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건축가, 왜 이중적 삶을 살았나
[경성의 건축가들 ②] 이중적인 너무나 이중적인, 박길룡(1898-1943)
2015년까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문화유산은 600건이 넘습니다. 근대건축 문화재의 경우, 역사적인 형태를 살리면서 공공건물로 리모델링하는 사례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논리에 밀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근대 건축은 훨씬 많습니다. 한번쯤 그 시대의 건축가들을 되돌아보고 싶었습니다. 일그러진 근대의 일그러진 건축가들을 말입니다. 잊혀진 건축가들을 통해 그 시대의 또 다른 이야기를 알게 되면, 개발에 대한 관점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보존 방식도 좀 더 다양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기자말
1937년 종로 사거리에 세워진 지하 1층 지상 6층 건물은 묵직하고 당당했다. 화강석으로 마감한 1층 쇼윈도 앞은 구경꾼들로 북적댔다. 대리석으로 꾸민 출입구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팔랑거리며 드나들었다. 그 위로 5층까지 쭉 뻗은 기둥은 그리스 신전 기둥을 사각 틀에 넣고 납작하게 눌러놓은 듯 했다.
기둥 사이로 촘촘하게 들어간 좁고 긴 창문 때문에 건물은 더 높아 보였다. 6층은 간결한 아치와 처마 장식으로 변화를 주었다. 옥상에 정원과 전망대가 있고, 최상부엔 광고와 뉴스를 볼 수 있는 대형 전광판이 설치되었다. 실내에는 최신식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대식당과 그랜드 홀, 상설화랑, 사진관과 미용실, 스포츠 시설이 있었다.
경성 인구의 80%가 구경을 했단다. 얼마나 크고 볼거리가 많은지 아침에 들어가면 해가 져서야 나온다는 둥, 말도 못하게 큰 하얀 돌집이라는 둥, 심지어 금칠한 건물이라는 둥, 별의별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그 별천지의 건물,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사람은 박길룡이었다. 늘 '최초'와 '유일'을 달고 다녔던 사람이었다. 경성공업전문학교(아래 경성공전) 건축과를 졸업한 최초의 조선인. 조선총독부에서 최초로 건축기수가 된 조선인. 조선인은 승진해봤자 기수까지였던 총독부에서 최고기술자인 기사에 오른 최초의 조선인.
일제강점기에 건축사무소를 최초로 개업한 조선인도 그였다. 그의 이름을 딴 '박길룡건축사무소'였다. 사업은 번창했다. 주택만 해도 하루에 한 채씩 짓는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종로 앞길에서도 뒷길에서도 그가 설계한 건물을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더 있다. 1938년 그는 '조선건축회'의 이사가 되었다. 역시 조선인 최초였고 유일했다. 1941년엔 경기 건축대서사(오늘날 건축사와 유사) 조합장이 되었다. 같은 해 '조선건축기사협회'에서도 유일한 조선인 회원이면서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1943년 그는 46세의 나이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건축회'는 건축전문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 5월호에 박길룡 특집 기사를 냈다. 그의 작품과 경력을 소개하고, 조선인과 일본인을 막론하고 추모와 애도의 글을 실었다. 일본인 건축가는 그를 "반도 출신의 건축가로서 유일무이의 고봉"이라고 평가했다.
승승장구의 역사이고 화려한 이력이다. 하지만 이면에는 고단한 성장기가 있었다. 내면에는 식민지 지식인의 모순과 이중성이 교차하고 있었다.
화신백화점 설계자 '흙수저' 박길룡
박길룡은 요즘 말로 흙수저였다. 그는 1898년 영세한 미곡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너무 가난해서 열 살 때부터 쌀 배달, 물장수, 담배쌈지 깁기, 단춧구멍 뚫기, 행상을 하며 고학을 했다. 그가 나고 자란 종로는 영화 <장군의 아들>에 나오는 그 종로였다.
일본 상권이 아무리 설쳐대도 넘볼 수 없던 민족 자존심의 종로였다. 종로, 장남, 고학은 그에게 성실함, 의협심, 결단력, 보스 기질의 바탕이 되었다. 그 덕에 들어갈 때도 차별, 나갈 때도 차별이라던 경성공전에서 그는 재학 시설 내내 일본인을 제치고 급장을 했다.
