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같은 핸드폰도 찬밥 취급, 참 이상한 봄소풍
[아이들은 나의 스승 66] '세월호의 도시' 안산으로 봄소풍 떠난 광주의 고등학생들
남녘은 이미 꽃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았는데, 안산은 이제야 벚꽃이 솜사탕 마냥 뭉게뭉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 세 시간 동안 졸던 아이들도 마법처럼 잠이 깼다. 아이들 눈엔 '졌다 다시 피어난' 벚꽃이 신기한 듯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멀리서 온 우리를 환영하듯 길가에 마중 나온 벚꽃은 유난히 화사했다.
"선생님, 노란 리본은 온데간데없고 빨갛고 파란 선거 현수막만 가득한데요."
떠나기 전 아이들에게 고속도로를 나와 길가에 물결치는 노란 리본이 보이거든 안산에 닿은 줄 알라고 말해주었는데 흰소리가 되고 말았다. 노란 리본이 달려있던 자리는 어김없이 선거 현수막 차지가 됐다. 공교롭게도 세월호 참사 2주기 직전에 치러지는 선거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은 물론 흐드러진 벚꽃조차 가리고 있었다.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한 봄소풍, 지금 출발합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하루 앞둔 지난 12일 봄 소풍 날, 광주에 사는 200여 명의 고등학생이 천 리 길 마다않고 안산 정부합동분향소를 찾았다. '투표권 없는' 아이들에겐 선거보다 세월호 참사 2주기가 더 각별할 수밖에 없다. 학급 담임교사는 물론 여러 교사들도 아이들과 뜻을 함께 했다. 안산엔 처음이라는 그들은 하나같이 마음 한구석이 늘 '빚진'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선거판은 분향소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봄꽃 만개한 공원의 넓은 주차장은 따스한 봄볕만 없다면 을씨년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황량했다. 내심 대형버스 여러 대의 주차 공간을 걱정했다는 기사조차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찾는 사람이 없다"며 안타까워 할 정도였다. 먼발치로 막 분향을 하고 나오는 수녀님들과 외국인들 몇 명이 보일 뿐이었다.
유가족들이 미리 나와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연신 "고맙다"며 울먹였고, 우리는 그들에게 "미안하다"며 인사를 대신했다. 아이들이 줄지어 분향소에 들어가는 동안 유가족들은 입구에서 서성일 뿐 함께 들어가지 못했다. 두 해나 지났지만 해맑게 웃고 있는 자녀의 영정을 보질 못하겠다는 거다. 다시 한 번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인사가 오갈 수밖에 없었다.
살아있다면 대학생이 됐을 형과 누나들의 영정 앞을 아이들은 건성으로 지나치지 못했다. 일일이 얼굴을 마주하고, 탁자 앞에 놓여있는 물건들의 의미와 사연들을 하나하나 읽어갔다. 그래선지 200여 명이 동선을 따라 일렬로 분향하고 나오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이따금 울컥해 훌쩍이는 아이도 있었고, 분향소 밖에서 기다리던 유가족들의 눈시울도 함께 붉어졌다.
바로 그때,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춰 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분향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분향소를 가득 메운 고등학생들의 추모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숙연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분주히 움직였다. 사실 분향소 안에서는 영상과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유가족들이 황급히 달려와 카메라 앞을 막아섰고, 그들은 이내 사과하며 순순히 물러났다.
안산으로의 봄 소풍을 결정하기 전 가장 걱정했던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것조차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버젓이 왜곡시키는 '기레기' 언론들이 득시글거리는 현실에서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조차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에게 어떤 꼬투리도 잡혀서는 안 된다며 각별히 신경을 썼다.
