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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버린 건 조국이 아니라 박정희"

[다시, 역사 바로 세우기 기획인터뷰 ⑥] 11.22 사건 피해자 강종건

등록|2016.05.12 18:27 수정|2016.05.13 13:16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여년. 우리 현대사는 유례없이 빠른 경제성장을 일구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소유한 이들의 학살, 내란, 부정선거, 고문과 각종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오욕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마이뉴스>와 '반(反)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는 뒤틀린 우리 역사의 문제점을 되짚어 보고, 역사의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한 운동을 촉구하는 기획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말]
[기사 수정 : 13일 오후 1시 17분]

1975년 11월 22일,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김기춘은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 북괴의 지령을 받은 간첩들이 모국 유학생을 가장해 국내 대학에 침투, 이른바 통일혁명당 지도부를 학원 안에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지하망을 조직해 한국민주청년동지회 명의로 동조세력을 규합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한편, 학생과 종교인, 지식인 등을 배후에서 선동조종하여 민주화, 자유화의 구실 아래 소요를 계획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11.22 사건이다. 이 발표가 있기까지 모국으로 유학 온 21명의 재일동포들은 끔찍한 고문에 시달렸고 청춘의 황금기를 꿈에 그리던 고국의 감옥에서 빼앗겨야 했다. 그런 시대였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불린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의 사형집행이 있었던 때도 1975년. 간첩이 없으면 만들어 냈던 유신의 시대였다.

강종건(1951년생)씨도 그들 중 하나다. 재일동포 2세인 그는 윤동주가 다녔던 일본 교토 동지사(同志社) 대학 법학부 3년을 수료하고 1973년 4월, 서울대학교 재외국민교육연구소로 유학을 왔다. 이후 1974년 3월 고려대학교 법대 2학년으로 편입한 후 3학년을 다니다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동지사 대학 선배이자 '북괴의 재일공작원'인 '야마다'라는 인물로부터 김일성 이론을 학습하고 지령을 수수, 국내에 잠입해 간첩활동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는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나, 전향서 작성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8년을 더 보안감호소에 갇혀 있어야 했다. 2014년 9월 26일, 대법원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잃어버린 13년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지난 5월 초, 11.22 사건을 비롯한 정보기관의 간첩조작 사건을 다룬 <자백>이 상영되는 전주에서 그를 만났다.

강종건씨11.22사건을 비롯한 국가정보기관의 조작간첩사건을 다룬 <자백>이 상영되는 전주국제영화제에 참석한 강종건씨. ⓒ 오소영


고문이 만들어 낸 간첩, "가공인물까지 상상해낼 수밖에 없었다"

- 당시 사건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습니다. 검찰의 공소 사실이 완전히 잘못된 것인가요?
"완전 날조지요. 물론 그때만 해도 한국은 김일성은 가짜고 진짜 김일성은 예전에 죽었다는 식으로 알려졌을 때니까, '일본에서 내가 들은 건 그런 게 아닌데?' 정도의 이야기를 학생들과 몇 번 한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누구를 만나서 지령을 받고 간첩활동을 하고.... 그럴 이유도 없고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 당시 검찰 공소장에는 선생님이 '야마다'라는 동지사 대학 선배에게 간첩교육과 지령을 받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야마다'라는 이름은 제가 만든 거예요.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을 때 영장 보자고 했더니 '이 자식이? 무슨 영장! 여기가 어딘지 몰라? 넌 현행범이야!'라고 하더군요. 3일 동안 구타하는데 제가 일부러 밥을 안 먹기도 했어요. 배고프면 맞는 게 덜 아플 것 같아서. 잠도 안 재우니까 결국 인정한 것이 '일본에서 학교 선배 만나서 돈 받고 간첩교육 받았다'고 했어요. 그 사람 이름이 '야마다'인데, 안 맞으려고 만들어 낸 이름이에요. 물론 일본에서 선배들은 만났지만 돈 받고 교육 받은 일은 없어요."