그렇게 자신이 처한 환경과 싸우며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때, 3. 1운동이 일어났다. 경성공전의 조선인 학생 30여 명 중에서 20명이 독립만세 시위에 나갔고 13명이 판결을 받았다. 건축과 후배 박동진은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2년 집행유예를 받은 후 만주로 떠났다. 그런데 평소 의협심이 강하고 보스 기질이라던 박길룡은?
다른 건축가들보다 더 유명해서 더 많은 자료와 증언이 있는데도 거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당시 그의 처지를 상상해본다. 졸업을 코앞에 둔 상태에 아래로 4명의 동생들이 있다, 이미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더구나 이제 겨우 막 인생의 한 고비를 넘으려는 순간이다... 어쨌든 그는 3. 1운동 직후인 3월 25일 경성공전을 졸업했고, 이듬해에 조선총독부 설계조직에 들어갔다.
그는 총독부에서 12년 동안 건축기수로 근무했다. 기수는 하급관리였다. 위로 사무관과 기사가 있었고 아래로 촉탁이나 고원이 있었다. 사무관은 행정관료였고, 기사는 건축 실무 전반의 책임자였다. 그 기사를 박길룡이 조선인 최초로 했다지만,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공전 후신) 교수였던 이균상은 좀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당시 조선인 기사는 없었단다. 박길룡이 받은 기사는 퇴직을 앞둔 사람을 대우하는 참기사였단다. 실제로 박길룡은 기사가 된 지 이틀 만에 퇴직했고 두 달 후 자신의 사무소를 열었다.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였다. 그것도 총독부 안과 밖에서, 건축 안과 밖에서, 다방면으로, 맹렬하게 그러나 모순적으로.
그는 낮에는 총독부에서 건축 일을 하고, 밤에는 조선인 건축주가 의뢰한 주택과 사무소를 설계했다. 마침 회사령 폐지 이후 조선인 자본가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부업으로 쌓은 경험과 명성 덕에 드디어 1932년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의 활동은 건축 밖으로도 뻗어나갔다. 1926년부터 신문, 잡지, 건축전문지에 많은 글을 발표했다. 지역별 재래식 주택개량 방안, 부엌과 온돌 개량 등 건축계몽에 관한 글이 많았다.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개업할 즈음엔 조선인 건축가들과 '조선가옥건축연구회'를 설립하고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다.
그가 주장하던 주택개량론의 키워드는 '조선식', '과학화', '능률화'였다. 그런데 '조선식'이라니, 경성공전과 총독부에서 서양식 건축을 해온 그가 왜? 언론에 한창 서양풍 문화주택이 유행할 때, 사회 유명 인사들이 재래주택을 문명의 반대말쯤으로 여길 때, 그래서 온돌 폐지론마저 나올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장구한 생활이 낳은 재래 형식을 토대로 하고, 우리 지방의 산물을 재료로 하여, 과학적인 양식의 구축법을 구성 수단으로 하고, 우리 취미로 장식하여 현대 우리 생활의 용기가 될 가구(家構)가 우리 생활의 표현일 것이다." - '유행성의 소위 문화주택', <조선일보>, 1930. 9. 22
그렇게 해서 나온 대안이 절충식이었다. 구조와 재료는 서양식, 온돌과 창호는 조선식, 공간 배치는 일본식이었다. 물론 그가 재래주택의 위생, 채광, 환기, 동선 등의 문제점을 과학적이고 능률적으로 해결한 것이긴 했다. 하지만 해결방식이 물리적인 결합에 가까웠다. 더구나 그의 개선안은 갈수록 일본풍이 짙어졌다.
사실 박길룡에게 더 절실한 것은 '조선식'보다 '과학화'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과학대중화 운동을 이끌었던 '발명학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최초의 종합과학 잡지 <과학조선>에도 과학의 생활화를 주장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과학의 생활화 없이는 사회가 진보할 수도 생존경쟁에 저항할 수도 없다고 했다. 왠지 '선실력양성 후독립'의 실력양성운동 냄새가 난다.
