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 장맛의 보이지 않는 비결을 소개합니다
수호 할머니 장 담그는 날... 걱정과 염원 더해져야 비로소 깊어지는 장맛
충청도에서 음력 2월은 장을 담그는 달이다. 주거형태와 먹거리문화가 달라지면서 예전처럼 집집마다 장담그는 풍습이 사라지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충남 예산지역에는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생활문화다. 그러나 젊은 층에 대물림하는 경우는 흔치 않아서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다.
올해 장 담그는 최고의 길일로 꼽힌 지난 13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 사는 수호할머니(84) 댁에 다녀왔다. 소중한 우리의 생활문화에 대한 가치를 함께 느끼기 위해 장담그는 풍경을 기록한다. - 기자 말
어머니는 정갈하게 손질한 메주와 깨끗이 소제한 항아리를 앞에 두고 장독대에 앉아 계셨다.
굳이 '말날'이어야 한다고, 오늘(13일)이 '말날 중에도 상말날'이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장을 담가야 한다는 의지를 며칠 전부터 보이셨던 어머니다. 올해는 마침 직장에 나가는 며느리가 쉬는 일요일이니 "더 늙기 전에" 가르칠 수 있는 기회라며. 그런데도 당신이 모든 준비를 끝내고 겨우 염도 맞춰서 붓기만 하면 되는 일만 남겨놨을 뿐이다.
장 담그기는 사실 1년이 고스란히 들어간다고 해야 옳다.
6월 마늘을 캔 땅에 종콩을 심고, 가을에 거둬 음력 9월 그믐이 넘기 전에 메주를 쒀야 한다. 처마 밑에 매달아 바람과 햇빛을 적당히 맞춘 메주를 떼는 시기도 정해져 있다. 음력 10월 그믐을 넘겨서는 안 된다.
뜨뜻한 방에서 겨울을 난 메주에는 좋은 곰팡이가 피고, 그 뒤로는 또 대청으로 나와 장을 담글 때까지 봄을 기다린다. 장을 담그기 전 일주일은 장광에 널어두고 매일 솔질을 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수호 할머니의 말씀을 재구성했다).
그렇게 '대대로 이어진 법'에 따라 '왜'라는 물음 없이 완성된 메주가 드디어 항아리 안에서 제자리를 잡는 날이다.
"일요일에 쉬어야 하는디 불러서 어쩌냐."
자식들 먹이려고 담그는 장이건만, 갖다 먹을 사람 잠깐 부르는 것도 이렇게 마음쓰는 어머니다.
"어떠냐. 달걀이 500원짜리 동전만하게 올라왔냐. 어째 아직 즉은거 같지? 아까 소금되가 서운타 싶드니. 소금 좀 더 넣으야 것다."
"됐나? 어떠냐. 인제 500원짜리만 하냐? 아직 아니지?"
되보다 더 정확한 어머니의 손에 여러 해동안 깨진 항아리에 담아 간수를 뺀 굵은 소금이 한 움큼 쥐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소금물에 흩뿌려진다.
"인자 된 거 겉지?
"어머니, 500원짜리 동전 나오기 전엔 어뜨케 알았대요?"
"옛날이야 시어머니 시키는대루만 하믄 됐지. 달걀 갖구 이 야단 했간? 항아리마다 메주 몇 댕이, 물지게로 몇지게, 소금 몇되. 옛날 되는 지금보다 즉었어. 우리 어머니는 맨날 '나하는 대루만 하라'구 노래를 하셨으니께. 근디 진짜 어머니가 하라는대루 하면 간이 딱 맞고 맛있거든. 뭐든지 자신있구 참 대단하셨지."
올해로 여든넷 되신 어머니, 수도 없이 반복한 당신 시어머니 추억담인데 할 때마다 아련함이 더한다. 장 담근 세월이 70년 가깝건만 아직도 모든 게 조심스럽고, 잘못될까 걱정이 태산인 어머니.
"인제 나 소용 읍으니께 잘 배워둬야 헌다. 허긴, 사먹으면 되지, 괜힌 힘들게 이런 거 담아먹지 말고 살어라."
두 가지 마음이 엇갈리는 어머니는 "사먹으라"고 하다가도 시어머니의 시어머니, 그 훨씬 이전부터 이어져온 집안의 장맛이 끊어질까 또 걱정이시다.
"옛날이는 환갑만 넘으믄 며느리 들여서 다 맡겼는디, 요새 세상은 누가 이런 거 배우간? 늙은이 입맛이 다 돼서 장 담궈도 맛이 읍서."
"어머니 장맛이 최고"라며 며느리가 아무리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도 어머니는 믿지 않는 눈치다.
"지금 했어두 내년 봄인 또 어뜨케 했드라, 한참 또 밤새 생각혀야 혀. 니가 찬찬하게 배우야지. 얘, 인제 된거 같지?"
드디어 항아리 속에 잘뜬 메주가 앉혀지고, 소금물이 부어진다. "요새 소금은 옛날 같지 않게 깨끗혀서 소쿠리에 굳이 받히지 않아도 돼여" 하시면서도 어머니는 새댁 적부터 써온 대나무 소쿠리를 항아리 위에 올려 놓는다. 넉넉히 여섯되의 소금을 머금은 열두 양동이의 물이 항아리에 꼭 맞게 들어찬다.