- 당시 한국과 일본의 공안기관이 공조하고 있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중정에서도 확인을 했을 텐데, 재판 받을 때 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려고는 했죠. 첫 재판 가보니까 어마어마한 사건이 되어 있어요. 저와 공범이라고 일면식도 없는 한국인 1명과 재일교포 3명이 앉아 있더라고요. 북에 몇 번 갔다 왔다고 하는 주범이라는 사람 밑에 저를 하범(下犯)으로 붙인 거예요. 판사한테 '아무리 그래도 나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과 재판받아야 합니까?'하고 물었더니 아무 말도 없어요. 검사가 '같은 맥락에서 간첩활동 했다. 공범이다' 그러더군요. 재판하러 가면 방청석 뒤쪽에 고문한 수사관이 앉아서 '부인하면 다시 끌려가서 처음부터 조사받아야 한다'고 협박도 하고..."

- 변호사는 항의하지 않았습니까?
"정의감에 넘치는 인권변호사 몇 분이 우리 사건을 맡았는데, 그럴 수 있는 변호사가 몇 명 없었어요. 일본에서 형님이 오셔서 어렵게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이건 내 편이 아니라 완전히 체제 편이에요. 변호사한테 '고문 받았다. 공소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니까 변호사가 '그렇게 한들 아무 소용없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반성하고 모든 것을 인정한다고 해야 동정이라도 얻어서 형을 적게 받는다'고 하더군요. 어이가 없었어요."

- 그래서 변호사가 하자는 대로 하셨습니까?
"별 수 없었어요. 최후진술에서 '국내 사람하고 재일동포하고 같은 수준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공교육도 안 받았지만 공산주의 교육받고 그런 지향을 가지고 한 것도 아니다.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고만 했어요. 절망감이 들어서 다 포기하고 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가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뭘 항의해 봐야 아무 소용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다른 재일교포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상대해야할 권력은 너무 거대하고, 그 사람들이 마음먹으면 못하는 것이 없다... 물론 고문이나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건 알리려고 노력하긴 했지요. 그렇지만 6개월 동안 가족면회도 안 되고 있었고... 1심 구형 때나 되어서야 형님을 처음 봤으니까..."

어디에도 끼지 못했던 교포 2세의 삶

강종건씨는 1심에서 7년형을, 항소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잘못을 인정하고 선처를 빌면 가족 품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무너졌다. 고국에 유학가면 이런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없었을까? 그가 연루된 11.22 사건은 역대 최대 규모지만 그 전에도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이 여럿 있었다. 1971년 서승, 서준식 형제의 간첩단 사건이 터졌고, 1973년에는 최창일 간첩사건이 발표됐다. 1974년에는 고병택, 김영작 간첩사건, 최철교 사건, 김승효 간첩사건, 진두현 사건, 김달삼 간첩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 선생님이 유학 오시기 전에도 서승, 서준식 형제의 간첩사건 등 재일교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선생님도 혹시 유학을 오면 이런 일에 연루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서승, 서준식 형제 사건은 제가 동지사 대학에 다닐 때 있었던 일이에요. 교포들이 구명활동을 했었고 저도 열심히 참여했었죠. 알고 보니 서준식씨가 내 고등학교 선배더라고. 물론 실제로 만난 건 나중에 감옥살이 할 때지. 어쨌든 서승씨 사건은 상당히 충격적이었어요.(당시 서울대 유학생이었던 서승은 고문으로 인해 거짓자백을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난로를 껴안고 자살을 시도하다 얼굴과 몸에 큰 화상을 입었다-기자 말) 사실 한국에 오기가 무서웠던 건 사실이에요. 그래도 내가 재일교포로서 가지고 있는 문제가 일본에서는 해결이 안 되니까..."

재일교포로서 가지고 있는 문제. 강종건은 재일교포 2세의 전형적인 삶을 살았다. 일제시기 일본으로 건너간 부모님은 문화재가 많아 미국의 폭격을 피할 수 있었던 교토에 다른 동포들과 모여 살았다. 폐품 회수업을 하면서 공장 노동자에게 불법 밀주를 팔기도 하고 돼지도 키웠다. 가난 보다 힘겨운 것은 차별받는 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이었다. 운동을 잘했던 '어린 강종건'은 친구들에게 '나는 일본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했다가 들키기도 했다.

