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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의 문제"

[원불교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참관기①] 종교·문명의 대전환과 큰적공

등록|2016.05.18 14:53 수정|2016.05.18 14:57

원불교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안내 자료학술대회 안내 프로그램 자료의 표지 ⓒ 김병하


2016년 올해는 우리나라 4대 종교의 하나인 원불교 개교(開敎)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종교·문명의 대전환과 큰 적공'(Great Transformation in Religion·Civilization and Great Accumulation of Merit)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가 지난 4월 28일부터 30일까지 원불교 중앙총부 반백년기념관과 원광대학교 숭산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나는 이 학술대회에 공식 초청을 받지 않았으나, 소태산 박중빈(朴重彬, 1891~1943) 선생에 대한 관심이 발동해 이 대회에 참여하기로 했다.

지난 4월 28일 당일 아침 일찍 경산에서 집을 나서서 대구서부정류장에서 8시 40분 발 전주 경유 익산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좌석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고, 함양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약 3시간 만에 도착하였다.

익산 시외버스정류장에서 간단히 점심을 챙겨 먹고 택시로 10분 남짓해서 행사장에 여유 있게 도착했다. 접수를 하고 흰 무명 손가방에 든 두터운 자료집을 받아들고 안내요원에게 숙박 안내를 문의하니 발표자 등 공식 초청멤버가 아니면 숙박안내는 따로 해주질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외지에서 참석하여 이곳 사정을 잘 모르니 안내해 줄 수 없겠느냐고 물으니, 무슨 호텔 이름을 말해주기에 안내 전화번호를 받아 숙박예약을 해두었다.

소태산 박중빈(1891-1943)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 인물사진 ⓒ 김병하

학술대회는 예정대로 오후 1시부터 개회 겸 첫 번째 기조 강연으로 김도종(원광대 총장)의 '원불교 100년, 이 시대 한국에서 새로운 역사 만들기'라는 발표로 시작되었다. 이 발제에서 "왜 지금 동아시아, 한국에서 변혁을 말하는가?"라면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 동시에 교차하는 지역이 바로 이곳 한반도란다.

특히, 20세기 이후 '개벽사관'은 한국으로부터의 새로운 전환에 대한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김도종 총장은 21세기 문명사적 변혁의 표준으로 개별화(individualization), 지구화(globalization), 다원주의(pluralism) 혹은 통화적 다원주의(通和的 多元主義; organic harmonized pluralism)를 들었다. 이런 변혁시대에서 삶의 방식으로 경계허물기와 융합(breaking boundaries & convergence), 다중신앙(多重信仰; one person, multiple religions), 그리고 다중직업(多重職業; one person, multiple jobs)을 들었다. 이제는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한 가지 직업에만 종사할 수 없고, 세 가지 이상의 직업에 종사해야 100세 시대를 성공적으로 살아낼 수 있다고 보아 주목을 끈다.

두 번째 기조강연에서 백낙청(<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선생은 '문명의 대전환과 종교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대전환에의 요구' 진단에서 그는 자본의 끝없는 축적을 기본원리로 삼는 자본주의체제는 생명지속적인 사회와 장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류문명을 살리고 지구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대전환이 자본주의보다 나은 세계체제로의 이행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공허하다는 게다. 여기서 그는 종교의 역할과 '종교혁명론'을 제기한다. 19세기 중엽 이래 한반도에서 연이어 출현한 동학, 증산교, 원불교는 모두 '후천개벽'이라는 우주적 대전환을 표방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백낙청은 이 발제에서 '종교혁명'론의 한 방편으로 철학자·사회이론가·정치가로 활약해 온 Roberto M. Unger(웅거)의 '종교혁명'론과 '미래의 종교' 구상을 말한다.

그는 현존하는 세계종교를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분류한다. 그 하나는 베다(Vedas)철학과 불교가 대표하는 '세상을 극복(초월)'하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공자와 유교가 대표하는 '세상의 인간화' 경향이다. 마지막은 '세상과의 싸움'을 특징으로 하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 유일신 전통이다.

웅거에 의하면, 이들 종교(세 번째 부류의 종교)는 인격신이 우주를 주재하며 육신이 죽은 뒤에도 영혼이 살아남는다는 식의 '안심용 형이상학'(feel-good metaphysics)에 의존하여 거짓된 위로를 제공하는 폐단이 가장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육신을 지닌 초월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잘 어울리는 세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세상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인간과 세계의 동시적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세 흐름 중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한다.

