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현이 될 거예요", 나를 놀라게 한 말 한마디
[로또교실 17] 누구를 위하여 살 빼는가
▲ 네가 진짜 원하는게 뭐야? ⓒ 이준수
임시 진료실이 된 과학실의 공기는 무거웠다. 옆 반 마지막 학생이 검사 중이었다. 곧 있으면 우리 반이 들어가야 할 차례. 그러나 명호와 우형이는 차마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바짝 얼어있었다. 그들은 과학실 입구에서 멈춰버렸다. 문에 딸린 투명한 유리 너머로 흰색 가운 차림의 의사들이 앉아있었다. 왼쪽 팔뚝을 보니 영어로 삼척병원이라는 푸른 글씨가 선명했다.
"뚱뚱한 애들은 피 뽑는데…."
"몇 킬로그럼부터?"
"몰라. 아마 50킬로그램일 거야. 아닐 수도 있어."
먼저 검사를 마친 옆반 영민이가 과학실을 나가다 말고 채혈 이야기를 툭 던졌다. 채혈은 작년 기준으로 비만이 우려되는 학생들만 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보건 선생님이 해당 인원들에게 아침을 거르고 오라고 언질을 줬기에 반 아이들에게 채혈에 대해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뚱뚱하면 피를 뽑는다는 괴담을 듣게 됐으니…. 아이들은 때아닌 '나 뚱뚱해?' 고민을 시작했다.
"나 피 뽑을 거 같아."
"네가 뽑으면 나도 뽑을 걸. 요즘 살쪘어."
마른 체형의 연지(가명)가 주삿바늘이 무섭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비슷한 무게의 서주도 맞장구를 치며 섬뜩하다고 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며 실제 채혈 대상자들은 침묵을 지켰다. 아무 말 없었지만 눈동자가 흔들리고 얼굴빛이 어두웠다. 겁 많은 민수는 눈물을 글썽였다. 민수의 눈물은 공포를 증폭시켰다. 아이들은 손으로 팔뚝 위를 쓸면서 바들바들 떨었다. 이대로 놔두면 채혈에 대한 두려움만 키울 듯해 괜찮다고 다독였다.
주삿바늘이 두려운 걸까, '뚱땡이'라는 놀림이 두려운 걸까
패닉에 빠진 11살 녀석들을 진정시키고 키와 몸무게 재기를 시작했다. "두호야 신발 벗고 올라와 볼까?" 담당의사의 따뜻한 목소리에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발바닥 표시가 난 기계 위에 사람이 오르자 머리 위로 작은 플라스틱 막대가 내려왔다. 막대는 정수리 부위를 톡 치더니 다시 올라갔다. 계기판에는 검사자의 신장과 체중이 표시됐다.
두호가 겨울방학보다 다리가 길어졌다고 즐거워했다. 광열이는 149cm를 기록했는데 늘씬한 상체를 보고 영지와 연서가 호들갑을 떨었다. 여학생들의 관심을 의식했는지 정호는 키를 재는 막대가 내려올 때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기계가 표시한 숫자를 확인한 정호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자기 차례가 끝나고 나서도 소년들은 등을 맞대고 서로의 높이를 확인했다. 사내들이 몸길이로 경쟁하는 동안 과학실 바닥에는 옷가지가 쌓였다.
얇은 청재킷과 검은 카디건, 가벼운 바람막이 점퍼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모두 여자아이들의 옷이었다. 식판에 담긴 떡이 급식 테이블에 떨어져도 더럽다고 안 먹는 깔끔쟁이들인데 의외였다. 마침 승현이가 낑낑거리며 멜빵 치마를 벗으려길래 급히 다가가 말렸다.
"승현아, 어디 불편하니?"
"아니요. 몸무게가 더 나올까봐요."
그랬다. 체중계 앞에서 옷은 거추장스러운 허물이었다. 조금만 추워도 이를 딱딱 부딪치는 아이들이 500g을 위해 옷을 내던졌다. 32.8kg이 32.3kg으로 표시되는 기적(L양은 1kg 빼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했다)이 실현됐다. 날씬해지고 싶은 소녀들의 욕망은 강렬하고 뜨거웠다.