그가 민족 콤플렉스를 극복한 것은 고등학교 때다. 역사수업 시간에 일본문화가 한국에서 건너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민족'이라는 것이 가슴 속에 움텄다. 무엇보다 '우리 말'을 배우고 싶었다. 형들은 고리대금업을 하며 꽤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강종건은 "돈을 갚지 않으면 이불까지 빼앗아야"하는 그 일이 싫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대학이다. 일 년 재수 끝에 1970년 교토 동지사 대학에 입학한 강종건은 조선인들에게 법률적 도움을 주고 싶어 법학부를 선택했다. 그러나 귀화하지 않은 재일교포는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변호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했다. 물론 귀화하고 변호사가 된 재일교포도 있었지만, '철이 든' 그에게 국적문제는 민족문제였다. 국적포기는 도망이고 회피이자 '민족 허무주의'였다.

"당시에는 박정희가 10월 유신도 했을 때니까 유학을 생각하면 당연히 무서웠지요. 그래도 고국으로 갈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벅차 달까? 유학가서 변호사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당시 일본은 학생운동이 꽤 과격했을 때니까 나도 반독재가 뭔지, 맑스주의가 뭔지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내가 뭐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데모도 좀 했지만 구경하는 정도였고. 그래서 최소한 우리말을 제대로 배우고 사법고시도 볼 수 있겠다 싶었어요."

- 고국에 와서 동포애는 느끼셨습니까?
"글쎄요... 한국에서 우리말을 잘 못하는 교포들이 듣는 욕이 있어요. '반쪽바리.'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라고 차별받아서 도망 나왔는데... 그래도 여기는 조국인데, 여기서도 욕을 먹고. 내 영혼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것'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공포심이 있었죠."

- 그래도 다른 교포에 비해서는 말을 잘 하셨던 편이라고 들었습니다.
"일본에서 대학 3학년까지 다니면서 조선문화연구회나 한국문화연구회에서 한국말을 계속 배웠으니까 조금 했지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서 수업을 들으려니까 교수님 말은 통 못 알아먹겠더라고요. 그래도 일상적으로는 말을 잘하는 편이었어요. 한국 학생들도 인정해 줬고. 그런데 정보기관은 말 잘하면 의심하잖아요? 유학 와서는 데모는 해도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야기는 하면 안 되고, 과격 학생들과는 얽히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조심했는데 결국 일이 터진 거죠."

11.22 사건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 1975년 11월 22일자 기사. ⓒ 동아일보


"죽여도 좋다. 다 전향 시켜라" 폭력으로 강제한 전향공작

강종건은 최종심이 확정된 1977년 1월, 대전교도소에 입감된다. 이제 고문의 공포에서 벗어났을까? 그러나 그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고문과 폭력으로 점철된 '전향공작'과 '사회안전법'이었다.

- 구치소 생활은 어떠셨나요? 당시에는 사상범을 대상으로 한 전향공작이 매우 활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전향이 뭔지도 몰랐어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있을 때부터 '넌 간첩이니까 처벌받기 싫으면 간첩 잡아야 한다. 친구들 많잖아?'하는 식으로 협조를 요구해요. 무고한 사람들 잡아다가 간첩 만들 것이 뻔하니까 협조 못했지요. 1977년 1월에 재일교포 20여명이 대전교도소로 가자마자 구타가 시작됐어요. 수갑하고 포승줄 채우는 건 기본이고. 전향하도록 고통을 주라고 한 것 같아요.

대전교도소에서 충격을 받은 게, 교도소 안에 또 교도소가 있어요. 사상범을 모아 놓은 5사... 22개 반이 있었는데 완강하게 전향을 거부한 사람들이에요. 가서 보니까, 제가 태어날 때부터 거기서 사신 분들도 있어요. 그런 분이 한 두 명도 아니고 몇십 명이 있어요. 아주 좁은 방에서 수십 년을 산거예요. 너무 충격적이면서도 '난 언제쯤 나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암담합디다."