유가족들에게도 사전 양해를 구했고, 자신들도 익히 겪어온 바라면서 공감했다. 사실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에 노력하고, 영원히 기억하려는 건 그 자체로 교육의 본령이자 교사의 소명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보수 언론들에 의해 조장된 어처구니없는 '편견'에 주눅이 든 채, 되레 '오해'를 걱정하며 스스로 몸을 사리는 모습이 교사로서 솔직히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웠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에 아무런 대가도 없이 헌신한 사람들이 느닷없이 '종북 세력'으로 낙인찍히고, 심지어 서울 은평구에서 출마한 여당 후보는 '세월호 점령군' 운운하며 그들을 능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꼴이라고나 할까. 국가의 당연한 책무인 진실 규명조차 유가족들이 온갖 손가락질을 견뎌 가며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하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어 분향소 뒤편 경기도 미술관 강당에서 한 시간 동안 가진 유가족들과의 면담은 분향할 때보다 아이들을 더욱더 숙연하게 만들었다. 점심 직후의 나른함이나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아이들의 눈과 귀는 단상에 선 유가족들을 향했다. 웅성거리거나 졸기는커녕 손에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하나도 그 순간만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조차 유가족들은 "고맙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심'이 담긴 말일수록 어눌하다 했던가. 비록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말은 눈물 그렁거리는 눈빛에 실려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잊지 말아달라 거나 진상규명에 나서달라는 등의 '예상했던'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대신 또래의 아이들 앞에서 떠나보낸 자녀와의 일상의 추억을 덤덤하게 들려줄 뿐이었다.
그게 외려 더 가슴 아렸던 모양이다. 마치 옆집 친구의 엄마로부터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익숙한 내용이었기에 더욱 슬펐다고 했다. 다른 자리였대도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유가족들은 같은 또래인 아이들 앞에서 자녀와의 추억을 떠올린 것이고, 그 순간 아이들은 기꺼이 그들의 '자녀'가 되어 함께 슬픔을 나누었다. 몇몇 아이들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 엄마가 하는 잔소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내용인데도, 귀찮다기보다 슬프고 고맙다는 느낌이 들어 순간 울컥했어요."
"유가족 한 분이 떠나보낸 자식과 이름이 같다면서 절 안아주시는데, 그땐 마치 그 분의 아들이 된 느낌이었어요."
곁에 서있던 교사들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거렸다. 유가족들은 남들 앞에서 웃을 수도 없고, 남은 가족들과 그 흔한 외식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다. "생떼 같은 자식 먼저 보내놓고도 웃음이 나오느냐"거나 "자식 죽고 받은 돈으로 밥이 넘어가느냐"는 비아냥거림 앞에서 이젠 그러려니 한단다. 우리 사회의 이런 잔인함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걸까.
아이들은 유가족들에게 건넬 '선물'을 따로 준비했다. 세월호 참사를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증표로, 전날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빌어 교사들과 함께 노란 종이학과 종이배를 접었다. 공부하고 숙제할 시간 빼앗겼다고 불평하기는커녕 외려 더 많은 아이들이 함께 하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작년 교정에 각자 다짐을 적은 노란 리본을 매달고, 올해 다시 종이학과 종이배를 접은 우리 아이들에게 세월호는 '현재진행형'이다.
'현재진행형' 세월호, 깨달은 게 아무것도 없다
분향소를 나서 광주로 돌아가는 길, 조용하던 거리가 시끄러워졌다. 차량을 통한 막바지 선거 유세가 한창이었다. 만개한 벚꽃 잎마저 떨어질 만큼 요란한 소리로 하나같이 지역 경제를 살리겠다며 부르댔다. 그들의 처절한 외침은 듣는 이 거의 없는 길바닥 위에 튕겨져 허공에 흩어졌다.
놀랍게도, 쉼 없이 쏟아지는 그들의 외침 속에 '세월호'는 없었다. '세월호의 도시' 안산에서조차 지역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에 앞자리를 내준 채,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세월호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듯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4.13총선 결과 전국적인 새누리당의 참패 소식에도 세월호 피해가 가장 많았던 안산 단원 지역은 새누리당 후보가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난 2년 간 아무것도 깨달은 게 없는 셈이다. '돈보다 생명'이라는 게 세월호가 우리에게 던져준 가장 중요한 교훈 아니었던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세월호의 도시' 이곳 안산으로부터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선생님, 노란 리본은 온데간데없고 빨갛고 파란 선거 현수막만 가득한데요."
