한 다른 한 편에서 근대 사회를 설정하는 중요한 지표였던 노동중심의 세계관 또한 허물어져 버린다. 체홉이 봉건적 세계가 근대적 세계로 전복되는 과정을 비극적 서사로 다뤘다면,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인간 중심의 근대적 세계가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전복되는 모습을 비극적 서사를 통해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문제는 수 많은 비극들이 결국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문학적 효과'를 연출했다면,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설정이 아니라 사실이다. 이세돌은 경기에서 이겨서가 아니라, 졌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패배로 인해 인류는 카타르시스라는 연출적 즐거움이 아니라, 영웅의 몰락이 상징하는 자신의 몰락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 추락의 정서는 공포와 두려움으로써, 포비아가 된다.

기술에 대한 사회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은 무엇보다 기술의 발전에 대한 사회적 성찰의 필요성을 널리 알린 중요한 계기였다. 그는 이 대결에서 짐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영웅이 되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이세돌 9단에게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이 대결이 우리 정부와 기업들에게는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탐욕하게 만든 것 같다. 공포가 탐욕으로 전환되면,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해 새롭게 요구되는 각종 사회적 성찰이 사라지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해 생긴 각종 두려움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로 인해 변화 될 사회를 대비하는 것이다. 50년 전 사람들에게 현재의 세계를 이야기하면, 그들은 분명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지 말라고 말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50년 후 사람들의 삶은 현재 인간들의 시점에서 볼 때 분명 허무맹랑할 것이 틀림없다.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기술의 발전을 인간과 사회의 필요에 따라 제어하고 조절 할  있는 통제력이다. 기술에 사회의 개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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