맞다. 발명학회는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 사회진화론은 약육강식과 근대화 논리를 내세워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었다. 거기에 빠진 신지식인들은 일제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 활동하다가 제 꾀에 넘어가듯 일제에 동조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박길룡의 '과학화'는 그의 건축관이기도 했다. 과학의 합리주의, 장식을 배제한 기능주의 미학, 기술의 진보를 표현하는 구조와 재료, 공업화와 산업화가 이룩한 생산 시스템, 이런 모더니즘 건축에 그는 반했다. 무엇보다 그것은 총독부에서 만들어온 건축과 달랐다. 식민지에서 제국의 권위를 드러내는 신고전주의 양식 혹은 제국양식의 건축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조선인 건축주가 원할 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독자적으로 설계한 건축은 김연수주택(1929), 조선생명보험(1930), 김명진주택(1931), 종로백화점 동아(1931), 동일은행 남대문지점(1931), 한청빌딩(1935), 화신백화점(1937), 구영숙소아과(1936), 경성여자상업학교(1937), 전용순주택(1939), 평양대동공전(1940), 북단장(1940), 이문당(1943), 혜화전문학교(1943) 등이다. 이 건축들은 그가 지향했던 모더니즘을 제대로 구현한 것일까?
여기에도 이론과 현실의 차이가 있다. 굵직하게 보면 단순한 형태, 장식 배제, 기능 분할, 수평성 강조, 평지붕 사용, 비대칭적인 평면구성 등 모더니즘의 요소를 도입했다. 몇 몇 건축은 모더니즘 건축에 상당히 근접했지만, 대개 즉물적으로 해석한 과도기적인 형태가 남아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불협화음은 식민지의 건축 현실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당대 일본과 중국의 건축가들은 원산지 서구에서 유학하고 직접 세계를 돌며 답사도 했다. 박길룡을 비롯한 조선인 건축가는 일제의 관립 학교에서 고작 3년간 기술 위주의 교육을 받고 관청에서 실무를 했다. 식민지라는 우물 속에 갇힌 그들이 인식한 근대건축도 일제가 던져준 자료를 통해서였다.
'최초의 신화'보다 더 끌린 박길룡의 마음
일제 후반기, 박길룡은 '국민총력 조선연맹'의 문화부 위원이 되었다. '국민총력 조선연맹'은 일제가 전시체제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였다. 그것이 자발적인 선택인지, 그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런데 그 기간에 그는 우리말로 된 최초의 월간 건축신문 <건축조선>을 창간했다. 또 '조선어 건축용어집'을 발행하려고 원고를 쓰고 있었다.
그는 앞과 뒤가 달랐다. 앞의 모습을 활용하여 뒤의 목적을 끌고 나갔다. 몸은 친일의 환경에 있고, 마음은 조선인의 염원을 품고, 의식은 제국을 향한 동경과 식민지의 콤플렉스에 흔들렸다. 식민교육, 식민권력, 식민자본을 바탕으로 성장한 그 시대 건축가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내면이다.
장면 하나를 떠올려본다. 그가 나고 자란 종로에 박길룡건축사무소가 있었다. 언제나 조선인 건축가들로 붐볐다. 직원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다른 건축가들은 퇴근 후에 모여들었다. 총독부에서 임금차별을 받던 그들은 그곳에서 부업을 했다. 일만 하는 곳은 아니었다. 선후배 건축가들이 모여 건축계몽 책과 건축신문을 펴냈다. 일본 건축잡지에 소개된 해외 건축을 보며 새로운 건축에 대한 토론도 벌였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울컥하기도 했다. 그곳은 식민지 조선의 건축가들이 응집하던 근거지였다.
내가 생각하는 박길룡의 최고 업적은 그런 것이다. '최초'와 '유일'의 신화가 아니다. 그는 '최초'와 '유일'의 영향력으로 차별받던 조선인 건축가들을 품었다. 그들과 함께 건축 안과 밖을 넘나들었다. 일제강점기에 가장 잘 나가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동료 건축가들은 그의 가족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거기에는 조선인도 있었고 일본인도 있었다. 후배 김세연은 '박길룡건축사무소' 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해방 직후까지 그의 사무소를 이어갔다. 박길룡의 진짜 역량은 그런 데에 있었다.