"메주가 잘 뜨네. 올해 첨이여. 이렇게 한 번에 척 뜬게."
"어머니, 제가 해서 그래요."
"그려. 올해는 에미가 해서 더 맛있것다."
겨우 항아리에 소금물을 부었을 뿐인 며느리의 호언을 어머니는 또 그렇게 너그럽게 받아 주신다.
참나무숯 세덩이와 마른 고추 다섯개, 통깨그릇을 갖고 나오신 어머니 "숯으로 부정한 거 제거하구, 고추처럼 매콤허구 칼큼허구, 깨소금처름 고숩게" 주문을 외듯 빨갛고 검고 흰 것들을 메주 위에 보기좋게 띄우신다.
이윽고 뚜껑이 덮이고, 항아리 몸을 닦는 어머니의 손길이 부드럽다.
"인자 스무날쯤 넘으믄 바위옷이라구 입어. 그런거 입으며는 얼추 익었구나 허구 한달되믄 건져서, 치달여서, 제 멀국 붜서 된장으루 맨들구, 간장두 담구 그러지. 그때 또 오너라 잉?"
단단히 다짐 받으신 어머니, 겨우 한시간 남짓 구경하듯 있던 며느리에게 상을 주시듯 묵은된장항아리를 열고 그릇에 옮겨 담으신다.
"이게 재작년거여. 작년거는 안직 안헐었어. 1년되믄 먹는 사람들도 있다드만, 우리는 묵혀서 먹으야지, 안묵히구 먹으믄 들 개운혀"
된장에 고추장까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최상품의 웰빙 양념을 받아 안은 며느리, 평생을 가족들 건강 챙기느라 주름 깊어진 어머니의 손을 바라보다 "장 가르는 날은 다음달 둘째주 일요일날 해요, 그때가 한달쯤 됐을 때니 딱 맞잖아요? 그 다음 주에는 제가 일이 있어요"라는데, 어머니 힘도 안들이고 답하신다.
"그게 그렇게 딱 정할 수 있간? 장 익는 거 봐가며 허야지,"
사람 일정보다 햇빛과 바람과 자연의 일정이 더 우선인 어머니. 대처나간 자손들까지, 온 가족의 1년 먹거리 맛이 제대로 들지 걱정하고 염원하며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더해져야 비로소 장맛이 깊어지는가 보다.
올해 장 담그는 최고의 길일로 꼽힌 지난 13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 사는 수호할머니(84) 댁에 다녀왔다. 소중한 우리의 생활문화에 대한 가치를 함께 느끼기 위해 장담그는 풍경을 기록한다. - 기자 말
어머니는 정갈하게 손질한 메주와 깨끗이 소제한 항아리를 앞에 두고 장독대에 앉아 계셨다.
굳이 '말날'이어야 한다고, 오늘(13일)이 '말날 중에도 상말날'이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장을 담가야 한다는 의지를 며칠 전부터 보이셨던 어머니다. 올해는 마침 직장에 나가는 며느리가 쉬는 일요일이니 "더 늙기 전에" 가르칠 수 있는 기회라며. 그런데도 당신이 모든 준비를 끝내고 겨우 염도 맞춰서 붓기만 하면 되는 일만 남겨놨을 뿐이다.
장 담그기는 사실 1년이 고스란히 들어간다고 해야 옳다.
6월 마늘을 캔 땅에 종콩을 심고, 가을에 거둬 음력 9월 그믐이 넘기 전에 메주를 쒀야 한다. 처마 밑에 매달아 바람과 햇빛을 적당히 맞춘 메주를 떼는 시기도 정해져 있다. 음력 10월 그믐을 넘겨서는 안 된다.
뜨뜻한 방에서 겨울을 난 메주에는 좋은 곰팡이가 피고, 그 뒤로는 또 대청으로 나와 장을 담글 때까지 봄을 기다린다. 장을 담그기 전 일주일은 장광에 널어두고 매일 솔질을 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수호 할머니의 말씀을 재구성했다).
▲ 염도를 측정하기 위해 소금물에 달걀을 띄워놓은 모습.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 염도가 잘 맞은 소금물을 항아리에 붓자 메주가 둥실 떠오른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그렇게 '대대로 이어진 법'에 따라 '왜'라는 물음 없이 완성된 메주가 드디어 항아리 안에서 제자리를 잡는 날이다.
"일요일에 쉬어야 하는디 불러서 어쩌냐."
자식들 먹이려고 담그는 장이건만, 갖다 먹을 사람 잠깐 부르는 것도 이렇게 마음쓰는 어머니다.
"어떠냐. 달걀이 500원짜리 동전만하게 올라왔냐. 어째 아직 즉은거 같지? 아까 소금되가 서운타 싶드니. 소금 좀 더 넣으야 것다."
"됐나? 어떠냐. 인제 500원짜리만 하냐? 아직 아니지?"
