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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서원 터, 지금 보지 못하면 영영 못 본다

[대구의 서원] 대구 최초의 서원 연경서원 창건을 주도한 전경창과 무동재

등록|2016.04.18 12:06 수정|2016.04.18 12:02

▲ 연경서원은 대구에서 최초로 세워진 서원이지만 임진왜란 때 전소된다. 연경서원 일대의 연경동에 지어졌던 주택 등 건물들은 현재 아파트 단지 조성을 앞두고 대부분 철거되었고, 연경서원 인근의 것으로 여겨지는 구강당(九岡堂, 채씨 재실)만 이전 복원을 기다리며 폐허처럼 남아 있다. ⓒ 정만진


1542년(중종 37),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 세워진다. 그 후 경주 서악서원, 영천 임고서원, 해주 문헌서원 등이 연이어 설립된다. 자극을 받은 이숙량(李叔樑, 1519∼1592), 전경창(全慶昌, 1532∼1585) 등 대구 선비들도 서원 건립에 나선다.

이윽고 1563년(명종 18) 공사가 시작되고, 만 2년만인 1565년(명종 20) 대구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이 완공된다. 창건 당시 연경서원의 건물은 모두 40여 칸이었다. 중앙에 정남향의 강당 인지당이 세워졌고, 그 앞 좌우로 동재 보인재와 서재 시습재가 건립되었다. 남문인 초현문의 서쪽에 동몽재를 두었고, 그 외에도 애련당 등 여러 건물들을 설치했다.

서원은 일반적으로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강학 공간과 앞 시대의 뛰어난 선비들을 제사 지내는 제향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연경서원은 처음 세워질 때 사당이 설립되지 않았다. 연경서원에 사당이 추가된 때는 개원 후 48년이나 지난 1613년(광해군 5)이었다.

연경서원은 사당 없이 출범한 교육기관이었다

연경서원은 강학 공간만으로 출발한 특이한 서원이었다. 이는 대구 선비들이 연경서원 설립의 목적을 교육 기관 개설에 두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구본욱은 논문 <연경서원의 경영과 유현(儒賢)들>에서 '(건립 당시에 사당이 없었던 것은) 연경서원이 선현을 추숭(追崇)하는 제향(祭享)보다는 강학(講學)에 중점을 두어 건립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라고 평가한다.

'연경(硏經)'은 한자 뜻만 풀이하면 '유교 경전 공부' 정도로 읽힌다. 그래서 연경이라는 단어는 문학적 비유가 녹아 있지도 않고, 자리잡고 있는 터에 서린 애환을 품고 있는 듯 여겨지지도 않는, 그저 딱딱한 느낌만 준다. 하지만 '연경서원'이라는 이름에는 그런 선입견과 정반대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연경은 고려 태조 왕건의 옛일이 서려 있는 흥미로운 이름이다.

연경서원 이름에 얽힌 왕건의 옛일

927년, 포석정까지 진격하여 신라 경애왕을 죽인 후백제 견훤은 유유히 귀국 길에 올랐다. 신라를 돕기 위해 출전한 고려 태조 왕건은 먼 길 탓에 이제야 팔공산 아래에 닿았다. 머잖아 동화사 아래 좁은 골짜기에서 대혈투가 벌어질 시점이었다.

왕건은 잠시 짬을 내어 산책에 나섰다. 넘치는 여유를 감당 못해 한가로이 서성댄 행동은 물론 아니었고, 전투를 앞둔 만큼 지형 정찰과 민심 다독이기에 주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왕건은 금호강 인접 들판 마을에서도 노(老)련하게 농삿일을 해낼 남자 어른들을 볼 수 없었다(不). 모두들 전쟁터에 나간 탓이었다. '논밭을 잘 다스릴 장정들이 이렇게 없다니!' 하고 왕건은 탄식을 했다. 그 후 '불로(不老)'마을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 대구광역시에 있지만 전원의 내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연경마을의 2010년 모습. 그러나 이제는 찾아가도 이런 풍경은 볼 수가 없다. 아파트를 짓는다며 뒤로 보이는 도덕산 아래까지 몽땅 밀어버렸기 때문이다. ⓒ 정만진


반면, 동화천 너머 산속 마을의 풍경은 불로동과 달랐다. 왕건이 지나갈 때 집집마다 선비들의 책(經) 읽는(硏)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나왔다. 왕건은 선비들의 학구적 태도에 감동했다. 그 이후 '연경'마을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연경서원은 이 연경마을이라는 이름에서 연유했다. 이숙량, 전경창 등 대구 선비들은 서원 이름을 정하면서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동화천의 화암 인근에 설립된 서원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화암서원이라 부르다가, 다시 연경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연경마을에 건립되는 서원에 연경서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므로 애당초 어색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었다. 게다가 연경 자체가 '유학 경전을 공부한다'는 의미였으니 서원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데에 아주 적합했다.

