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우주에서 보면 티끌보다 작은 지구

[어린이책 읽기] 장성익, 홍자혜 <있다! 없다>

등록|2016.04.05 11:56 수정|2016.04.05 11:56
마음 가득 즐거운 생각을 스스로 품을 때에 즐겁구나 하고 느낍니다. 즐거움은 남이 일으켜 주거나 선물해 주지 않아요. 밥을 짓든, 빨래를 하든, 길을 걷든, 노래를 부르든, 그냥 웃든, 하늘을 보든, 밥을 먹든, 잠을 자든, 참말 스스로 즐겁게 바라보고 마주할 때에 비로소 즐거울 수 있어요.

억지로 놀라고 한들 즐겁게 놀지 못해요. 스스로 우러나오는 마음이 되어서 놀아야 비로소 즐거워요. 어른들이 하는 일에서도 이와 같아요. 억지로 시켜서 해야 하는 일보다는 스스로 나서서 하는 일에서 즐거움이 피어나고 보람이 생겨난다고 느껴요.

스스로 즐거울 수 있기에 스스로 배울 수 있다고 느끼기도 해요. 왜냐하면, 교실에 앉아야만 배우지 않고, 책을 펴야만 배우지 않기 때문이에요. 새로운 삶을 바라는 마음을 스스로 고이 품을 수 있으면, 교실에 앉지 않아도 배울 만해요. 새로운 살림을 꿈꾸는 마음을 스스로 기쁘게 헤아릴 수 있으면, 책을 펴지 않아도 배울 만할 테고요. 그래서 내가 스스로 즐거우려 하지 않으면 즐겁지도 않은데다가, 내가 스스로 배우려 하지 않으면 배우지도 못하는 하루가 어제하고 똑같이 되풀이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자,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이 먹이사슬에서 메뚜기가 멸종되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또는 뱀이 그렇게 된다면? (19쪽)

어쩌면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졌다고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모든 물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나 분자로 이루어졌으니까요. (26쪽)

▲ 겉그림 ⓒ 분홍고래

장성익 님이 글을 쓰고 홍자혜 님이 그림을 그린 <있다! 없다!>(분홍고래,2 015)를 읽으면서 즐거움과 배움이라는 대목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있다! 없다!>는 어느 한 가지를 '한쪽 눈'으로만 보지 말고 '두 눈'으로 바라보면서 생각하도록 이끄는 어린이 인문책입니다.

사회라든지 책이라든지 언론에 나오는 '한쪽 눈'을 넘어서, 사회나 책이나 언론이 안 짚거나 안 다루는 '다른 한쪽 눈'도 헤아려 보도록 이끄는 이야기꾸러미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있다! 없다!>에서 다루려 하는 '두 눈'은 '속눈'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겉눈'으로만 볼 적에는 "있다!" 하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속눈으로 함께 볼 적에는 "없다!" 하고 깨달을 수 있어요. 겉눈으로만 볼 적에는 "없다!" 하고 여길는지 모르지만, 속눈으로 다시 볼 적에는 "있다!" 하고 새삼스레 알아차릴 수 있어요.

현대 산업 문명은 무조건 많이 생산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 필연적으로 나오는 엄청난 쓰레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60쪽)

20세기 초 정도까지만 해도 우주가 이렇게나 넓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태양과 우리 지구가 속한 은하계가 우주 전부라고 알고 있었어요. (42쪽)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별은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을까요? 밤하늘에 별을 보기 어렵도록 매캐한 하늘을 등에 이고 사는 사람들(어른과 아이 모두)은 별이 있는 줄 없는 줄 얼마나 알 만할까요? 깊은 시골에 사는 사람하고 서울 한복판에서 사는 사람은 '별이 얼마나 있다'고 여길 만할까요? 또, 서울 한복판에서 사는 사람하고 숲에 깃들어 사는 사람은 '자동차가 얼마나 있다'고 여길 만할까요?