1937년 종로 사거리에 세워진 지하 1층 지상 6층 건물은 묵직하고 당당했다. 화강석으로 마감한 1층 쇼윈도 앞은 구경꾼들로 북적댔다. 대리석으로 꾸민 출입구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팔랑거리며 드나들었다. 그 위로 5층까지 쭉 뻗은 기둥은 그리스 신전 기둥을 사각 틀에 넣고 납작하게 눌러놓은 듯 했다.
기둥 사이로 촘촘하게 들어간 좁고 긴 창문 때문에 건물은 더 높아 보였다. 6층은 간결한 아치와 처마 장식으로 변화를 주었다. 옥상에 정원과 전망대가 있고, 최상부엔 광고와 뉴스를 볼 수 있는 대형 전광판이 설치되었다. 실내에는 최신식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대식당과 그랜드 홀, 상설화랑, 사진관과 미용실, 스포츠 시설이 있었다.
경성 인구의 80%가 구경을 했단다. 얼마나 크고 볼거리가 많은지 아침에 들어가면 해가 져서야 나온다는 둥, 말도 못하게 큰 하얀 돌집이라는 둥, 심지어 금칠한 건물이라는 둥, 별의별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 화신백화점(왼쪽 사진)이 들어간 일제강점기의 엽서. 이 자리에 지금은 종로타워가 들어서 있다. ⓒ 부산근대역사관
그 별천지의 건물,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사람은 박길룡이었다. 늘 '최초'와 '유일'을 달고 다녔던 사람이었다. 경성공업전문학교(아래 경성공전) 건축과를 졸업한 최초의 조선인. 조선총독부에서 최초로 건축기수가 된 조선인. 조선인은 승진해봤자 기수까지였던 총독부에서 최고기술자인 기사에 오른 최초의 조선인.
일제강점기에 건축사무소를 최초로 개업한 조선인도 그였다. 그의 이름을 딴 '박길룡건축사무소'였다. 사업은 번창했다. 주택만 해도 하루에 한 채씩 짓는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종로 앞길에서도 뒷길에서도 그가 설계한 건물을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더 있다. 1938년 그는 '조선건축회'의 이사가 되었다. 역시 조선인 최초였고 유일했다. 1941년엔 경기 건축대서사(오늘날 건축사와 유사) 조합장이 되었다. 같은 해 '조선건축기사협회'에서도 유일한 조선인 회원이면서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1943년 그는 46세의 나이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건축회'는 건축전문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 5월호에 박길룡 특집 기사를 냈다. 그의 작품과 경력을 소개하고, 조선인과 일본인을 막론하고 추모와 애도의 글을 실었다. 일본인 건축가는 그를 "반도 출신의 건축가로서 유일무이의 고봉"이라고 평가했다.
승승장구의 역사이고 화려한 이력이다. 하지만 이면에는 고단한 성장기가 있었다. 내면에는 식민지 지식인의 모순과 이중성이 교차하고 있었다.
화신백화점 설계자 '흙수저' 박길룡
박길룡은 요즘 말로 흙수저였다. 그는 1898년 영세한 미곡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너무 가난해서 열 살 때부터 쌀 배달, 물장수, 담배쌈지 깁기, 단춧구멍 뚫기, 행상을 하며 고학을 했다. 그가 나고 자란 종로는 영화 <장군의 아들>에 나오는 그 종로였다.
일본 상권이 아무리 설쳐대도 넘볼 수 없던 민족 자존심의 종로였다. 종로, 장남, 고학은 그에게 성실함, 의협심, 결단력, 보스 기질의 바탕이 되었다. 그 덕에 들어갈 때도 차별, 나갈 때도 차별이라던 경성공전에서 그는 재학 시설 내내 일본인을 제치고 급장을 했다.