'연경' 딱딱한 단어이지만 서원 이름으로는 제격

서원 완공을 앞두고 이숙량은 스승 이황에게 기문(記文, 내력을 적은 글)을 부탁했다. 이황은 사양하면서 이숙량이 지은 기문을 그대로 쓰라고 했다. 그 대신 이황은 시와 '화암서원 기후(記後, 발문)'을 보내왔다. 한시 원문과 구본욱 번역문을 함께 읽어 본다.

畵巖形勝畵難成 화암의 빼어난 모습 그림으로 그리기 어려운데
立院相招誦六經 서원을 건립하여 함께 모여 육경(六經)을 공부하네
從此佇聞明道術 이를 쫓아 도술(道術)을 밝혔다는 소식 듣기를 기다리노니
可無呼寐得群醒 몽매한 뭇사람을 불러 일으켜 깨우침이 없겠는가

이황은 화암(畵巖)이 그린(畵) 듯 빼어난 바위(巖)이기 때문에 최고의 화가가 나서도 실물을 제대로 나타내기 어렵다고 노래했다. 사람이든 산수든 보통은 그림과 사진이 실물보다 더 멋진 법이지만, 화암 자체가 워낙 빼어난 천하 절경인 까닭에 아무리 뛰어난 시각예술 작가라 하더라도 본래 모습보다 더 아름답게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이 이황의 생각이었다. 

이숙량도 <연경서원기>에 '화암은 연경서원의 서쪽을 지켜준다. 붉고 푸른 절벽이 우뚝하게 솟아 기이한 형상을 보여 그림 같이 아름다워 畵巖(화암)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물론 화암은 하식애(河蝕涯)의 일종이다. 빙하기 이래 아득한 세월 동안 물(河)은 줄기차게 흘러 흙과 잔돌들을 깎아(蝕) 낮은 곳으로 쓸어내렸고, 이윽고 거대한 암석만 물가에 절벽(涯)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즉 하식애 일대는 자연스럽게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게 된다.

▲ 동화천에서 바라본 화암 쪽의 풍경 ⓒ 정만진


연경서원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진다. 세워진 지 겨우 30년 만에 한 줌 재만 남기고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도 전경창과 이숙량은 자신들이 앞장서서 건립한 연경서원이 그토록 허망하게 화염에 휩싸여 소멸되는 장면을 직접 보지는 않았다. 전경창은 임란 발발 7년 전인 1585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숙량은 전쟁이 터진 그 해 74세나 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10월의 진주성 싸움에 참전했다가 진중에서 타계했기 때문이다.

이숙량은 <어부가>를 남긴 이현보의 아들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목, 금응협 등과 함께 (임금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한 후, 곧 창의를 독촉하는 격문을 써서 선비들에게 배포했다. 그의 격문에 호응하여 스스로 의병이 되어 영천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간(李幹)은 임진년 당시 불과 17세에 지나지 않는 소년이었다. 이간은 이숙량의 제자였다.

임진왜란 유적으로 평가해도 충분한 연경서원

전경창은 이미 이승을 떠났지만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왜적과 맞서 싸우는 일에 적극 나섰다. 1592년 7월 6일 팔공산 부인사에서 대구 전역의 선비들과 의병 조직을 아우른 공산의진군(公山義陳軍)이 조직되었을 때, 첫 의병대장을 맡아 활동한 서사원, 그의 뒤를 이은 손처눌, 3대 의병대장 이주, 그리고 의병장 곽재겸 등이 모두 전경창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대구 의병장들은 대부분 연경서원에서 강학을 펼친 전경창, 정사철, 채응린 세 선비의 제자들이었다.

연경서원은 손처눌의 주도하에 1602년(선조 35) 중건되었다. 이때 모든 건물들을 한꺼번에 새로 짓지는 못하고 애련당만 건축하였다. 그래도 당시 53세이던 서사원은 '늘그막에 연경서원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도다!' 하고 애련당 중건의 감격을 시로 써서 남겼다.

내가 이수(달성군 이천)에서 부들 같은 돛을 달고 배를 타고 올라 와
화전(畵田, 화암 아래)에 닻줄 매고 화암정사(연경서원)로 들어 왔네
당(堂)은 애련당부터 먼저 작게 지었는데
재(齋)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아직 다 베어내지 못했네
초현문과 양정당은 간절하지만 못 지어 이름만 남아 있고
몽매한 사람들을 깨치려니 나의 평범한 자질이 부끄럽네
늘그막에 거듭 찾으니 감개가 무량한데
바라건대 장차 한가한 날 서책을 보내리라

▲ 대구 수성구 파동 무동재 앞에 세워져 있는 '계동 선생 옥산전공 유적비' ⓒ 정만진


다시 연경서원에는 1613년(광해군 5)에 사당이, 1635년(인조 13)에 향현사가 세워졌다. 그 10년 뒤인 1645년(인조 23)에는 본 강당인 인지당(仁智堂)도 건립되었다. 1744년(영조 50)에 동재와 서재까지 각각 2칸씩 갖추고, 그 이듬해에 양정헌(養正軒)과 기타 부속 건물들을 완공함으로써 마침내 창건 당시의 면모가 되살아났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맞아 훼철되었다.