우리한테는 무엇이 있을 때에 즐거움이 함께 있을 만할까 하고 생각해 보아야지 싶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엇이 있도록 이 삶터를 가꾸고 우리 마을이나 살림터를 돌볼 적에 서로 즐겁거나 아름다울 만할까 하고 헤아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돈이 있고 없는 모습이란 무엇일까요. 집이 있고 없는 모습이란 무엇일까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군수나 시의원이나 군의원을 뽑는 자리란 무엇일까요. 해마다 봄이 되어 밭을 갈고 논을 갈아 씨앗을 심는 시골지기란 누구일까요. 우리는 이 봄을 어떠한 마음이나 몸짓이나 생각으로 맞이할 만할까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은 오늘날 한국에서 5%가 안 된다고 하는데, 이 5%로도 우리는 어디에서나 늘 먹고 마실 수 있는 삶이에요. 그러면 우리한테는 무엇이 있거나 없는 셈일까요. 앞으로 이 5%가 1%나 0%가 되어도 우리는 넉넉히 먹거나 마실 수 있는 삶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생각은 대체로 우리가 사는 지구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방금 살펴봤듯이 지구는 우주 전체 차원에서 보면 그야말로 티끌보다도 훨씬 더 작습니다. (45쪽)

생태사슬에서 파리가 사라지면 똥이 온 지구에 넘치고 맙니다. 생태사슬에서 날벌레 한 가지가 사라지면 먹이사슬이 그만 끊어집니다. 새 한 가지가 사라질 적에도 먹이사슬이 끊어지고, 숲짐승 한 가지가 사라져도 먹이사슬이 끊어져요.

얼마 앞서까지 사람들 누구나 수천 가지에 이르는 씨앗을 저마다 심어서 온갖 곡식이나 열매를 골고루 누렸다고 해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손꼽는 씨앗이나 열매 가짓수는 몇 가지 안 돼요. 이러면서 가게마다 과자나 빵 가짓수는 자꾸 늘어납니다.

우리한테는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얻으면서 무엇을 잃을까요. <있다! 없다!>를 빚은 두 어른은 어린이들한테 '우주에서 보면 티끌보다 작은 지구'라는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주려 합니다. 너무 많은 어른들이 '우주 눈길'을 잃을 뿐 아니라 '지구 눈길'조차 잃고, 지구뿐 아니라 '아시아'라든지 '한국'이라든지 '마을'이라는 눈길마저 잊는 대목을 곰곰이 짚어서 이야기합니다.

더 나아간다면, 어쩌면 우리는 '우리 집'이나 '우리 보금자리'라는 눈길까지 잃거나 잊은 채 너무 바쁜지 몰라요. 집을 손수 짓고 살림을 손수 가꾸며 아이들을 손수 가르치고 사랑하는 삶을 어느새 잊거나 잃었다고 할 만한지 모르지요.

신자유주의 세계화 경제는 '자유로운 경쟁'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문제는 자유로운 경쟁만 강조하면 힘센 쪽만 계속 이기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린 유치원생 아이와 다 큰 대학생 청년을 똑같은 출발선에 세워 놓고 '자유롭게' 달리기 경주를 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102쪽)

우주라는 테두리에서 지구를 바라보자고 하는 까닭은, '우리가 티끌'이라는 대목을 깨닫자고만 하는 이야기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주 테두리에서는 티끌일 수 있는데, 우리 몸을 가만히 헤아리면 '우리 몸을 이루는 수많은 원자와 분자'로 치자면 '우리 몸도 우주 가운데 하나'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나 '우주'이면서 '티끌'인 숨결인 셈이에요. 크면서도 작고, 작으면서도 크다고 할 만해요. 이리하여 내가 선 자리를 찬찬히 바라보고, 내가 갈 길을 가만히 꿈꾸며, 내가 지을 삶을 하나하나 이룰 때에 바야흐로 즐거움하고 기쁨을 손수 일으킬 만하다고 느껴요.

남들이 시키는 대로 가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 짓는 길을 갈 때에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어른도 어린이도 모두 '있다 없다'라는 두 눈으로, 그러니까 겉눈뿐 아니라 속눈으로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길을 갈 때에 기쁘게 웃을 만하리라 생각해요.

고요히 눈을 감고서 속으로 마주할 수 있기를, 가만히 속눈을 뜨고서 마음으로 서로 아낄 수 있기를, 느긋하게 속마음을 열고서 서로 사랑할 수 있기를 비는 마음으로 <있다! 없다!>라는 책을 되새겨 봅니다.
덧붙이는 글 <있다! 없다!>(장성익 글 / 홍자혜 그림 / 분홍고래 펴냄 / 2015.8.19. / 12000원)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yes24.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