- 그 분들하고는 관계가 어떠셨습니까?
"한번은 제가 통방(교도소에서 옆방의 사람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하는 것-기자 말)했다고 교도관이 묶어 놓고... 통닭구이라고 하지요? 긴 나무 봉에 통닭처럼 매다는 거... 그렇게 하면서 엄청나게 때렸어요. 그러다가 한 두 시간 정도 지나니까 또 때리고. 당시 교도관들이 악질이었어요. 전향시키려고 툭 하면 두들겨 패고. 그런데 한 50세도 넘어 보이는 어떤 자그마한 분이 교도관한테 막 대드는 거예요. '통방했다고 고문하고 때리냐'고. 교도관이 그 분을 두들겨 팼는데, 이 분이 쓰려지면서도 다시 일어나서 막 따지는 거예요. 계속 맞아서 나가 떨어져도 또 일어나고...

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그분한테 너무 미안했는데... 이게 전쟁이 된 거예요. 다 단식투쟁 들어가서 교무과장, 보안과장, 소장 면담 하고... 일주일을 굶으니까 결국 우리가 이겨서 그 교도관이 교체됐어요. 이게 교도소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눈치나 보면서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싶을 때 그런 일이 생긴 거죠."

당시 교도소 생활은 중앙정보부 지하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유신 선포 이후 감옥 안의 양심수들에 대해 가혹한 전향공작에 착수했다. 비전향자와 폭력배를 한 방에 가두기도 했고, 구타는 물론 바늘로 찌르기 등 온갖 고문과 폭력을 가해 사망자도 발생했다. 1975년에는 '사회안전법'을 제정해 형이 만료된 비전향 양심수도 검사의 판단으로 2년 마다 한 번씩 보안감호 처분을 갱신할 수 있게 해 사실상 무기수로 만들었다.

강종건을 때리던 교도관에게 얻어맞으면서도 끝까지 항의하던 '50세 정도 먹은 자그마한 사람'은 세계 최장기수 기록으로 남아 있는 김선명씨였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20대 중반의 나이에 인민군으로 체포된 그는 1995년에서야 감옥문을 나설 수 있었다. 강종건에게 김선명의 저항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 교도소에 계실 때 그런 폭력이 계속 됐나요?
"박정희 정권이 유신 이후에 전향을 거부한 사람들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죽여도 좋다, 다 전향시켜라'한 것이죠. 그게 전향공작반이에요. 전향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요. 1973,1974년이 가장 심했다고 하더군요. 전국 좌익수를 모두 대전교도소에 모아 놨는데 그 수가 7~8백 명 규모였답니다. 그런데 전향공작이 시작되고 300명 정도로 줄었어요. 그 과정에서 전향을 거부한 어른 두 명이 돌아가시니까 중단됐다고 하더라고요."

- 선생님은 11.22 사건 관련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전향서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1978년에 전주교도소로 이감을 갔는데 거기 교무과장이 악질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어요. 전향공작 하면서 여러 사람 죽였다고 하더라고. 그때 보안과, 교정국, 안기부에서 전향서 안 쓴 사람 10명을 뽑아서 집중적으로 고문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저도 거기에 포함됐어요. 제일 먼저 끌려간 사람이 탁아무개씨라고 남파 공작선 갑판장이었던 사람. 3일 동안 계속 고문하니까 3번 기절했는데, 기절했을 때 전향서에 강제로 도장을 찍었다더라고. 그 뒤로 8번째까지 다 전향시켰고, 내가 9번째인가 10번째였어요. 저도 언제 끌려가서 고문 받을지 모르니까 깡통으로 칼을 만들어서 숨겨 놨었어요. 못 견디면 손목이라도 긋겠다고.

