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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로 이삿짐 운반? 여기에선 가능하다

포카라 가는 버스에서 처음 만난 네팔 경찰, 아르준의 고향 마을 가는 길

등록|2016.04.01 20:15 수정|2016.04.01 20:15

▲ 산중턱에 자리 잡은 네팔 경찰, 아르준의 고향마을, 룸레이. ⓒ 송성영


두 시 정각에 출발한다던 포카라 가는 버스는 두 시 반이 다 되도록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버스 정류장 주변의 허름한 식당에서 일본인 닮은 운전기사와 인도인 닮은 차장이 나온다. 그들의 뒤를 따라 열 예닐곱 살 정도 돼 보이는 앳된 여자애 둘이 나온다. 금방 샤워를 한 듯 여자 아이들의 머리에 물기가 남아 있다.

여자 아이들의 커다란 눈망울과 마주쳤다. 갑자기 가슴이 꽉 막혀 온다. 슬픔이 몰려온다. 내가 두 여자 아이들을 슬픈 눈으로 쳐다보자 곱슬곱슬한 머리에 눈이 큰 남방계 일본인을 닮은 버스 기사가 음흉한 웃음으로 말했다.

"저 여자들 중에 하나는 내 아내의 동생입니다."
"너무 어려 보이는데......"
"당신은 네팔 여자를 좋아합니까?"

나는 여자들만이 아니라 순수한 네팔 사람들 모두를 좋아한다. 네팔 사람들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눈을 가지고 있어 모두를 좋아한다, 저 여자 아이들은 내게 딸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운전기사는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현지어로 여자애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다시 말했다.

"여자 애들이 그럽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 같다고......"
"고맙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좋은 사람입니까?"

운전기사가 시비조로 물었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말 한마디 던져놓고 버스에 올라탔다. 음흉한 눈빛의 운전기사와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었다. 번호가 적혀 있는 버스 좌석에 앉아 저 여자 아이들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좋은 사람인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어쩌면 저 여자 애들이 어떤 조직에 엮여 강제로 몸을 파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분명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침대, 식탁을 버스 지붕에 싣고 달리는 인도 버스

▲ 포카라 까지 장장 17시간을 달려야 하는 버스 지붕에 이삿짐까지 싣고 있다. ⓒ 송성영


버스는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의 승객을 태우고 3시가 넘어 출발했다. 포카라까지 장장 17시간. 지정된 좌석번호가 있는 버스였지만 시내버스나 다름없었다. 중간 중간에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내리고 거기다가 이삿짐에 해당하는 식탁이며 침대, 가재도구 등을 버스 지붕에 싣기도 한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짐이며 사람들을 가득 채우고 달리고 또 달린다. 차창 사이로 스팀기운 같은 훅한 더위가 몰려와 차라리 창문을 닫고 있는 게 나을 정도였다. 4시간 쯤 달려와 어딘가 그 지명을 알 수 없는 버스 스탠드에서 저녁을 먹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생수를 사서 다시 버스에 오르는데 곱슬머리의 운전기사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당신 나라의 친구 미국인 여자가 버스 탔습니다. 잘 해보세요."

나는 운전기사에게 미국은 한국과 친구의 나라가 아니다. 한국은 미국의 자본에 종속돼 있다 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가볍게 웃으며 차에 올랐다. 내내 버스에 외국인은 나 혼자가 전부였는데 외국인이 하나 더 늘었다.

금발의 젊은 여자는 미국인이 아니라 독일인 배낭 여행자였다. 그녀는 중간 중간 휴게소에서 나처럼 담배를 피워 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혼자서 인도 네팔 여행길에 나섰다는 그녀는 나처럼 틈틈이 사진을 찍고 뭔가를 꼼꼼히 메모하고 있었다.

외국인이 나 혼자라는 것을 알고 그녀는 언제나 내 곁으로 다가와 담배를 피웠다. 젊은 여자 혼자 낯선 사람들 틈에서 밤새 달리는 장거리 버스를 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그 큰 눈으로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현지인들 틈에서 그나마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에 의지가 됐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그 지명을 알 수 없는 낯선 도시에서 오후 세 시에 출발한 포카라행 버스는 밤새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깜박 잠들어 깨어난 새벽녘, 어느 도시에서 내 옆 좌석에 젊은 사내가 앉았다. 나처럼 간단한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그와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그가 내게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물어왔다.

