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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 아빠와의 식사가 중요한 까닭

[이대팔 섞어쓰기] 아빠는 청국장, 아들은 크림스파게티

등록|2016.05.08 18:00 수정|2016.05.08 18:00

▲ 요즘의 대학생들은 음식값을 각각 따로 계산을 한다.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방식이다. 삽화작가 이남형 ⓒ 정덕재


[아들의 이야기] 줄 서서 밥값 내기... 정 없어 보이나요?

"아줌마 3500원씩 계산해주세요."

16학번 새내기들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식당 주인에게 하는 말이다. 네 명이 함께 밥을 먹으면 네 명이 줄을 서서 각각 계산을 한다. 체크카드로 계산하는 친구도 있고, 천 원짜리 세 장과 동전 다섯 개를 내는 친구도 있다.

정이 없다고 느껴질지도 모르는 풍경이다. 하지만 일주일 용돈으로 삼 시 세끼를 해결하려면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 이렇게 음식의 맛보다 가격에 중점을 두며 살고 있지만, 화요일은 좀 다른 날이다. 아빠와 함께 점심을 먹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게 뭐가 다르냐면 가격에 신경 쓰지 않고 정말 '맛'있는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가릴 것 없이 그날 만큼은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사실 밥 먹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꼭 비싼 음식을 먹어서 좋은 것도 아니다. 아빠와 함께 밥을 먹는 날은 일주일을 정리하는 느낌이랄까, 그런 생각이 든다. 무식하다는 핀잔을 받는 경우도 자주 있지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  아빠는 나의 용돈 굳히기 전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아빠의 이야기] 일주일에 한 번, 정신의 허기를 보충한다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 <고독한 미식가>에 나오는 주인공은 항상 혼자 음식을 먹는다. 만화의 무대는 주로 일본 도쿄다. 주인공은 식당문을 나서며 마지막에 회전초밥 두 접시는 먹지 말아야 했다는 후회를 하고, 때로는 낯선 식당에서 익숙한 평안을 느낀다.

그는 식당에서 사람들의 표정과 음식을 먹는 분위기를 살핀다. 만화의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는 음식을 먹을 때, 혼자 무언가를 먹을 때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행복하게 허기를 채운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에게 음식은 위안이자 치유이다.

1인 가구가 500만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 만큼 혼자 식사하는 인구가 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편의점 도시락이나 1인용 음식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대학 입학과 함께 집을 떠난 우리 아들도 현재 기거하는 집에서는 혼자 밥을 먹는다.

물론 국과 반찬을 제대로 갖춰놓고 상을 차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가끔 기습방문을 하면 마치 어제 이사온 듯, 아니면 내일 이사갈 듯 집안은 난장판이다. 냉장고에는 곰팡이가 핀 빵조각이 보이고 일주일 전에 사왔다는 떡볶이는 벽돌처럼 단단히 굳어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채소는 부지런히 먹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 이런 통화는 지극히 일상적이다.

"저녁은 먹었냐?"
"지금 먹으려고 요리하고 있어"
"요리라고?
"응, 계란 프라이"

나는 계란프라이를 요리라는 생각하는 아들의 터무니없는 긍정의 정신을 칭찬한다. 유명 셰프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온갖 재료를 피곤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어쩌면 계란 프라이는 원시에 가까운 요리일지 모른다.

아들과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매주 화요일마다 점심을 같이 먹는다. 녀석의 화요일 강의시간표가 비교적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식당은 내가 일하는 사무실 인근으로 잡는다. 녀석이 살고 있는 집과 거리도 멀지 않아 만나기가 수월한 편이다.

"뭐 먹을래?"
"아무거나 괜찮아."
"청국장 어뗘?"
"집에서도 먹을 수 있는 걸 굳이 사먹을 필요가 있나."
"그럼 뭐?"
"아무거나."
"시원한 동태찌개는?"
"동태는 겨울에 먹어야지."

매번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간다. 김치찌개, 해장국, 순두부…, 내가 주로 제시하는 메뉴다. 크림스파게티, 새우필라프, 치킨샐러드, 이것은 아들이 먹고 싶은 음식들이다.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최종 선택은 <이대팔 섞어쓰기>의 반대가 된다. 여덟 번가량은 아들 녀석의 취향에 따르는 편이다.

녀석이 화요일 점심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밥값을 더치페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친구와 함께 밥을 먹는 것처럼 따로 계산하자는 말을 꺼냈다가 졸지에 좀팽이 아빠 취급을 받기도 했다.

식사 이후 15분 남짓, 우리는 차 한잔 하며 잡다한 소재로 이야기를 나눈다. 문학의 사회적 반영이 무엇이냐는 전공 관련 질문부터 지난 총선에서 내가 녹색당을 지지한 이유까지 이야깃거리는 다양하다. 뿐만 아니라 한화 이글스와 대전 시티즌의 경기력, 냉면을 가위로 자르면 맛이 없는 이유, 이쑤시개를 물고 다니는 아저씨들에 대한 비난 등 짧은 시간에 오가는 대화는 경계가 없다.

같이 밥을 먹는 일은 육체의 허기뿐만 아니라 정신의 허기를 보충하는 일이다. 밥을 먹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고 세상의 고단함을 어루만진다.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상대방이 얘기하는 정보와 지식을 필터에 거른다. 물론 누구와 먹는지에 따라 대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긴 하다.

아들과 언제까지 점심을 같이 먹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 하지만 한 끼를 나누는 즐거움 속에서 스무살 청년의 걱정과 한숨을 발견할 때는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고뇌의 깊은 한숨은 존재의 불안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존재의 고민이 커질 때, 존재와 사회와의 관계를 걱정할 때 정신은 숙성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녀석의 어두운 그림자를 유쾌하게 바라보고 있다.

차를 마신 후 나는 사무실로, 녀석은 학교로 향한다. 녀석이 뒤돌아보는 게 헤어짐의 아쉬움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기까지는 불과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빠, 만 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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