이렇게 작은 옷 입으면서 살을 빼겠다니...
"문지르지 말고 알코올 솜으로 꼭 누르고 있어."
계획된 대로 6명이 채혈검사를 했다. 우려와 달리 아무도 채혈 대상자들을 놀리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에 공감하며 위로해줬다. 특이한 건 비만 위험군에 속하지 않은 여학생들의 다이어트 선언이었다.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는데 왜 살을 빼려 했을까? 설현이 되고 싶다고 했다. GO켓 광고에 나오는 그녀처럼 예뻐지고 싶어서 미백 기능이 있는 선크림을 바르고 밥을 덜어 먹었다. 생각해보니 쉬는 시간마다 앞머리에 고데기 롤을 말고, 간식 먹는 친구를 구박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너는 충분히 아름다워. 몸무게 줄이면 성장에 방해가 될 거야."
"네에 네. 그래도 살 빼야 설현처럼 예쁠 거 같아요."
500g을 줄이기 위해 옷을 입든 벗든 선생이 참견할 바는 아니다. 다만 외부에서 주어진 아름다움의 기준에 맞추느라 본연의 생김새에 당당하지 못한 모습이 안타까웠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설현이 될 수 없고 될 필요도 없다. 인간은 고유한 존재로서 각자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다. 설현만이 아름다움의 기준이라면 그 이외의 인물은 모두 추하단 말인가? 잘 생각해봐야 한다. 왜 내가 살이 빼고 싶은지. 왜 예뻐지고 싶은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자크 라캉)
설현을 닮고 싶은 수영이의 가치관이 잘못된 것일까? 욕망구조를 파악하고 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아이들은 대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쉬운 예로 '공부'를 살펴보자.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공부하기 좋아하니?"라고 물으면 대부분 긍정적으로 응답한다. 질문을 바꿔 "엄마나 선생님이 네가 공부 잘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데, 너는 네가 공부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는 것 아니야?"라고 던지면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모른다고 얼버무린다. 자신의 욕망이 진실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인지 아이들은 구분하기 힘들다.
특히 부모의 품을 떠나서는 독립과 생존이 불가능한 초등학생들은 당당한 주체로서 살기가 어렵다. 엄마가 반 1등을 원하기에 자식도 반 1등을 원한다. 방송에서 저체중에 가까운 연예인들을 이상적인 몸매라고 찬양하기에 시청자도 마른 몸을 희망한다. 욕망은 외부에서 온다. 아이들은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하여 공부하고 살을 뺀다.
TV, 스마트폰, 신문, 잡지, 라디오…. 현대인의 일상은 온갖 매체로 둘러싸여 있다. 매체는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미 누군가로부터 의도되고 기획된 욕망들이 뉴스나 광고의 형태로 쏟아진다. 그 이면에는 거대한 자본의 논리가 숨어있다. 대중은 매체에 등장하는 것들이 진정으로 필요하고 중요한지 고민할 틈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사고, 먹고, 버린다. 초딩이든 어른이든 강요된 욕망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를 살아내고 있다.
과학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옷들을 챙겼다. 먼지가 잔뜩 묻어있었다. 옷깃을 잡고 탁탁 털었다. 옷이 참 작았다. 이렇게 작은 옷을 입고 다니는 꼬마들이 살을 빼겠다고 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길게 웃을 수 없었다. 내 안경도 할부였다. 배우 유준상이 드라마에서 쓰고 나온 안경이 멋있어서 따라 구입했다. 물론 유준상씨처럼 근사해지지 못했다. 안경 모델명은 동일했으나 착용샷은 사뭇 달랐다. 집에 그런 물품들이 산처럼 보관돼 있다.
우리 반 여학생들이 옳았다. 나도 좀 빼야겠다. 허벅지와 팔뚝에 붙어있는 지방 말고, 내 욕망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타인의 욕망들을 과감하게 도려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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