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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남매 두고 결혼식 올린 어머니... 오래 사세요!

가정의 달 5월에 불러보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명까지 오래오래 사세요"

등록|2016.05.14 11:38 수정|2016.05.14 11:38

▲ 사람은 나이를 먹었지만 고향집에 핀 풀꽃은 어린시절 그대로다. ⓒ 심명남


"저 건너 형오가 꽃을 달아주고 간다야..."

어버이날,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일곱 자식에게도 받지 못한 카네이션꽃 한 송이에 감동하셨나 보다.

경기도 성남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후배는 어버이날을 맞아 고향을 찾았다. 카네이션 세 송이를 사온 후배. 한 송이는 그의 모친에게, 다른 한 송이는 부친 산소에 그리고 마지막 한 송이는 숙모라고 불렀던 우리 어머니에게 달아주었다.

후배는 한때 모친의 젖이 부족해 우리 어머니 젖을 먹고 자란 어린 시절이 있었다.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속담이 이런 때 쓰는 모양이다. 꽃 한 송이 달아준 후배가 일곱 자식보다 났다. 아련한 고마움이 밀려왔다.

작은 꽃 한 송이에 어머니는 '감동'

▲ 7남매를 키우신 어머니는 아버지 없는 결혼식장에서 일곱번을 울었다. ⓒ 심명남


가족의 소중함이 더 절실한 계절 5월이다. 블로그에서 읽은 내용이다. 직장인들이 가정의 달 5월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 1위로 '각종 선물과 용돈 등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을 꼽았단다.

또 화목한 가정을 위해 꼭 필요한 조건 1위는 '관심과 대화,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돈과 물질을 최고의 선(善)으로 삼는 현대인들에게 가족의 의미에 대해 한번쯤 되새겨야 할 문구다.

올 어버이날은 유난히 긴 연휴가 겹쳤다. 민박을 하는 어머니는 요즘 바쁘다. <아빠 어디가>에 이어 <불타는 청춘> 메인세트장이 된 우리 집에 밀려든 예약손님 때문이다. 이런 관계로 형제들은 올 어버이날을 제때 못 챙겼다. 다들 바쁘고 섬이라 동선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연휴가 끝나면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며칠 전 홍성에 사는 남동생네가 어머니를 찾아뵙고 갔다. 늘 제수씨가 고마울 따름이다. 나 역시 전날 일을 마치고 배를 타고 섬집으로 향했다. 밤에 급히 가느라 그 흔한 카네이션도 준비를 못했다. 섬에 내려오지 말라던 어머니는 아들과 손자가 오자 마냥 기뻐했다.

외동딸로 태어난 어머님은 젊은 시절 백바지에 노란셔츠를 입은 아버지에게 반해 섬에서 섬으로 시집을 왔다. 그 당시 가난한 살림으로 결혼식은 꿈도 못 꿨다. 둘은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천지신령님께 빌었다.

"천지신령님! 우리 부부 무탈하게 아들 딸 많이 점지해주소서."

할아버지에게 숟가락 하나도 물려받지 못한 아버지 탓에 섬에서 셋방살이 신혼집을 차렸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직접 벽돌을 찍어 방 두 칸짜리 집을 지었다. 이곳에서 자식 7남매를 낳아 키웠다.

한때 동해로 오징어잡이를 간 아버지가 납북되는 바람에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모진 삶을 견뎠다. 이후 몇 년 만에 아버지가 송환됐다.

7남매 둔 중년 부부의 특별한 웨딩마치

▲ 어버이날 여수에서 배를 타고 고향에 갔다. 이미 해가 저물어 밤이 고요한 가운데 달빛에 비친 고향집의 모습 ⓒ 심명남


또 하나뿐인 막내 삼촌의 죽음은 가장 큰 슬픔이었다. 장어잡이 배 선장이었던 삼촌은 태풍을 만나 풍랑사고로 배가 침몰했다. 어릴 때 용돈을 잘 주시던 삼촌이었기에 지금도 삼촌 모습이 아련하다.

이후 어머니는 장어가 동생을 잡아갔다며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그 좋아하던 장어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아버지는 결혼식을 올렸다. 혼인신고만 하고 살아온, 자식 일곱 둔 중년 부부의 웨딩마치는 이맘때쯤 5월로 기억된다. 고기를 잡아 여수로 팔러 나오신 두 분은 남부끄럽다고 친척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둘만의 조용한 결혼식을 했다.

▲ 어머니가 차려주신 고향 밥상. 반찬이 걸다. ⓒ 심명남


하얀 면사포와 양복을 입은 두분의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사진에 비친 모습은 세상 그 어느 결혼식보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제 좀 살만 하니 아버지는 55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어머니는 그때 나이 40대 후반이었다. 막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는 시기였다. 어디 혼자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마는 당시 재혼은 꿈도 못 꿨다.

어머니는 홀로 자식들을 다 출가시켰다. 아버지 없는 7남매 결혼식장에서 어머니는 일곱 번을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식된 도리로 어머니를 재혼이라도 시켜드렸어야 했는데 그리 못했다. 늘 안타깝고,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소원 이룬 어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 교회가는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로 자식들을 키우신 어머니는 이제 관절이 다 달아서 다리가 불편하다. ⓒ 심명남


주일이라 교회를 간다며 집을 나선 어머니가 다시 돌아왔다. 어머니 걸음으로 큰 동네까지는 50분이 소요되지만 배로 가면 5분 거리다. 배로 태워드리기로 했다. 선착장까지 함께 걸었다.

"엄니 우리 모자지간에 사진 한 컷 찍어요."
"사진은 무슨? 난 사진을 찍으면 눈이 감겨 짝눈이 되드라. 어제 도사님께 기 치료를 했더니 어깨와 다리가 한결 수월하다."

함께 동행한 도사님의 염력이 효염이 있었나 보다. 내가 사는 여수에서 섬까지는 먼 거리다. 하지만 고향에 오면 어머니가 있어 늘 마음이 편하다. 이사 가던 날 70살이 되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오겠다던 어머니는 그 소원을 풀었다.

시골에서 온 가족이 명절을 쇤 지 2년이 넘었다. 시골에서 특별한 명절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른다. 지금 어느 때보다 행복하신 어머니는 지병으로 고생이 많다. 이제 80, 90세까지 더 건강하고 아픈 데 없이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못 사신 명까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여수넷통> <전라도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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