자신은 네팔 경찰이라며 모바일을 열어 사진을 보여준다. 차량이 전복 되어 있거나 살해 현장의 시체 사진, 그리고 가족사진을 보여준다. 나는 그동안 인도에서 찍은 몇몇 사진을 보여줬다.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
"고향에 부모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의 고향은 포카라에서 한 시간쯤 떨어져 있는 작은 산골 마을이라고 한다. 농사를 짓고 있는 부모님을 한 달에 한 번씩 찾아뵙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네팔 산악지대에서는 어떤 농사를 짓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본래의 목적지였던 히말라야 설산 안나푸르나를 까마득히 잊고 그를 따라가고 싶었다.

"내가 당신의 고향 마을에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또 다른 목적지가 생겼다. 네팔 경찰 어르준 채트린, 그를 따라 나서기로 했다. 여행길은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져 있다. 발길 닿는대로 가다보면 그 어떤 인연을 만나게 된다. 그 인연을 무작정 따라가 보기로 했다. 바르디아 국립공원에서 나올 때 버스 차장을 믿었다가 속았던 것이 하루도 채 안됐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자애로운 보살의 미소가 담긴 물 한 잔으로 바다와 같은 자비심을 맛볼 수 있지 않았던가.

한국을 떠나온 지 70여 일 째. 여행 중에 누군가 친절한 웃음으로 다가와 건네는 물 한 잔이라도 함부로 먹지마라, 친절하게 다가오는 누군가를 무작정 따라 나서지 마라는 여행 경고장은 내게 더 이상 불필요했다. 나와 만나는 인연들에게 내일 배신을 당한다 해도 오늘, 지금 이 순간을 믿기로 했다. 내가 만약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 도로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전깃줄이 인상적인 포카라. ⓒ 송성영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도로 양옆으로 전깃줄이 수없이 얽혀있는 도시에서 버스가 잠시 멈췄다. 나는 전깃줄을 신기해하며 네팔 경찰, 어르준에게 물었다.

"여기는 어떤 도시입니까?"
"여기가 바로 포카라입니다."

이제 막 포카라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도로 주변에는 삼층 이상의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마을 앞 길거리에 작은 성소들이 들어서 있었고 거기서 마을 사람들이 아침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마을 앞 곳곳에는 식수대가 있었는데 물통을 들고 나온 여인들이 물을 받기 위해 줄지어 있었다.

네팔어로 포카라의 '포카'는 호수라는 뜻이다. 포카라는 히말라야 설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여드는 호반의 도시다. 도시의 이름대로라면 물이 풍부할 것 같은데 줄지어서 물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가뭄이 심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포카라 중심지 어딘가에서 내려 어르준이 앞장섰다. 나는 무작정 그를 따라나섰다. 거리에는 현지인들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아 보였고 게스트하우스며 레스토랑, 토산물 가게 등 온갖 상점들이 도로 양옆에 줄지어 서 있었다. 인도 다람살라의 맥그로드 간즈 같은 곳이었다. 나는 이 혼잡한 거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네팔 경찰과 찾아 들어간 한국 음식점

▲ 페와 호수 주변에 자리한 외국인들의 거리, 레이크 사이드(Lake Side) ⓒ 송성영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외국인들이 넘쳐 나는 이곳을 레이크 사이드(Lake Side)라고 부르고 있었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해 세계 각지의 배낭객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하지만 포카라에 관해 사전지식이 거의 없던 나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네팔의 숨결을 느낄 수 없는 그저 그런 외국인 관광지에 불과했다.

"여기는 네팔 같지 않네요."
"맞습니다. 여기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거리입니다."

내 의중을 파악한 아르준이 앞장서서 어딘가로 안내했다. 그를 따라간 곳에는 너른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호수 선착장에는 놀이용 배들이 여러 척 정박해 있었고 관광객들을 가득 실은 배 한 척이 막 떠나려 하고 있었다.

"여기가 포카라에서 유명한 페와 호수입니다."

▲ 페와(phewa) 호수. 포카라의 이름은 바로 이 페와 호수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날이 좋으면 여기서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 등 8천 미터 급 고봉들이 보인다. ⓒ 송성영


해발 900미터에 자리한 포카라의 지명은 바로 이 페와(phewa) 호수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아르준이 배를 탈 것인가 묻는다. 배를 타고 호수를 한 바퀴 돌 수 있거나 호수 한가운데 섬처럼 박혀 있는 힌두 사원에 갈 수 있다고 한다.

"힌두 사원은 인도에서 여러 곳을 둘러봤습니다."
"날이 좋으면 여기서 히말라야를 볼 수 있습니다."

