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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마을 옛집굴뚝③] 곡성·구례·남원 마을(3) 구례 오미마을 옛집굴뚝

등록|2016.05.22 20:21 수정|2016.05.22 20:21
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운조루 안채동측 굴뚝사당으로 나가는 문 바로 앞에 있다. 안채 기준으로 동측외벽에 붙어 있다. 손본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아 보이나 운조루 굴뚝이 담고 있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 김정봉


'삼대삼미(三大三美)', 구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삼대'는 지리산, 섬진강, 구례들판을, '삼미'는 수려한 경관, 풍족한 곡식, 넉넉한 인심을 말한다. <택리지>에서도 '볍씨 한 말을 뿌려 예순 말을 거두는 곳이 기름진 땅인데 같은 양을 뿌려 140말을 수확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전라도 남원과 구례, 경상도 성주와 진주'라면서 구례를 가장 살기 좋은 땅 중에 하나로 꼽았다.

삼미로도 모자라 '오미'(五美)를 자랑하는 마을이 있다. 토지면 오미리다. 원래 이름은 오동(五洞)이었다. 1776년, 류이주(1726~1797)가 오미마을에 운조루를 짓고 들어오면서 오미리라고 했다. 현재 세 마을이 있다. 1500년경에 형성된 내죽(內竹)마을이 가장 오래됐고 하죽(下竹)과 오미마을이 영조이후에 이룬 마을이다.  

'금환락지(金環落地) 러시'

오미리에는 수백 년 전부터 '금환락지의 전설'이 떠돌았다. 선녀가 구름위에서 금가락지를 잃어버렸는데 그 반지가 묻힌 곳에 살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것. 토지면 오미리가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토지면(土旨面)은 화엄사에 도자기를 만들어 바치던 토지처(土旨處)였다는데 항간에 금가락지를 토한 곳이라고 해 토지(吐指)라 불렸다는 그럴듯한 얘기도 나돌았다.

이런 전설을 안고 오미리에는 역사적으로 '금환락지 러시'가 몇 번 있었다. 러시(rush)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골드러시'에 맞춰 붙여본 말이다. 1차 러시는 영조시대로 하죽마을과 오미마을 형성과 관련이 깊다. 영조 때 경주 이씨 이기명이 경주 최씨와 함께 금환락지 전설을 좇아 정착한 곳이 하죽마을이고, 류이주가 일가와 함께 풍수지리설의 금환락지를 찾아 머물러 산 곳이 오미마을이라는 것이다.

오미리에는 금환락지 전설과 함께 위에서 아래로 3개의 명당이 존재한다는 얘기가 떠돌아다녔다. 금거북이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금구몰니(金龜沒泥)가 맨 위 명당이고 중간이 금환락지(金環落地), 다섯 보석이 모여 있는 형상인 오보교취(五寶交聚)가 아래 명당이라는 것.

운조루를 지을 때, 애 머리만한 돌거북이 나온 사실을 근거로 금구몰니터는 이미 운조루가 차지한 것으로 믿고 나머지 금환락지를 찾아 이주해온 사람들로 1900년대 초 오미리 인구가 다시 급증했다. 2차 러시다. 운조루 앞 환동에 1929년 박승림이 건립한 박부잣집(현 곡전재)이 그 중 하나다. 금환락지처럼 보이기 위한 것인지, 둥그렇게 돌담을 쌓고 주변에 대숲을 만들어놨다.

곡전재 1929년 박승림이 건립하여 1940년 이교신이 인수한 집으로 금환락지처럼 보이기 위한 것인지, 호박돌로 둥그렇게 돌담을 쌓고 주변에 대숲을 만들어 놓았다. ⓒ 김정봉


곡전재 연못곡전재는 구례군향토문화유산으로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정원을 잘 꾸며 놓아 한번 들러볼만하다. ⓒ 김정봉


무라야마가 쓴 <조선의 풍수>에서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금내리 및 오미리 일대에 1912년께부터 이주자들이 모여들었다. 충청남도, 전라도, 경상도 각처에서 꽤 지체 높은 양반까지 와서 집을 짓기 시작하여 1929년에 이주해온 집이 일백여 호에 달한다. 계속 증가추세에 있다."(운조루 누리집 중에서)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운조루에 기거하던 200명가량의 하인들과 운조루 주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떠나자 오미마을 형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운조루와 박부잣집(곡전재) 그리고 운조루 주변 몇 채만 남아 마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운조루 옆에 행복마을(2010년, 한옥 24세대)이 조성되면서 다시 인구가 늘고 있다. 최근 4년, 구례 전체 인구는 줄어든 반면 토지면 인구는 75명 증가했다. 금환락지는 아닐지라도 물 좋고 산 좋고 들 좋은 '신금환락지'로 몰려든 것이다.

오미 행복마을지리산이 뿌리고 섬진강이 낳은 ‘구만들’을 배경으로 최근 운조루 서쪽 오미마을에 행복마을이 들어섰다. 어찌 보면 금환락지를 찾아 오미리에 들어오는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 모른다. ⓒ 김정봉


오미마을 운조루

대구에서 태어난 류이주가 맏형 류이혜와 사촌동생 류이익, 조카 류덕호와 함께 1776년(운조루 상량식 기준), 오미마을에 정착했다. 잠깐 머물다 떠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집주인은 여기에 터를 잡고 영세세거지로 삼으려 했다. 1400평대지, 건평 273평, 85칸 거대한 집, 운조루가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운조루와 큰사랑마당 굴뚝큰사랑채와 중간사랑채 기단이 만나 ‘ㄱ’자로 꺾이는 곳에 기단굴뚝이 있다. 대구출신 류이주가 외지에 들어와 영세세거지로 삼으려 했으니 이웃과 관계를 중요시 할 수밖에 없다. 굴뚝은 낮게 숨겼다. ⓒ 김정봉


'구름(雲)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새(鳥)는 지치면 돌아올 줄 아는 구나.'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절구로 운조루(雲鳥樓) 이름은 예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돌아가 쉬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 담겨있는 듯하다.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돌아가려는 생각, 진(進)이 아닌 귀(歸)의 철학이다. 귀는 사람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웃과 관계를 중시하고 더불어 사는 상생을 하려는 생각이다. 

