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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기사가 된 대학강사

등록|2016.04.22 12:15 수정|2016.04.22 12:15
대학 강사 처지가 어려운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한 대학 강사가 버스기사가 되었다는 얘길 들었다. 학계를 포기했다기 보다는 쉬는 날 하루에 강좌를 몰아 수업을 한다 하니, 이른바 투 잡을 뛰는 셈이다. 나름대로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대학에서 학위를 따고 십여 년 전임교수의 꿈을 키웠는데 꿈을 접고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버스기사의 길을 택한 것 같다.

그 분이 학계를 떠나면서 절규하듯 외친 말이 "대한민국은 마피아 공화국"이었다. 세월호 사태에서 볼 수 있듯 해피야, 관피아는 물론 학계의 학피아도 만만치 않다. 전임 교수 자리를 잡으려면 든든한 인맥을 만들어 놓아야 하고 정부 지원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서도 인맥을 쌓아놓아야 한다. 프로젝트 심사위원도 선배 전임교수들이 하니 인맥이 없으면 방송에 나올 정도의 인재가 아니면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하다못해 논문을 쓰더라도 심사위원과 인맥이 닿은 쪽이 논문 통과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외부 인사를 초빙하여 심사를 한다 할지라도 그 차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심사주최 측은 주최 측과 코드가 맞는 심사위원을 위촉하기 때문이다.

이 대학 강사는 떠나기 전 자신이 다니던 대학에 강사협의회를 만들려다 실패한 바 있다. 그 대학 강사들이 다들 취지는 공감하나 해고당할까 두려워 협의회 참여를 거절하고 이 강사의 협의회 구성을 적극 막았다 한다. 이 강사는 "비겁자들"이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한 대학 강사는 쥐꼬리 보수라도 그나마 먹고 살만하니까 강사협의회에 가담을 안 한 것이라고 필자에게 귀띔을 해준다.

얼마 전에 필자는 심야 택시를 탔다. 심야택시기사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얘기 저 얘기 묻고 떠들더니 "아무리 밤새 일해도 이백만 원 이상 벌기 힘들어요. 제가 이래도 법대로 살아야 하나요?"라고 필자에게 묻는다. 심야에 다소 무섭기도 하고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라 잠자코 있었는데 이내 같은 질문을 또 한다. "제가 이래도 법대로 살아야 하나요?" 

기사의 얼굴을 살펴보니 다행히 내 지갑을 털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탈법을 암시하는 그의 항변은 자신이 얼마나 힘든가에 대한 호소이자 억울함으로 보였다.  중고등학교 때 조금 공부를 못했다고 해서 나머지 20대 이후의 인생에서 아무리 용을 써도 이백만 원을 벌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것에 대해 필자도 그 불공정함에 공감한다.

도대체 대한민국에서 한 가족이 사는 데 필요한 돈이 얼마냐에 필자의 친지들은 "최소 한 달에 이백오십만원은 벌어야 한다"부터 "천만 원은 벌어야 한다"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한 달에 이백오십만 원은 커녕 백만 원도 못 버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필자의 또 다른 지인은 IMF로 사업을 망친 후 계속 주식만 하다 역시 거의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얼마 전 백여만 원 급여의 스쿨버스 기사로 취직하였다. 그가 주식을 포기하면서 일장 대성통곡을 하였다는 후문이다.

대학 강사가 버스기사가 되고,  소규모 사업가가 스쿨버스 기사가 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지 모른다. 높은 이상을 버리고 현실에 안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리라.

일전에 한 방송사는 '미국의 부활'이라는 주제의 다큐 프로그램을 상영한 바 있다. 셰일 가스의 개발과 애국심 등으로 미국 경제가 부활했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하는 라틴계 또는 아프로-아메리칸계 미국인들의 표정들을 보니 그 부활은 화려한 부활이라기보다는 생계형 부활로 보였다. 1960, 70년대 백인 청년들이 마약복용을 한 듯한 몽롱한 표정으로 고급 캐딜락을 몰며 흥청망청 놀던 시대의 미국의 영광이 아니다. 백인은 온데 간데 안 보이고 하층민으로서의 라틴계 및 아프로-아메리칸 계의 생계형 소박한 부활만 보일 뿐인 것이다.

과학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더라도 전 세계 경제가 과거의 발전 속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전 세계적으로 첨단과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서민층의 생활수준은 하향 조정될 것으로 보인다.

대학에서도, 소규모 상공인들에게서도 젊은 구직자들에게도 자본주의 경쟁 논리에 의한 무능력자 솎아내기 작업은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자본주의 경쟁논리에 의해서 퇴출된 이들에 대한 방책망을 마련하지 않으면 이들은 결국 법망을 넘거나 노숙자가 되거나 자살하거나 혁명가가 될 것이다. 아직까지 이들이 남의 집 담을 넘거나 혁명을 부르짖고 있지 않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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