그렇게 자신이 처한 환경과 싸우며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때, 3. 1운동이 일어났다. 경성공전의 조선인 학생 30여 명 중에서 20명이 독립만세 시위에 나갔고 13명이 판결을 받았다. 건축과 후배 박동진은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2년 집행유예를 받은 후 만주로 떠났다. 그런데 평소 의협심이 강하고 보스 기질이라던 박길룡은?
다른 건축가들보다 더 유명해서 더 많은 자료와 증언이 있는데도 거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당시 그의 처지를 상상해본다. 졸업을 코앞에 둔 상태에 아래로 4명의 동생들이 있다, 이미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더구나 이제 겨우 막 인생의 한 고비를 넘으려는 순간이다... 어쨌든 그는 3. 1운동 직후인 3월 25일 경성공전을 졸업했고, 이듬해에 조선총독부 설계조직에 들어갔다.
그는 총독부에서 12년 동안 건축기수로 근무했다. 기수는 하급관리였다. 위로 사무관과 기사가 있었고 아래로 촉탁이나 고원이 있었다. 사무관은 행정관료였고, 기사는 건축 실무 전반의 책임자였다. 그 기사를 박길룡이 조선인 최초로 했다지만,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공전 후신) 교수였던 이균상은 좀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당시 조선인 기사는 없었단다. 박길룡이 받은 기사는 퇴직을 앞둔 사람을 대우하는 참기사였단다. 실제로 박길룡은 기사가 된 지 이틀 만에 퇴직했고 두 달 후 자신의 사무소를 열었다.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였다. 그것도 총독부 안과 밖에서, 건축 안과 밖에서, 다방면으로, 맹렬하게 그러나 모순적으로.
그는 낮에는 총독부에서 건축 일을 하고, 밤에는 조선인 건축주가 의뢰한 주택과 사무소를 설계했다. 마침 회사령 폐지 이후 조선인 자본가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부업으로 쌓은 경험과 명성 덕에 드디어 1932년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의 활동은 건축 밖으로도 뻗어나갔다. 1926년부터 신문, 잡지, 건축전문지에 많은 글을 발표했다. 지역별 재래식 주택개량 방안, 부엌과 온돌 개량 등 건축계몽에 관한 글이 많았다.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개업할 즈음엔 조선인 건축가들과 '조선가옥건축연구회'를 설립하고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다.
▲ 박길룡의 주택개량안 ⓒ 동아일보, 신가정
그가 주장하던 주택개량론의 키워드는 '조선식', '과학화', '능률화'였다. 그런데 '조선식'이라니, 경성공전과 총독부에서 서양식 건축을 해온 그가 왜? 언론에 한창 서양풍 문화주택이 유행할 때, 사회 유명 인사들이 재래주택을 문명의 반대말쯤으로 여길 때, 그래서 온돌 폐지론마저 나올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장구한 생활이 낳은 재래 형식을 토대로 하고, 우리 지방의 산물을 재료로 하여, 과학적인 양식의 구축법을 구성 수단으로 하고, 우리 취미로 장식하여 현대 우리 생활의 용기가 될 가구(家構)가 우리 생활의 표현일 것이다." - '유행성의 소위 문화주택', <조선일보>, 1930. 9. 22
그렇게 해서 나온 대안이 절충식이었다. 구조와 재료는 서양식, 온돌과 창호는 조선식, 공간 배치는 일본식이었다. 물론 그가 재래주택의 위생, 채광, 환기, 동선 등의 문제점을 과학적이고 능률적으로 해결한 것이긴 했다. 하지만 해결방식이 물리적인 결합에 가까웠다. 더구나 그의 개선안은 갈수록 일본풍이 짙어졌다.
사실 박길룡에게 더 절실한 것은 '조선식'보다 '과학화'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과학대중화 운동을 이끌었던 '발명학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최초의 종합과학 잡지 <과학조선>에도 과학의 생활화를 주장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과학의 생활화 없이는 사회가 진보할 수도 생존경쟁에 저항할 수도 없다고 했다. 왠지 '선실력양성 후독립'의 실력양성운동 냄새가 난다.