그 생각이 함축돼 있는 것이 운조루 '타인능해(他人能解)' 뒤주다. 큰사랑채와 중간사랑채 사이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어둡고 좁은 공간에 놓여있다. 타인능해, 누구나 열 수 있고 항상 열려있다는 의미다. 적극적 배려, 나눔이다.

‘타인능해’ 뒤주외지에서 온 류이주, 이웃과 관계를 좋게 하고 상생을 통한 영세세거를 꿈꾸었다. 그 생각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타인능해 뒤주다. ⓒ 김정봉


다섯 마당에 숨은 '일곱 난장이'

마당을 중심으로 운조루는 대문바깥마당, 큰사랑마당, 안채마당, 큰사랑뒷마당, 부엌마당, 안채뒷마당으로 나뉜다. 이 집 굴뚝은 모두 낮아 지붕처마를 넘는 굴뚝은 없다. 일곱 난장이마냥 마당마다 일곱 개 굴뚝이 숨어 있다. 어렵고 배고프던 시절, 이웃이 밥불 연기로 허기를 느낄까봐 연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한 집주인의 고운 마음씨, 배려다. 뒤주가 나눔이라면 운조루 '난장이굴뚝'은 배려다.

대문바깥 굴뚝운조루 솟을대문 서쪽에 있는 굴뚝으로 키 작고 투박하여 오는 이를 위압하지 않는다. ⓒ 김정봉


맨 먼저 눈에 띄는 굴뚝은 대문 옆 굴뚝. 어른 무릎높이만 할까, 아주 낮은 굴뚝이다. 크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고 투박해 처음 오는 사람이라도 낯설고 서먹해 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나 눈치 보지 말고 집에 들어오라는 얘기다. 대문 안 큰사랑마당에는 큰사랑채가 북쪽에, 중간(아래)사랑채가 동쪽에 있다. 큰사랑과 중간사랑채 기단이 만나 'ㄱ'자로 꺾인 곳에 굴뚝이 숨었다. 기단굴뚝, 가래굴이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안채에 들어와도 굴뚝은 보이지 않는다. 굴뚝은 숨어있지 없지는 않을 터, 습관적으로 기단구멍을 찾았다. 역시 안채기단에 납작돌 하나 들어갈 정도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다. 운조루 종부 할머니께 말길을 틀 겸, 확인 차 물어봤는데 사전에 뭐 이런 것도 공부 안 하고 왔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굴뚝을 확인해줬다. 이 정도는 묻지도 말라는 심산이다. 안채굴뚝은 타인능해 뒤주와 함께 운조루 상징이 돼가고 있었다.

안채굴뚝기단에 연도(煙道)를 만들었다. 기단굴뚝, 가래굴이다. ⓒ 김정봉


집 지을 때 돌거북이 나왔다는 안채부엌은 큰사랑뒷마당과 연결된다. 여기에 화단과 함께 굴뚝이 있다. 이 집에서 제일 키 큰 굴뚝이다. 짐작하겠지만 높아봤자 지붕처마에 닿지 않는다. 큰사랑뒷마당 담 넘어는 부엌마당이다. 큰사랑채에 딸린 온돌방이 부엌마당으로 연결돼 있다. 이집에서 제일 구석에 있는 방으로 서고와 공부방으로 이용됐다. 공부방이었으니 불기운을 가장 줄였을 가능성이 크다. 굴뚝도 이에 어울리게 아주 작게 만들었다.  

큰사랑뒷마당 굴뚝 안채부엌은 큰사랑뒷마당과 연결된다. 어두운 부엌에서 보면 화단과 키 작은 굴뚝 풍경은 물 많이 섞은 맑은 수채화 보는듯하다. ⓒ 김정봉


부엌마당 굴뚝큰사랑채에 딸린 온돌방이 부엌마당에까지 나와 있다. 서고 겸 공부방이다. 공부방이니 불기운을 작게 했을 터, 굴뚝 또한 조그맣게 만들었다. ⓒ 김정봉


안채동쪽은 사당이 있다. 안채벽과 사당 서쪽담 사이에 두 개의 굴뚝이 있다. 북쪽 안채에 딸린 굴뚝은 어른 허리높이로 암키와와 와편으로 점선무늬를 놓았다. 다른 하나는 사당으로 나가는 문 바로 앞에 있다.

수키와 다섯 개와 암키와 한 개를 사용하여 만든 굴뚝이다.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다스 베이더'와 인상이 비슷하다. 왠지 사당을 지키는 귀면(鬼面) 같아 보인다. 손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보이나 운조루 굴뚝 철학을 그대로 담고 있다.

운조루 굴뚝에서 찾은 일곱 개 굴뚝은 모양과 크기가 다 다르나 크지 않고 지붕처마를 넘지 않는다. 집주인의 고운 마음씨, 배려다. 집주인은 뒤주의 나눔과 굴뚝의 배려, 상생을 통해 자손만대 영세세거지의 꿈을 이루려 했는지 모른다. "우리 마을사람들은 항상 나누길 좋아하고 또 나누면 돌아오는 것을 알고 있어요"라고 한 어느 귀농한 노부부의 말이 떠오른다. 나누면 돌아온다는 생각, 그게 운조루의 정신이다.
덧붙이는 글 4월 17일부터 4월 19일까지 현장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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