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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과 조롱의 중심에 섰던 '인상주의의 아버지'

[인문학자와 함께하는 말랑말랑 파리여행 14] 에두아르 마네

등록|2016.04.12 11:19 수정|2016.04.13 14:22
사람들은 그를 '멋진 수염, 윤기 나는 금발 머리칼, 유행에 민감한 세련된 옷차림, 자유롭고 쾌활한 성격에 신사다운 매너, 날카로운 언변과 카리스마, 품위 있는 거리의 방랑자' 등으로 기억한다. 사교계에서의 유명세는 물론이고 카페나 화랑을 중심으로 한 문화 예술 모임에서도 그는 늘 중심에 있었다. 그것이 인기였든, 조롱이었든.

"나는 남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것을 그린다"며 평생 고집을 피웠던,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이야기이다. 실제로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는 앙리 팡탱 라투르의 그림 <들라크루아에게 경의를 표하다>(1864)와 <바티뇰의 스튜디오>(1870)에 묘사된 마네의 모습을 보면 당대 문학과 예술계의 진보적 모임에서 그가 차지한 리더로서의 위치와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들라크루아에게 경의를 표하다>에서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샤를 보들레르 옆에 서서 왼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있는 모습이나, <바티뇰의 스튜디오>에서 르누아르, 에밀 졸라, 바지유 등에 둘러 싸여 한 손엔 파레트를, 한 손엔 붓을 들고 이젤 앞에 앉아 작업하고 있는 모습에는 자기 확신과 열정이 가득한 예술가의 신념이 엿보인다.     

▲ <바티뇰의 스튜디오>, 앙리 팡탱 라투르, 1870년, 오르세 미술관. 가운데 작업 중인 화가 마네, 그를 둘러싼 르누아르, 에밀 졸라, 바지유 등이 보인다. ⓒ 김윤주


에두아르 마네는 1832년, 법률가이자 고위직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오귀스트 마네와 외교관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의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아들이 당연히 자신의 뒤를 이어 법관이 되리라 믿었던 아버지는 화가를 꿈꾸는 장남에게 차선책으로 해군 장교를 권한다. 학구적이지도 않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던 마네는 그나마 입학시험을 두 차례나 떨어지고 하는 수 없이 6개월간의 견습 항해를 떠나게 된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향한 이 항해는 아버지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열여섯 살의 마네에게 화가의 꿈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고 만다. 선원으로서 경험해야 했던 '바다와 하늘뿐인 늘 똑같은 따분한' 생활,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몰입한 드로잉과 수채화 작업,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이국적인 풍광은 이후 그의 화가로서의 삶에 어떻게든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풍경화를 잘 그리지 않은 그가 유독 이 시기 기억을 바탕으로 한 풍경화들을 남긴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마네가 살았던 시기는 파리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이다. 그가 태어난 1832년은 빅토르 위고가 대작 <레미제라블>의 배경으로 삼은, 실패로 끝나버리는 6월 학생봉기가 있었던 바로 그해이다. 1848년 2월 혁명과 1851년 쿠데타, 1852년 제2제정 선포와 나폴레옹 3세의 황제 즉위, 근대적 자본주의와 식민지 팽창, 1870년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 등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나폴레옹 3세 치하의 제2제정기 파리는 오스망의 대대적인 도시개발 사업으로 새로운 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중세 도시의 흔적을 깨끗이 들어내고 새롭게 닦은 세련되고 현대적인 도시, 그 도시의 새로운 주인인 근대 부르주아 계층의 교양 있는 문화생활, 그들의 교양 속에 숨겨진 위선과 가식, 도심에서 밀려난 피곤한 서민의 고독하고 남루한 일상 따위를 화폭에 그려낸 최초의 화가. 그가 바로 마네이다.

마네가 평생 들어야 했던 비난은 그림의 소재가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라는 점, 그림 속에 묘사된 장면이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직접적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다 만 것 마냥, 혹은 덜 배운 어린애가 제대로 흉내를 못 낸 것 마냥 색감과 기교가 어설프다는 것이었다.