백낙청은 유일신교가 대표하는 흐름과 이를 계승한 세속적 운동들에 비해 불교가 역사의 결정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미흡하고 사회변혁의 의지가 덜 뚜렷하다는 웅거의 지적은 경청할 만하지만, 원불교는 조선시대 말기 이래의 '후천개벽'사상을 계승함으로써, '세상과 맞서 싸우는' 종교의 성격을 강화했다고 본다.

특히, 개교 표어에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것은 물질개벽이라는 '시대현실의 도전에 부응하는' 정신의 개벽을 이룩하자는 원불교의 현실인식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물질개벽과 정신개벽에서 '물질 대 정신'에 대한 우리의 사고가 어느새 서양철학의 이분법에 물들기 쉬운 것을 경계한다. <대종경> 서품 5장의 "사람은 만물의 주인이요, 만물은 사람의 사용할 바"라는 말씀은 물질생활의 향상과 더불어 윤리와 교육문화도 강화하자는 제안이다. 그는 정신개벽운동의 주체로서 교단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기조강연을 맺는다.

"불교의 가르침과 한반도가 낳은 후천개벽사상을 융합한 정신개벽운동은 대전환의 대적공을 주도할 잠재력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믿습니다. 아니, 전환과 공적이 둘이 아니며 개개인의 정신개벽 자체가 큰 적공이자 대전환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원불교가 일원대도(一圓大道)와 삼동윤리(三同倫理)의 가르침을 따라 이 큰 사업에서 자신의 선도적 몫을 감당해주기를 기원하면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이 발제에서 백낙청 교수는 원불교의 정신개벽운동이 대전환의 시대에 세상을 새로 여는 개벽운동으로 이어지기를 염원하고 있다.

세 번째 기조강연은 돈 베이커(D. Baker,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의 '20세기 한국종교의 전환을 이끈 원불교'라는 주제로 이어졌다. 그는 <한국인의 영성>(Korean Spirituality, 박소정 옮김, 2012) 원저자로 이미 우리나라에 꽤 알려진 한국학 전공 외국인 교수다. 이번 기회에 나는 그의 저서를 바로 구입하여 읽어봤다.

외국인 학자로서 한국사상과 여러 종교들에 대한 균형적 분석이 돋보이기는 했으나, 그 깊이에서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기조강연에서 그는 영어로 발표를 하고 동시통역을 해주었으나, 통역 자체가 미진한 터여서 전달에 한계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한국사가로서 소태산의 원불교에 매료되었다고 고백한다.

베이커 교수는 원불교의 출현과 관련해서 한국 고유의 신종교로서 동학의 영향과 증산교(강증산, 1871~1909)의 영향에 주목하고 있다.

베이커는 한국에서 불교의 현대화에 원불교가 미친 영향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그는 소태산이 불교의 한국화와 현대화를 위해 한글 경전을 보급한 것, 여성신자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아닌 게 아니라 원불교는 오늘날 한국에서 여성 성직자가 남성 성직자보다 더 많은 유일한 종교단체다. 그는 소태산이 제기한 근대 종교공동체의 특징으로 그 실천성(practicality)에 주목한다. 소태산이 대각을 이룬 후 맨 처음 했던 일 중에 저축조합을 설립하여 버려진 갯벌을 농토로 활용하기 위해 개척사업을 벌린 것을 예로 들면서,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 외에 종교지도자가 이런 실천적 기획을 실행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했다.

끝으로, 역사가로서 베이커는 한국의 동료 역사가들에게 소태산과 원불교를 주의 깊게 살펴 볼 것을 촉구한다. 그러는 가운데 한국이 20세기에 어떻게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룩했고, 어떻게 한국이 오늘의 모습으로 변모되었는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 했다. 이처럼 그는 한국불교의 현대화 과정에서 원불교의 종교 현대화에 주목한다.

약 15분간의 휴식 후에 종교 세션의 기조강연으로 한자경(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는 "각자위심(各自爲心)에서 일원일심(一圓一心)으로: '두렷하고 고요한 마음'의 회복을 통한 '정신개벽'의 길"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해주었다. 지금은 동학에서 후천개벽의 시대도래를 말 한지 150여년,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나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정신개벽'을 내건지 100년이 지났다. 그사이 후천개벽 시대는 도래 했는가? 물질개벽은 완성되고 정신개벽은 시작되었는가? 라고 묻는다. 한자경 교수는 정신수양은 곧 정신개벽이라고 보고, 그것은 한 마디로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의 양성'이랬다.