1613년에 사당이 처음 세워졌을 때 이황을 모셨다. 그 후 9년 뒤인 1622년(광해군 14) 정구를 배향하였다. 손처눌의 <모당집>에는 정구가 '퇴계 선생의 적통(嫡統)으로서 선생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하였고, 또 '(1609년) 서원을 방문하여 사당의 터를 잡아주셨고, <심경(心經)>을 강의'하는 등 이황 및 연경서원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배향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706년(숙종 32)에는 정경세를 배향했다. 1607년(선조 40) 대구부사로 부임한 정경세는 1년 동안 재임하면서 대구향교와 연경서원에서 직접 강학을 하는 등 대구 유학 진흥에 공로가 많았다. 그리고 향현사(鄕賢祠)에는 그 이름답게 지역(鄕)의 선비(賢)들을 모셨다. 1635년부터 전경창, 1707년(숙종 33)부터 이숙량을 제향하기 시작했다.        

▲ 임진왜란 의병장 전계신, 임란 당시 대구 지역 여러 의병장들의 스승인 전경창 등을 기려 세워진 대구 수성구 파동 무동재의 모습. 전경창은 대구 최초의 서원 연경서원을 설립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한 선비이다. ⓒ 정만진


연경서원은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머지않아 그 실체를 보게 될 전망이다. 연경동 일대가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면서 연경서원 복원 계획이 수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연경서원 인근에 예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던 구강당(九岡堂)도 동화천 건너편으로 옮겨져 중건될 예정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 달려가 구강당 주변 연경서원 터를 보아두어야 한다. 곧 '연경서원 터'는 다시 볼 수 없는 역사의 유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경창, 전계신 등 옥산전씨 선현들을 기리는 무동재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라는 밀양아리랑을 원용하자면, 연경서원을 보듯 답사해야 마땅한 곳이 있다. 연경서원 창건 주역 중 한 사람인 전경창을 기리는 재실 무동재이다. 무동재는 대구 수성구 파동에 있다. 무동재는 '파동로2안길 19'라는 도로명 주소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인적이 드문, 대도시 대구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천연의 계곡 입구에 있다.

▲ 앞산에서 바라본 파동의 모습. 동네 건너편으로 법이산, 그리고 용두봉, 병풍산이 보인다. ⓒ 정만진

무동재는 옥산전씨 가문의 여러 선현들을 모시는 재실이다. 무동재에서 모시는 분들 중에는  전경창 외에 또 다른 임진왜란 관련 인물이 있으니 바로 전계신(全繼信, 1562∼1614)이다.

전경창의 집안 동생인 전계신은 임란 발발 당시 31세의 나이로 경상좌수영 우후(정4품)였다. 그런데 수사 박홍이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도주하는 바람에 군대가 와해되는 기막힌 처지에 놓였다. 당시 수영에는 뒷날 영천성 수복의 1등공신이 되는 권응수도 근무하고 있었다.

전계신과 권응수 등은 고향에 가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한다. 권응수는 경북 영천으로 가고, 전계신은 파동으로 돌아와 창의한다. 전란 중 많은 공을 세운 전계신은 종전 이후에도 사절단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등 조정의 신임을 받는 관리로 출중한 활동을 펼친다.

하지만 경상좌수사와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종2품)로 근무하던 중 병영에서 타계하고 만다. 1614년(광해군 8) 7월 22일, 향년 53세였다.

전계신이 이른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대구의 선비들은 크게 애통해 했다. 그의 선배인 곽재겸(1547∼1615) 의병장은 그 슬픔을 만사(輓詞, 죽은 이를 위한 글)에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歷數風雲將  이력은 풍운의 장수였고
貞忠罕有君  곧은 충성 그대만한 이 드물었네.
講和重渡海  일본과의 강화를 위하여 거듭 바다를 건너
揚武靜收氛  무용을 떨치고 나쁜 기운을 고요히 거두었네.
召募能扶國  군사를 모아 능히 나라를 지탱하게 하였고
屯耕以助軍  둔전을 경작하게 하여 군량을 도왔네.
嗚呼全節度  아! 전(全) 절도사여
位不滿酬勳  지위가 업적을 따르지 못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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