맞다. 발명학회는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 사회진화론은 약육강식과 근대화 논리를 내세워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었다. 거기에 빠진 신지식인들은 일제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 활동하다가 제 꾀에 넘어가듯 일제에 동조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박길룡의 '과학화'는 그의 건축관이기도 했다. 과학의 합리주의, 장식을 배제한 기능주의 미학, 기술의 진보를 표현하는 구조와 재료, 공업화와 산업화가 이룩한 생산 시스템, 이런 모더니즘 건축에 그는 반했다. 무엇보다 그것은 총독부에서 만들어온 건축과 달랐다. 식민지에서 제국의 권위를 드러내는 신고전주의 양식 혹은 제국양식의 건축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조선인 건축주가 원할 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독자적으로 설계한 건축은 김연수주택(1929), 조선생명보험(1930), 김명진주택(1931), 종로백화점 동아(1931), 동일은행 남대문지점(1931), 한청빌딩(1935), 화신백화점(1937), 구영숙소아과(1936), 경성여자상업학교(1937), 전용순주택(1939), 평양대동공전(1940), 북단장(1940), 이문당(1943), 혜화전문학교(1943) 등이다. 이 건축들은 그가 지향했던 모더니즘을 제대로 구현한 것일까?
여기에도 이론과 현실의 차이가 있다. 굵직하게 보면 단순한 형태, 장식 배제, 기능 분할, 수평성 강조, 평지붕 사용, 비대칭적인 평면구성 등 모더니즘의 요소를 도입했다. 몇 몇 건축은 모더니즘 건축에 상당히 근접했지만, 대개 즉물적으로 해석한 과도기적인 형태가 남아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불협화음은 식민지의 건축 현실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당대 일본과 중국의 건축가들은 원산지 서구에서 유학하고 직접 세계를 돌며 답사도 했다. 박길룡을 비롯한 조선인 건축가는 일제의 관립 학교에서 고작 3년간 기술 위주의 교육을 받고 관청에서 실무를 했다. 식민지라는 우물 속에 갇힌 그들이 인식한 근대건축도 일제가 던져준 자료를 통해서였다.
'최초의 신화'보다 더 끌린 박길룡의 마음
▲ 박길룡이 설계한 건축 ⓒ 대한건축사협회
일제 후반기, 박길룡은 '국민총력 조선연맹'의 문화부 위원이 되었다. '국민총력 조선연맹'은 일제가 전시체제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였다. 그것이 자발적인 선택인지, 그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런데 그 기간에 그는 우리말로 된 최초의 월간 건축신문 <건축조선>을 창간했다. 또 '조선어 건축용어집'을 발행하려고 원고를 쓰고 있었다.
그는 앞과 뒤가 달랐다. 앞의 모습을 활용하여 뒤의 목적을 끌고 나갔다. 몸은 친일의 환경에 있고, 마음은 조선인의 염원을 품고, 의식은 제국을 향한 동경과 식민지의 콤플렉스에 흔들렸다. 식민교육, 식민권력, 식민자본을 바탕으로 성장한 그 시대 건축가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내면이다.
장면 하나를 떠올려본다. 그가 나고 자란 종로에 박길룡건축사무소가 있었다. 언제나 조선인 건축가들로 붐볐다. 직원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다른 건축가들은 퇴근 후에 모여들었다. 총독부에서 임금차별을 받던 그들은 그곳에서 부업을 했다. 일만 하는 곳은 아니었다. 선후배 건축가들이 모여 건축계몽 책과 건축신문을 펴냈다. 일본 건축잡지에 소개된 해외 건축을 보며 새로운 건축에 대한 토론도 벌였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울컥하기도 했다. 그곳은 식민지 조선의 건축가들이 응집하던 근거지였다.
내가 생각하는 박길룡의 최고 업적은 그런 것이다. '최초'와 '유일'의 신화가 아니다. 그는 '최초'와 '유일'의 영향력으로 차별받던 조선인 건축가들을 품었다. 그들과 함께 건축 안과 밖을 넘나들었다. 일제강점기에 가장 잘 나가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동료 건축가들은 그의 가족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거기에는 조선인도 있었고 일본인도 있었다. 후배 김세연은 '박길룡건축사무소' 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해방 직후까지 그의 사무소를 이어갔다. 박길룡의 진짜 역량은 그런 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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