호수 저만치 산 위로 그 유명한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 등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히말라야 고봉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안나푸르나를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제 고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 그래요!? 제가 포카라에 온 이유가 안나푸르나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안나푸르나를 만나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 왔다. 사진 몇 장을 찍고 페와 호수의 선착장을 나오는데 너른 잔디구장에서 네팔 청소년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아르준의 말에 의하면 네팔에서는 인도 사람들이 즐기는 크로켓 보다 축구가 더 인기가 많다고 한다.

▲ 페와 호수 근처에서 축구하는 네팔 청소년들. 네팔에서는 인도 사람들이 즐기는 크로켓 보다 축구가 더 인기가 많다고 한다. ⓒ 송성영


우리는 다시 레이크 사이드로 나왔다. 외국인 거리라고는 하지만 인도에서처럼 도로 한가운데로 소가 어슬렁거리며 활보하고 있다. 도로가 한 옆에는 연료로 쓰기 위해 바싹 말려 쌓아놓은 소똥도 보인다. 영어 간판뿐만 아니라 일본식당, 중국식당, 한국식당도 보이고 태극기도 보인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대충 훑어 봤음에도 한국식당이 무려 세 곳이나 눈에 띄었다.

"한국 음식 먹어봤습니까?"
"아니요."

아르준에게 한국 음식을 대접해 주고 싶어 한국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주인은 한국에서 4년 동안 동대문 시장에서 일했다는 네팔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말을 썩 잘했다. 혹여 못된 한국 사람들을 만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면 미안하다고 했더니 괜찮다며 자신은 한국 사람들이 좋다고 말한다. 두 달 가까이 한국 사람은 고사하고 한국말조차 한 마디 못하고 떠돌고 있다가 한국말을 할 줄 하는 사람과 대화하고 거기다가 한국 음식까지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네팔 경찰, 아르준은 힌두교 채식주의자였다. 요리 사진과 함께 한글과 영어로 적혀있는 메뉴판에는 고기가 들어가 있는 음식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김치찌개를 시켰고 아르준에게는 티베트와 네팔 사람들이 즐겨먹는 볶음 국수, 자오민이 떠올라 비빔국수를 권했다. 음식 값은 꽤 비쌌다. 김치찌개는 400루피가 넘었고 비빔국수는 300루피 가까이 됐다. 나는 그동안 인도에서 가장 싼 음식들을 골라 먹었는데 그 음식 값의 세배가 넘었다.

나는 모처럼만에 맛보는 김치찌개를 땀을 뻘뻘 흘려가며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는데 아르준은 삼분의 일도 채 먹지 못하고 포기했다. 비빔국수에 들어간 매운 고추장 때문이었다. 식당에서 나와 곧장 그의 고향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당신 부모님에게 드릴 선물을 샀으면 좋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부모님이 뭘 좋아 하시냐 집요하게 물었는데 그는 괜찮다면 끝까지 거부한다. 그리고는 길거리 점포에 들어가 부모님에게 드릴 것이라며 사과 몇 개와 과자 몇 봉지를 산다. 내가 돈을 지불하자 그는 미안한 얼굴로 고맙다고 인사한다.

▲ 산비탈에 들어서 있는 아르준의 고향 마을, 룸레아. ⓒ 송성영


▲ 돌담장에 앉아 있던 아르준의 고향 마을 아가씨가 환한 웃음으로 반겼다. ⓒ 송성영


버스를 기다리다가 그의 고향 친구라는 택시 기사를 반갑게 만났다. 그는 택시기사 친구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한 사람당 200루피의 택시요금을 둘이서 300루피로 갈 수 있다고 말한다. 택시는 한 시간 이상 달려 '룸레아'라는 산골 마을, 그의 고향에 도착했다.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그의 고향은 심심산골 오지는 아니었다. 히말라야 설산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고향마을은 어림잡아 40여 가구, 생각보다 제법 큰 마을이었다. 산 중턱의 마을 언덕길은 돌로 계단을 만들었고 집 담장 또한 돌로 켜켜이 쌓아 올렸다. 지붕은 대부분 함석을 올렸다.

비탈진 언덕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자 돌담장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환한 웃음으로 반긴다. 인도 사람의 얼굴을 닮은 아르준과 달리 인상이 낯설지 않다. 그 인상이 한국 시골마을의 참한 아가씨를 닮았다.

높다랗게 쌓아 올린 돌담길을 따라 아르준의 뒤를 따라가면서 문득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떠돌아다니는 끈 풀린 개가 떠올랐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낯설고 낯선 곳에서 잠시 자신의 운명을 누군가에게 떠맡기는. 내게 있어서 그 누군가는 아르준이라는 네팔 사내였다.

▲ 담장을 돌로 높다랗게 쌓아 올린 고향마을 골목길로 들어서는 네팔 경찰 아르준.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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