떠나기 전 아이들에게 고속도로를 나와 길가에 물결치는 노란 리본이 보이거든 안산에 닿은 줄 알라고 말해주었는데 흰소리가 되고 말았다. 노란 리본이 달려있던 자리는 어김없이 선거 현수막 차지가 됐다. 공교롭게도 세월호 참사 2주기 직전에 치러지는 선거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은 물론 흐드러진 벚꽃조차 가리고 있었다.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한 봄소풍, 지금 출발합니다
▲ 안산 가는 버스 안에서다큐멘터리 영화 <나쁜 나라>를 함께 시청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느라 졸릴 법도 하건만, 조는 아이 한 명 없었다. ⓒ 서부원
국회의원 선거를 하루 앞둔 지난 12일 봄 소풍 날, 광주에 사는 200여 명의 고등학생이 천 리 길 마다않고 안산 정부합동분향소를 찾았다. '투표권 없는' 아이들에겐 선거보다 세월호 참사 2주기가 더 각별할 수밖에 없다. 학급 담임교사는 물론 여러 교사들도 아이들과 뜻을 함께 했다. 안산엔 처음이라는 그들은 하나같이 마음 한구석이 늘 '빚진'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선거판은 분향소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봄꽃 만개한 공원의 넓은 주차장은 따스한 봄볕만 없다면 을씨년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황량했다. 내심 대형버스 여러 대의 주차 공간을 걱정했다는 기사조차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찾는 사람이 없다"며 안타까워 할 정도였다. 먼발치로 막 분향을 하고 나오는 수녀님들과 외국인들 몇 명이 보일 뿐이었다.
유가족들이 미리 나와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연신 "고맙다"며 울먹였고, 우리는 그들에게 "미안하다"며 인사를 대신했다. 아이들이 줄지어 분향소에 들어가는 동안 유가족들은 입구에서 서성일 뿐 함께 들어가지 못했다. 두 해나 지났지만 해맑게 웃고 있는 자녀의 영정을 보질 못하겠다는 거다. 다시 한 번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인사가 오갈 수밖에 없었다.
▲ 분향 후 강당으로 향하는 길교복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에 유가족들은 연신 떠나보낸 자식들 같다며 눈이 붉어졌다. ⓒ 서부원
살아있다면 대학생이 됐을 형과 누나들의 영정 앞을 아이들은 건성으로 지나치지 못했다. 일일이 얼굴을 마주하고, 탁자 앞에 놓여있는 물건들의 의미와 사연들을 하나하나 읽어갔다. 그래선지 200여 명이 동선을 따라 일렬로 분향하고 나오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이따금 울컥해 훌쩍이는 아이도 있었고, 분향소 밖에서 기다리던 유가족들의 눈시울도 함께 붉어졌다.
바로 그때,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춰 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분향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분향소를 가득 메운 고등학생들의 추모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숙연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분주히 움직였다. 사실 분향소 안에서는 영상과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유가족들이 황급히 달려와 카메라 앞을 막아섰고, 그들은 이내 사과하며 순순히 물러났다.
안산으로의 봄 소풍을 결정하기 전 가장 걱정했던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것조차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버젓이 왜곡시키는 '기레기' 언론들이 득시글거리는 현실에서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조차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에게 어떤 꼬투리도 잡혀서는 안 된다며 각별히 신경을 썼다.
