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자가 바란 딱 한 가지, 이거였어?
[한국 소설이 건네는 이야기 19] 김중혁의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출판계에 거센 '힐링' 바람이 불어 닥쳤을 때, 저도 몇 권 읽어봤습니다. 대표적인 힐링 도서들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한 장, 두 장 페이지를 넘겼죠. 하지만 끝까지 읽히지가 않았습니다. 백만 권 이상이 팔렸다는 어느 책은 3분의 1도 못 읽고 덮고 말았죠.
좋은 내용임은 분명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보면 좋은 그런 내용들. 아니, 두 번, 세 번 들어도 좋을 내용들. 태어나 우린 줄곧 경쟁해야 했고, 오로지 성장만을 위해 달려야 했잖아요. 그런 우리에게 삶에 대해, 사랑에 대해, 관계에 대해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준 사람들은 거의 없었죠. 우리 주위 사람들이 해주지 못한 걸, 이 책들이 대신해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 좋은 책을 읽는 전 왜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을까요.
책을 읽기 전부터 '위로의 한계'를 생각했기 때문일 거예요. 위로만으로 과연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어쩌면 가장 쉬운 게 위로 아닐까. '괜찮아, 잘 될 거야'라는 말만큼 하기 쉬우면서 또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을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도 좋지만, 그보단 위로가 덜 필요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 애써야 하는 것 아닐까.
산더미처럼 쌓여만 가는, 너도 나도 입으로 건네기만 하는 위로의 말들. 그리고 그런 위로의 말들이 너무나 필요해 보이는 대한민국의 지친 모든 사람들. 하지만 그런 위로의 말들이 뚜렷한 결과를 맺지 못한 채 공기 중으로 야속하게 흩어지는 모습이 제 눈에는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전 힐링도, 위로도 결국은 부질없는 거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저는 이때, 더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로만을 이야기하는 책들은 분명 어느 정도는 무책임한 것이 맞았지만, 정말 누군가는 그 위로가 너무도 필요했을 거라는 걸. 위로만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위로의 한 마디 때문에 누군가는 또 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걸.
위로가 필요한 규호
김중혁의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을 읽고는 또 이렇게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주는 사람이 아닌 위로를 받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되어야 한다는 걸. 그리고 전 이 세상엔 누군가가 가짜 팔로라도 안아주길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 책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소설집입니다. 총 7개의 단편이 실려 있구요. 그중 하나가 표제작인 '가짜 팔로 하는 포옹'입니다.
이 소설엔 규호가 나옵니다. 규호는 술을 많이 마십니다. 어느 날, 규호는 정윤을 불러냅니다. 정윤 앞에서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요. 정윤이 듣기에 별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냥,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어느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거든요. 그의 이름은 피죤이라고 해요.
피죤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간중간, 정윤은 규호더러 술을 그만 먹으라 경고합니다. 규호는 알았다고 말은 하지만 계속해서 술을 마십니다. 맥주에 소주를 부어가며, 쉴 새 없이 마십니다. 정윤은 억지로 규호를 참아줍니다.
규호는 그런 정윤의 눈치를 보며 계속 피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느 날 피죤은 술집에서 싸움에 휘말려 경찰서로 끌려가야 했답니다. 거기서 피죤은 이렇게 말을 했대요.
'경찰관님, 고통 같은 것은 말입니다. 절대 얼굴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십니까? 그게 다 어디 붙는지 아십니까? 알코올에 달라붙어서 말입니다. 살에도 붙고 조각조각 나서 뇌에도 붙고, 또 내보내려고 해도 손톱 발톱 그렇게 안 보이는 데 숨어 살면서요, 조용히 있다가 중요한 순간이 되면요, 제 뒤통수를 후려치고요. 그러는 겁니다.' -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중에서
어쩌면 규호는 정윤에게 자기의 고통도 이렇듯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보이지 않을 뿐 자신의 고통도 살에, 뇌에, 손톱에, 발톱에 침투해 있다구요. 그러다 그 고통이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구요. 하지만 규호는 그런 말은 하지 않고, 술만 마시죠. 피죤만 계속 들먹이면서요. 피죤은 또 이렇게도 말했다고 해요.