되보다 더 정확한 어머니의 손에 여러 해동안 깨진 항아리에 담아 간수를 뺀 굵은 소금이 한 움큼 쥐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소금물에 흩뿌려진다.
"인자 된 거 겉지?
"어머니, 500원짜리 동전 나오기 전엔 어뜨케 알았대요?"
"옛날이야 시어머니 시키는대루만 하믄 됐지. 달걀 갖구 이 야단 했간? 항아리마다 메주 몇 댕이, 물지게로 몇지게, 소금 몇되. 옛날 되는 지금보다 즉었어. 우리 어머니는 맨날 '나하는 대루만 하라'구 노래를 하셨으니께. 근디 진짜 어머니가 하라는대루 하면 간이 딱 맞고 맛있거든. 뭐든지 자신있구 참 대단하셨지."
올해로 여든넷 되신 어머니, 수도 없이 반복한 당신 시어머니 추억담인데 할 때마다 아련함이 더한다. 장 담근 세월이 70년 가깝건만 아직도 모든 게 조심스럽고, 잘못될까 걱정이 태산인 어머니.
"인제 나 소용 읍으니께 잘 배워둬야 헌다. 허긴, 사먹으면 되지, 괜힌 힘들게 이런 거 담아먹지 말고 살어라."
두 가지 마음이 엇갈리는 어머니는 "사먹으라"고 하다가도 시어머니의 시어머니, 그 훨씬 이전부터 이어져온 집안의 장맛이 끊어질까 또 걱정이시다.
▲ 장담기 마지막 과정. 숯과 붉은고추, 깨를 정성스레 띄워야 장담기가 끝이 난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옛날이는 환갑만 넘으믄 며느리 들여서 다 맡겼는디, 요새 세상은 누가 이런 거 배우간? 늙은이 입맛이 다 돼서 장 담궈도 맛이 읍서."
"어머니 장맛이 최고"라며 며느리가 아무리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도 어머니는 믿지 않는 눈치다.
"지금 했어두 내년 봄인 또 어뜨케 했드라, 한참 또 밤새 생각혀야 혀. 니가 찬찬하게 배우야지. 얘, 인제 된거 같지?"
드디어 항아리 속에 잘뜬 메주가 앉혀지고, 소금물이 부어진다. "요새 소금은 옛날 같지 않게 깨끗혀서 소쿠리에 굳이 받히지 않아도 돼여" 하시면서도 어머니는 새댁 적부터 써온 대나무 소쿠리를 항아리 위에 올려 놓는다. 넉넉히 여섯되의 소금을 머금은 열두 양동이의 물이 항아리에 꼭 맞게 들어찬다.
"메주가 잘 뜨네. 올해 첨이여. 이렇게 한 번에 척 뜬게."
"어머니, 제가 해서 그래요."
"그려. 올해는 에미가 해서 더 맛있것다."
겨우 항아리에 소금물을 부었을 뿐인 며느리의 호언을 어머니는 또 그렇게 너그럽게 받아 주신다.
참나무숯 세덩이와 마른 고추 다섯개, 통깨그릇을 갖고 나오신 어머니 "숯으로 부정한 거 제거하구, 고추처럼 매콤허구 칼큼허구, 깨소금처름 고숩게" 주문을 외듯 빨갛고 검고 흰 것들을 메주 위에 보기좋게 띄우신다.
이윽고 뚜껑이 덮이고, 항아리 몸을 닦는 어머니의 손길이 부드럽다.
"인자 스무날쯤 넘으믄 바위옷이라구 입어. 그런거 입으며는 얼추 익었구나 허구 한달되믄 건져서, 치달여서, 제 멀국 붜서 된장으루 맨들구, 간장두 담구 그러지. 그때 또 오너라 잉?"
단단히 다짐 받으신 어머니, 겨우 한시간 남짓 구경하듯 있던 며느리에게 상을 주시듯 묵은된장항아리를 열고 그릇에 옮겨 담으신다.
"이게 재작년거여. 작년거는 안직 안헐었어. 1년되믄 먹는 사람들도 있다드만, 우리는 묵혀서 먹으야지, 안묵히구 먹으믄 들 개운혀"
▲ 장항아리를 정성스럽게 닦고 있는 모습.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 수십년 세월을 함께 해온 대바구니와 대소쿠리, 고무함지박이 제 할일을 끝내고 햇빛을 쏘이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된장에 고추장까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최상품의 웰빙 양념을 받아 안은 며느리, 평생을 가족들 건강 챙기느라 주름 깊어진 어머니의 손을 바라보다 "장 가르는 날은 다음달 둘째주 일요일날 해요, 그때가 한달쯤 됐을 때니 딱 맞잖아요? 그 다음 주에는 제가 일이 있어요"라는데, 어머니 힘도 안들이고 답하신다.
"그게 그렇게 딱 정할 수 있간? 장 익는 거 봐가며 허야지,"
사람 일정보다 햇빛과 바람과 자연의 일정이 더 우선인 어머니. 대처나간 자손들까지, 온 가족의 1년 먹거리 맛이 제대로 들지 걱정하고 염원하며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더해져야 비로소 장맛이 깊어지는가 보다.
덧붙이는 글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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