그런데 사건이 터진 거예요. 탁씨가 '기절한 상태에서 전향서에 도장찍은 건 무효'라면서 자결을 했어요. 그런 일이 생기니까 고문이 중단되었어요. 게다가 저는 재일교포이고 국제적인 구명 운동도 있었으니까 혹시 잘못되면 큰일 난다고 본 것 같아요. 탁씨 소식 듣고 저도 단식 투쟁 하면서 소장 면담 요구하고 '이런 법이 어디 있냐, 양심을 고문으로 꺾는 게 말이 되냐'고 죽을 각오를 하고 항의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모든 것을 짓밟아 버리는 폭력에 수긍하고 꺾여서 전향서에 사인할 수는 없겠다 싶었어요. 탁씨 죽음을 보면서 제가 바뀐 겁니다."

전향을 거부하고 자결을 선택한 탁씨를 보면서 강종건은 절대 전향서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예정대로라면 그는 1982년 석방되어야 했지만, 전향을 거부한 이에게 보안감호처분을 내리는 사회안전법 때문에 석방이 금지되었다. 5년 형을 받았지만, 전향을 거부하는 한 무기수였다. 종이 한 장에 사인만 하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데 갈등은 없었을까? 그는 "그럴 때마다 탁씨 생각이 나서 차마 쓸 수 없었다"고 했다. 대신 그는 교도소 내의 불합리한 처우와 폭력에 항의하는 '투사'로 거듭난다. 다른 비전향 양심수에 비해 젊었기 때문에 앞장 설 수밖에 없었다.

재심에서 무죄... 그러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11.22 사건을 발표하고 있는 김기춘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었던 김기춘은 11.22사건을 직접 발표했다. 그는 뉴스타파의 당시 사건 취재와 관련해 "기억이 없다"고 변명했다. ⓒ 뉴스타파 화면 캡쳐


사회안전법으로 감호 처분이 한 번 갱신된 후, 그는 행정소송을 제기한다. 질 것으로 예상했고, 고법까지는 졌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사건이 터졌다. 당시 이일규, 이회창 대법관이 "계속 잡아두어야 할 현저한 위험이 있다고 할 수 없다"며 파기 환송한 것이다. 결국 고법에서도 승리하자 집에 갈 생각에 들떠 갖고 있던 물건들도 모두 나눠줬다. 그러나 그는 결국 보안감호소 문을 나서지 못했다. 법무부장관이 다시 소송을 건 것이다.

그가 보안감호소를 나오게 된 것은 순전히 88올림픽 때문이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내 양심수 문제가 여론화 되자, 미국이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결국 정부는 강종건씨가 제기한 행정소송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그를 석방시킬 수밖에 없었다. 보안감호소를 나오자마자 그가 한 일은 함께 나온 서준식씨를 만나 '사회안전법 폐지 운동'을 벌이는 것이었다. 결국 사회안전법은 1989년 10월 폐지되었다.

- 석방되고 일본으로 돌아가실 생각은 안하셨습니까?
"석방되면 일본으로 강제 추방 시킨다는 말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건 아니다, 한국에서 투쟁도 하고 민주화에 기여도 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족을 보러 일본에 가고 싶기도 했지만 한 번 가면 다시 못 들어올 것 같다는 생각에 떠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빨리 결혼을 하려고 했지요. 결혼하면 '부부 사이를 떼어놓을 수 없다'고 추방은 못시킬 테니까."

강종건씨는 2011년에야 재심을 청구했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서 11.22 사건의 진실이 알려지고 나서다. 2014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얻어냈지만 민사소송은 지체되고 있다. 정부는 잘못된 판결로 인한 5년 옥살이에 대한 배상은 인정하고 있지만, 사회안전법으로 인해 갇혀 있던 8년의 시간은 배상할 수 없다며 버티고 있다. 전향을 거부해서 못나온 것이기 때문에 국가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다. 폭력으로 사건을 조작하고 양심을 꺾으려 했던 국가는 여전히 반성을 모른다. 

- 민사소송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배상을 받으시면 뭘 하실 건가요?
"제일 하고 싶은 것이 재일교포의 귀화를 막는 거예요. 재일교포 3, 4, 5세가 되면 귀화해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30년 뒤에는 재일교포 자체가 없어질 가능성이 높아요. 재일동포들도 귀화하지 않도록 우리 식으로 민족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제도적인 차별 속에서도 자기국적, 민족적 양심을 지키면서 살았는데 후예들은 인식도 없고 국적문제에 대한 인식도 없는 것 같아서 가슴 아파요. 그래서 연구소를 하나 만들어 보려고 해요."