여기 '각자위심'의 현대사회는 분별에 입각한 경쟁사회, 허망분별의 표층의식 망상에 따라 '깨어 있음 = 대상의식', '마음 = 의식'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하여 표층의식에 대응하는 '심층의식'을 밝히는 것이 분별적 각자위심을 넘어서는 정신개벽의 길이 된다는 게다. 이 대목에서 나는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교수가 표층종교에 대응하여 심층종교를 제기한 것을 상기한다.

<원불교전서>에는 정신개벽의 길을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의 회복'으로 보았다. 여기 '두렷하다'는 것은 마음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는 것이며, '고요하다'는 것은 마음이 대상을 좇아 분주히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는 마음의 깨어있음을 '성성(惺惺)'이라 하고, 대상을 좇아 분주하지 않은 고요함을 '적적(寂寂)'이라 한다. 두렷하고 고요한 마음은 곧 '성성적적'의 마음이다. 또한 '성성적적'의 마음은 곧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이고, 그것은 불이(不二)의 마음이다. 그러면 의식의 허망분별을 넘어선 불이(不二)의 마음을 어떻게 나의 마음으로 확증할 수 있을까? 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빛이 새어들어 오지 않는 깜깜한 방에서 문득 눈을 떴다고 해보자. 전체가 암흑이니 눈을 떠도 보이는 것은 없다. 눈을 뜬 것과 감은 것이 차이가 없으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중략) 그러나 보이는 대상이 없는 깜깜한 암실이라고 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보이는 대상이 없어도 우리는 본다. 무엇을 보는가? 비어 있음을 본다. 비어 있음을 보기에, 그 안에 보이는 대상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소리 없는 적막을 듣기에, 그 안에 들리는 소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비어 있음(공)과 적막(적)을 보고 듣는다. 공적을 아는 마음활동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상이 없어도 깨어 있는 마음, 성성적적의 마음이다."(한자경, 2016, p.78).

공(空)인 마음이 스스로를 공으로 아는 마음은 '공적의 신령한 앎'이기에 '공적영지(空寂靈知)라 하며, 또 일체의 상(相)을 여읜 '성(性)이 스스로를 신령하게 아는 앎'이기에 '성자신해(性自神解)'라고 한다. 이 공적영지를 마음의 본래적 각성이란 의미에서 '본각(本覺)'이라 한다.

<수심결>에서 지눌은 공적영지의 마음이 곧 중생의 '본래면목'이며, 모든 부처와 조사가 전하는 법인(法印)이라 했다. 두렷하고 고요한 성성적적의 마음, 공적영지의 마음은 중생 누구나가 이미 가지고 있는 본래 마음이며, 이 마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수행의 궁극지점이란다.

분별의식보다 더 깊은 '심층마음'은 일체 분별적 이원성을 넘어선 마음이다. 여기 일체 분별을 넘어서는 것은 곧 상(相)을 넘어서는 것으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넘어서는 '불이(不二)의 마음'이다. 심층마음은 스스로를 한계가 없는 무한, 상대가 없는 절대로 자각하는 마음이기에 '무변'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원불교에서는 '일원(一圓)'이라고 부른다. 하여 각자위심을 넘어 '일원일심(一圓一心)'으로 나아가는 게 바로 '정신개벽'의 길이다.

이어 정치세션의 기조강연으로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교수는 "성장시대의 끝에서 민주주의를 생각한다"는 주제로 발표해 주었다. 이 발제 글은 미완성 원고라 했지만, 발표내용은 평소 그가 주장해온 대로여서 나로서는 듣기에 비교적 편했다. 내가 <녹색평론>장기 구독자여서 그럴 게다.

그는 인류의 파국적 상황을 가져다 줄 기후변화나 환경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점을 가장 인상적인 말로 표현한 인물로 전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의 퇴임직전(2015년 봄) 언론인터뷰에서 밝힌 말에 주목하고 있다. 즉, "오늘날 환경위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통치(governance)의 위기입니다"라는 말이다.