유가족들에게도 사전 양해를 구했고, 자신들도 익히 겪어온 바라면서 공감했다. 사실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에 노력하고, 영원히 기억하려는 건 그 자체로 교육의 본령이자 교사의 소명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보수 언론들에 의해 조장된 어처구니없는 '편견'에 주눅이 든 채, 되레 '오해'를 걱정하며 스스로 몸을 사리는 모습이 교사로서 솔직히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웠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에 아무런 대가도 없이 헌신한 사람들이 느닷없이 '종북 세력'으로 낙인찍히고, 심지어 서울 은평구에서 출마한 여당 후보는 '세월호 점령군' 운운하며 그들을 능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꼴이라고나 할까. 국가의 당연한 책무인 진실 규명조차 유가족들이 온갖 손가락질을 견뎌 가며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하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 유가족들께 보내는 학생의 편지아이들 중 한 명이 유가족들 앞에서 천릿길 안산으로 봄 소풍을 온 이유를 한 편의 시에 담아 낭송하고 있다. ⓒ 서부원
이어 분향소 뒤편 경기도 미술관 강당에서 한 시간 동안 가진 유가족들과의 면담은 분향할 때보다 아이들을 더욱더 숙연하게 만들었다. 점심 직후의 나른함이나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아이들의 눈과 귀는 단상에 선 유가족들을 향했다. 웅성거리거나 졸기는커녕 손에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하나도 그 순간만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조차 유가족들은 "고맙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심'이 담긴 말일수록 어눌하다 했던가. 비록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말은 눈물 그렁거리는 눈빛에 실려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잊지 말아달라 거나 진상규명에 나서달라는 등의 '예상했던'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대신 또래의 아이들 앞에서 떠나보낸 자녀와의 일상의 추억을 덤덤하게 들려줄 뿐이었다.
그게 외려 더 가슴 아렸던 모양이다. 마치 옆집 친구의 엄마로부터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익숙한 내용이었기에 더욱 슬펐다고 했다. 다른 자리였대도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유가족들은 같은 또래인 아이들 앞에서 자녀와의 추억을 떠올린 것이고, 그 순간 아이들은 기꺼이 그들의 '자녀'가 되어 함께 슬픔을 나누었다. 몇몇 아이들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 엄마가 하는 잔소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내용인데도, 귀찮다기보다 슬프고 고맙다는 느낌이 들어 순간 울컥했어요."
"유가족 한 분이 떠나보낸 자식과 이름이 같다면서 절 안아주시는데, 그땐 마치 그 분의 아들이 된 느낌이었어요."
▲ 유가족들께 건네는 '선물'전날 야간자율학습 시간 때 접은 노란 종이학과 종이배를 투명함에 담아 건넸다. 세월호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증표다. ⓒ 서부원
곁에 서있던 교사들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거렸다. 유가족들은 남들 앞에서 웃을 수도 없고, 남은 가족들과 그 흔한 외식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다. "생떼 같은 자식 먼저 보내놓고도 웃음이 나오느냐"거나 "자식 죽고 받은 돈으로 밥이 넘어가느냐"는 비아냥거림 앞에서 이젠 그러려니 한단다. 우리 사회의 이런 잔인함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걸까.
아이들은 유가족들에게 건넬 '선물'을 따로 준비했다. 세월호 참사를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증표로, 전날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빌어 교사들과 함께 노란 종이학과 종이배를 접었다. 공부하고 숙제할 시간 빼앗겼다고 불평하기는커녕 외려 더 많은 아이들이 함께 하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작년 교정에 각자 다짐을 적은 노란 리본을 매달고, 올해 다시 종이학과 종이배를 접은 우리 아이들에게 세월호는 '현재진행형'이다.
'현재진행형' 세월호, 깨달은 게 아무것도 없다
분향소를 나서 광주로 돌아가는 길, 조용하던 거리가 시끄러워졌다. 차량을 통한 막바지 선거 유세가 한창이었다. 만개한 벚꽃 잎마저 떨어질 만큼 요란한 소리로 하나같이 지역 경제를 살리겠다며 부르댔다. 그들의 처절한 외침은 듣는 이 거의 없는 길바닥 위에 튕겨져 허공에 흩어졌다.
놀랍게도, 쉼 없이 쏟아지는 그들의 외침 속에 '세월호'는 없었다. '세월호의 도시' 안산에서조차 지역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에 앞자리를 내준 채,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세월호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듯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4.13총선 결과 전국적인 새누리당의 참패 소식에도 세월호 피해가 가장 많았던 안산 단원 지역은 새누리당 후보가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난 2년 간 아무것도 깨달은 게 없는 셈이다. '돈보다 생명'이라는 게 세월호가 우리에게 던져준 가장 중요한 교훈 아니었던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세월호의 도시' 이곳 안산으로부터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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