'맺힌다는 게 뭔지 아십니까? 자, 여기 술잔을 잡아봅니다. (…) 여기에 왜 맺히는지 압니까? 이것은 온도 차이 때문입니다. 나는 차가운데 바깥은 차갑지 않아서, 나는 아픈데 바깥은 하나도 아프질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맺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요, 술을 마십니다.' -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중에서
규호는 또 정윤에게 자기도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행복한 것 같은데, 나만 불행한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래서 술을 마신다고요. 하지만 규호는 여전히 자신에 대해선 아무 말 없이, 그저 계속 술만 마십니다. 그런 그를 보며 정윤은 말하죠.
"넌 술만 끊으면 완전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중에서
가짜여도 좋은 위로
술잔은 늘어가고, 규호의 혀는 꼬여가고, 정윤은 점점 짜증이 나고, 결국 정윤은 일어납니다. 한 번만 안아주고 가라는 규호의 말에 정윤은 두말없이 뒤돌아 나가버리죠. 그리고 전 규호의 안아달라는 이 말을 듣고서야 규호가 정윤에게 원했던 건 오직 이것 하나뿐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됐습니다. 규호는 정윤에게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어요. 그저, 진심이 아니어도 좋으니, 한 번만 안아달라고.
"그런데 그거 알아?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대." -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중에서
이 책을 읽으며 전 제가 정윤과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규호의 행동보단 정윤의 행동이 이해됐습니다. 상대방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이렇게 나약하게 구는 그 사람이 짜증도 납니다.
안아주는 건 위로해주는 것이고, 위로 한번 해준다고 이 사람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정윤은 규호를 위로해주지 않기로 합니다. 대신 그가 강하게 일어서길 바랍니다. 나약함도 버리고, 술도 버리고, 다시 우뚝 서길 바랍니다.
하지만 이건 저 같은 사람이나, 정윤 같은 사람의 논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위로를 주는 사람의 논리일 뿐인 거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 순간 규호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위로였습니다. 규호는 단지, 딱 한번 안기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위로가 모든 걸 해결해 줄리는 없지만, 위로 없인 아무것도 해결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선 먼저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 오늘 하루를 버터야 하니까요.
좋은 내용임은 분명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보면 좋은 그런 내용들. 아니, 두 번, 세 번 들어도 좋을 내용들. 태어나 우린 줄곧 경쟁해야 했고, 오로지 성장만을 위해 달려야 했잖아요. 그런 우리에게 삶에 대해, 사랑에 대해, 관계에 대해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준 사람들은 거의 없었죠. 우리 주위 사람들이 해주지 못한 걸, 이 책들이 대신해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 좋은 책을 읽는 전 왜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을까요.
책을 읽기 전부터 '위로의 한계'를 생각했기 때문일 거예요. 위로만으로 과연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어쩌면 가장 쉬운 게 위로 아닐까. '괜찮아, 잘 될 거야'라는 말만큼 하기 쉬우면서 또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을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도 좋지만, 그보단 위로가 덜 필요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 애써야 하는 것 아닐까.
산더미처럼 쌓여만 가는, 너도 나도 입으로 건네기만 하는 위로의 말들. 그리고 그런 위로의 말들이 너무나 필요해 보이는 대한민국의 지친 모든 사람들. 하지만 그런 위로의 말들이 뚜렷한 결과를 맺지 못한 채 공기 중으로 야속하게 흩어지는 모습이 제 눈에는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전 힐링도, 위로도 결국은 부질없는 거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저는 이때, 더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로만을 이야기하는 책들은 분명 어느 정도는 무책임한 것이 맞았지만, 정말 누군가는 그 위로가 너무도 필요했을 거라는 걸. 위로만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위로의 한 마디 때문에 누군가는 또 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걸.