강종건씨가 건네 준 명함에는 '재일동포문제연구소'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연구소지만 배상금을 받으면 꼭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명함을 먼저 팠다. 꿈에 그리던 고국은 그를 간첩으로 만들어 감옥으로 내쳤지만, 그는 여전히 조국과 민족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고문하고 감옥으로 보냈던, 심지어는 사람의 목숨까지 스스로 끊게 만들었던 이들은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을까?

11.22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었던 김기춘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기춘은 박근혜 정부의 바로 직전 비서실장이자 노태우 정부에서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다. 11.22사건을 비롯한 공안 사건의 '성과' 덕분에 탄탄대로를 걸었다. 검찰총장으로 재직하던 1990년, 그에게 수여된 5.16민족상의 수상 이유는 이렇다.

김기춘 검찰총장은 61년 검찰에 투신한 이래 각종 범죄와 부조리척결에 모범을 보인 것은 물론, 공안사범 등의 수사에 헌신, 자유민주 체제수호와 국가안보에 이바지해왔다. 특히 70년대 중반 이후 급증한 북한의 우회침투간첩 색출에 수사력을 집중, 75년 국내대학 유학생으로 위장 침투, 학원 시위를 배후 조종한 재일교포유학생 간첩단 19명을 검거하고 77년에는 재일교포간첩 강모 등 지금까지 간첩 58명과 반국가안보위해사범 2백40명을 검거, 북한의 대남공작역량을 분쇄하는 데 공헌해 왔다.<경향신문 1990.05.03.>

- 11.22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었던 김기춘씨 작품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때는 몰랐지요. 나중에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김기춘씨가 비서실장이 되면서 무슨 무슨 일을 했다고 기사에 나온 걸 보고 알았지요. 그때 CCTV를 보면서 수사관들에게 지시내리고, 고문도 지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수사방향도 지시하고."

11.22 사건을 다룬 뉴스타파의 <조국이 버린 사람들>에서 김기춘은 "오래돼서 기억이 없다", "수사한 일은 없다"는 변명으로 일관한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사라진 현실은 오늘날 데자뷰로 재현된다. 잊혀졌던 '내란'이 재등장했고 간첩조작, 정치공작의 용어도 되살아났다.

-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왜 일본에서 잘 살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상처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독재정치가 도사리는 고국으로 왔을까요? 국내 학생들이 목숨 걸고 데모하고 투쟁했던 생각과 재일동포들이 조국에 와서 느꼈던 심정은 똑같았어요. 양심을 지키기 위해 그 오랜 시간을 갇혀 지낸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나름대로는 민주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 때문이었어요. 국내에서 운동하는 분들에게도 인정받고 싶고, 올바른 평가도 받고 싶어요. 일부에서는 재일동포 간첩사건 때문에 국내 민주화 운동에 피해만 줬다고도 하는데, 재일동포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보기관이 이용해 먹은 거예요. 우리가 얼마나 억울하게 당했는데..."

40년 전, 민족을 가슴에 품고 고국 땅을 밟았던 20대 청년에게 조국은 고문과 간첩조작의 굴레를 씌웠지만, 그때의 청년은 지금까지도 조국과 민족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가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조국은 예나 지금이나 고문으로 간첩을 만든 사람들이 떵떵거리는, 그런 조국은 아닐 것이다.
덧붙이는 글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에서는 오마이뉴스와 함께 우리 역사속에서 국가권력을 이용해 간첩조작, 학살, 내란, 부정선거를 저지른 '반헌법 행위자'를 기록하려는 "반헌법행위자를 찾아라,웹 컨텐츠 공모전"을 개최합니다. 6월 17일 자정까지 형식에 상관없이 창의적인 웹 컨텐츠를 보내주십시오. 자세한 사항은 http://findbadmen.com/220696900779 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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