당대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역사 속 인물이나 신화 속 장면 등을 통해 감동과 교훈을 주어야 하는 것이 회화의 마땅한 책무인데 그것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할 노릇이었다. 정성을 다해 그리고 칠하고 덧입혀 마무리를 해도 모자랄 것을 그리다 만 것 마냥, 칠하다 만 것 마냥 표면도 거칠고 선도 무디고 색감의 배치와 대조도 영 낯설기만 한 그림들뿐이었으니 딱할 노릇이었다.

▲ <풀밭 위의 점심>, 에두아르 마네, 1863, 오르세 미술관. ⓒ 김윤주


도시의 어둑한 곳에서 술에 취한 허름한 남자와 널브러진 술병을 담아낸 데뷔작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1859), 숲속에 소풍 나온 잘 차려 입은 신사들 사이에 홀로 벌거벗은 여인을 앉혀 놓은 <풀밭 위의 점심>(1863), 침대 위에 삐딱하게 누워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관람객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는 당돌한 매춘부 <올랭피아>(1865)까지, 이건 교양 있는 중산층 시민의 새로 잘 지어진 아파트의 실내에 걸어두기엔 영 불편한 그림들 투성이였다.

그도 아니면, 초등학생이 타로 카드를 보고 베껴 그린 것 같은 수준의 원색 가득한 <피리 부는 소년(1866)>이나, 심지어 아스파라거스 한 다발로 떡하니 화면을 한가득 채워 버린, 주제도 없어 보이고 색감도 기교도 어설픈, 무성의하기 이를데 없는 그런 그림들뿐이었으니 그의 그림이 환영받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대 심사위원이나 관람객들 눈에는 마네의 끊임없는 살롱전 출품이 오히려 어이없어 보였을지 모른다.

51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스무 차례나 출품을 했으니 그의 살롱전 집착은 가히 놀라울 지경이다. 단 세 번 정도 호평을 들었을 뿐 대부분은 비난과 조롱의 중심에 있어야 했으니 상처도 컸을 터이다. 마침내 49세이던 1881년 2등상을 수상하며 평생 살롱전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2년 후 세상을 떠나고 만다. 

▲ <피리 부는 소년>, 에두아르 마네, 1866, 오르세 미술관. ⓒ 김윤주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고집스런 예술가가 고독하고 쓸쓸한 삶을 마감하는 것과는 달리 그의 인생은 줄곧 외롭지는 않았다. 파격적인 누드를 비롯해 그의 여러 그림에 등장하는 모델 빅토린 뫼랑이나, 제자이자 모델이자 연인이었으며 나중엔 동생의 아내가 된 베르트 모리조는 그에게 모델 이상의 동지였다.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고통스런 최후를 맞아야 했던 병상의 그에게 매일 꽃을 보내 위로한 메리 로랑은 그가 죽은 후에도 라일락꽃을 들고 매년 무덤을 찾았다 한다.

그에게 영향을 받아 새로운 화풍을 선도한 클로드 모네와 같은 젊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진취적인 예술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열한 살이나 많은 시인 보들레르나 말라르메, 에밀 졸라 등 문학가들은 그의 작업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글로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어릴 적부터 학창시절을 함께한 친구였으며 나중에 문화부 장관에 오르는 앙토냉 프루스트는 헌신적인 우정을 보여주며 그의 장례식까지 맡아 치른 평생의 친구였다.

정작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에는 단 한 차례도 그림을 내 건 적이 없으며 평생토록 공식적인 살롱전 입상만을 꿈꾸었던 그가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것은, 당대로선 혁명에 가까웠을 파격적인 표현과 기법, 작품에 투영된 특유의 반항적인 주제와 메시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쉬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을 창작해 낸 그 지독한 고집 때문일 것이다.

거절은 언제나 유쾌하지 않다. 그 불쾌함은 익숙해지기도, 가벼워지기도 쉽지 않은 감정이다. 언제가 되었든 누구에게든 거절은 분노와 좌절을 유발하기 쉽다. 끊임없는 낙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도 끝까지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표현하고, 기어이 그것으로 인정받으려 했던 화가 마네.

오르세 미술관을 나오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마네는 자신이 성공한 예술가로 불리길 원했을까, 자유로운 영혼의 화가로 불리길 원했을까, 아니면 미술사의 혁명가로 기억되길 원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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