위로가 필요한 규호
▲ 책 표지 ⓒ 문학동네
이 책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소설집입니다. 총 7개의 단편이 실려 있구요. 그중 하나가 표제작인 '가짜 팔로 하는 포옹'입니다.
이 소설엔 규호가 나옵니다. 규호는 술을 많이 마십니다. 어느 날, 규호는 정윤을 불러냅니다. 정윤 앞에서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요. 정윤이 듣기에 별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냥,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어느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거든요. 그의 이름은 피죤이라고 해요.
피죤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간중간, 정윤은 규호더러 술을 그만 먹으라 경고합니다. 규호는 알았다고 말은 하지만 계속해서 술을 마십니다. 맥주에 소주를 부어가며, 쉴 새 없이 마십니다. 정윤은 억지로 규호를 참아줍니다.
규호는 그런 정윤의 눈치를 보며 계속 피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느 날 피죤은 술집에서 싸움에 휘말려 경찰서로 끌려가야 했답니다. 거기서 피죤은 이렇게 말을 했대요.
'경찰관님, 고통 같은 것은 말입니다. 절대 얼굴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십니까? 그게 다 어디 붙는지 아십니까? 알코올에 달라붙어서 말입니다. 살에도 붙고 조각조각 나서 뇌에도 붙고, 또 내보내려고 해도 손톱 발톱 그렇게 안 보이는 데 숨어 살면서요, 조용히 있다가 중요한 순간이 되면요, 제 뒤통수를 후려치고요. 그러는 겁니다.' -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중에서
어쩌면 규호는 정윤에게 자기의 고통도 이렇듯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보이지 않을 뿐 자신의 고통도 살에, 뇌에, 손톱에, 발톱에 침투해 있다구요. 그러다 그 고통이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구요. 하지만 규호는 그런 말은 하지 않고, 술만 마시죠. 피죤만 계속 들먹이면서요. 피죤은 또 이렇게도 말했다고 해요.
'맺힌다는 게 뭔지 아십니까? 자, 여기 술잔을 잡아봅니다. (…) 여기에 왜 맺히는지 압니까? 이것은 온도 차이 때문입니다. 나는 차가운데 바깥은 차갑지 않아서, 나는 아픈데 바깥은 하나도 아프질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맺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요, 술을 마십니다.' -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중에서
규호는 또 정윤에게 자기도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행복한 것 같은데, 나만 불행한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래서 술을 마신다고요. 하지만 규호는 여전히 자신에 대해선 아무 말 없이, 그저 계속 술만 마십니다. 그런 그를 보며 정윤은 말하죠.
"넌 술만 끊으면 완전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중에서
가짜여도 좋은 위로
술잔은 늘어가고, 규호의 혀는 꼬여가고, 정윤은 점점 짜증이 나고, 결국 정윤은 일어납니다. 한 번만 안아주고 가라는 규호의 말에 정윤은 두말없이 뒤돌아 나가버리죠. 그리고 전 규호의 안아달라는 이 말을 듣고서야 규호가 정윤에게 원했던 건 오직 이것 하나뿐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됐습니다. 규호는 정윤에게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어요. 그저, 진심이 아니어도 좋으니, 한 번만 안아달라고.
"그런데 그거 알아?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대." -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중에서
이 책을 읽으며 전 제가 정윤과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규호의 행동보단 정윤의 행동이 이해됐습니다. 상대방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이렇게 나약하게 구는 그 사람이 짜증도 납니다.
안아주는 건 위로해주는 것이고, 위로 한번 해준다고 이 사람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정윤은 규호를 위로해주지 않기로 합니다. 대신 그가 강하게 일어서길 바랍니다. 나약함도 버리고, 술도 버리고, 다시 우뚝 서길 바랍니다.
하지만 이건 저 같은 사람이나, 정윤 같은 사람의 논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위로를 주는 사람의 논리일 뿐인 거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 순간 규호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위로였습니다. 규호는 단지, 딱 한번 안기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위로가 모든 걸 해결해 줄리는 없지만, 위로 없인 아무것도 해결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선 먼저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 오늘 하루를 버터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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