그 위기의 본질은 따지고 보면 곧 '자본주의의 위기'이다. 성장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징후들 가운데 그는 "장기적인 불황의 불가피한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실업률 상승, 구매력 부족, 투자위축 등은 불황의 심화로 이어지면서 결국에는 심각한 디플레이션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게다. 이것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수명이 끝나고 있다는 신호이다. 그는 미국의 역사학자 월터 프레스콧 웹이 <거대한 프런티어>(The Great Frontier, 1952)에서 지적한 것처럼 식민지 개척의 '프런티어'가 사라진 시대 이후의 자본주의 위기에 주목한다. 

김종철 교수는 에너지 문제의 위기와 그에 따른 경제성장 한계에 주목한다. 최근 국제 원유가격이 갑자기 폭락하는 사태가 발생하긴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제정치의 알력, 대립, 책략에 기인한 일시적 이상 현상이지 결코 석유의 안정된 공급 가능성을 알려주는 사태가 아니란다.

그는 오늘날 경제성장을 불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 환경위기, 그중에도 기후변화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한다. 지금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가장 나쁜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사태를 막아보려는 정도의 시도, 즉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혁명 초기보다 섭씨 2도를 넘지 않도록 이산화탄소와 온난화 가스방출을 억제하자는 정도다.

그런데 이 정도의 이산화탄소의 수준을 지키려면 지금부터 지구 땅속에 매장되어 있는 모든 화석연료는 손대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둬야한다는 게 독립적인 과학자들의 견해란다. 이 '황당한' 주장은 기후변화 문제가 얼마니 심각하고 엄중한가를 우리들에게 말해준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제부터 이산화탄소 방출을 대폭 줄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경제성장'이라는 것은 장구한 인간역사에서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지속된 예외적인 사태였다는 게다. 그에 의하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이 사라진 이후의 사회를 어떻게 지혜롭게 구상하고 만들어 가느냐다.

그럼 어찌할 건가? 결론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공유재'를 구성원들이 공평하게 나누고, 상호협력과 부조를 통한 '공생의 삶' 이외에는 해답이 없다는 게다. 이제 우리는 '국가'가 무엇인지 다시 정의 내려야 한다. 근대 국민국가는 대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들이 사회계약을 통해 공익을 구축한 공동체, 즉 '공화국'(Republic)이다. 공화국이란 한마디로 개인이나 소수그룹의 사유재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에 귀속된 공공재(commonwealth)라는 뜻이다.

우리는 '공유재'라고 하면 쉽게 토지를 떠 올리지만, '사회적 공통자본'도 결국 공유재이므로 가령 철도, 도로, 항만, 공항, 가스, 전기, 통신, 문화예술, 의료와 교육은 물론 국가의 정치 및 행정과 사법체제, 군대와 경찰, 미디어 등도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말하자면 이러한 공유재 운영을 통해 나오는 이익은 마땅히 공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게다. 이런 공유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로 그는 현행의 금융화폐제도에 주목한다. 화폐는 본래 공동체의 경제활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 고안된 교환 수단인데, 이것이 자본주의 전개과정에서 사적이득을 취득하는 수단이 돼버렸다는 게다.

은행이 자신의 금고에 들어 있는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대출형식으로 발행할 수 있게 허용하는 이른바 '부분준비제도'의 함정이 문제란다. 이로인해 오늘날 실질적인 화폐발행 주체는 시중 은행이지 국가도 중앙은행도 아니라는 게다. 게다가 근대 금융화폐제도는 강박적으로 경제성장을 강요한다.

따라서 해법은 지금과 같은 은행의 '부분준비제도'를 혁파하거나 사유화되어 있는 금융기관을 공유화하는 방법밖에 없단다. 결국, 활로는 공평무사한 합의적 의사결정구조인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뿐이라는 게다. 지금과 같은 허약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합의적 의사결정구조를 중시하는 강력한 민주주의가 그 대안이라는 게다. 그가 내린 마지막 결론은 간명하지만 지난한 과제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최량(最良)의 지혜를 발굴하는 방식, 즉 대화와 토론을 거쳐 최선의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틀을 구축하는 일이다. 사회 속의 최량의 지혜라는 것은 결국 진정으로 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집한 '집단적 지성'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그는 다시 무위당 장일순 선생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떠올린다. 발표 예정시간을 초과했지만 내용이 좋았다.

(☞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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