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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조지훈 기일, 친구와 떠난 즉석 여행

[원주나들이 18] 스승 조지훈 생가를 찾아서(1)

등록|2016.05.20 10:49 수정|2016.05.20 15:57

▲ 스승 조지훈 생가 호은종택 ⓒ 박도


스승의 기일

엊그제(17일) 아침 메일함을 열자 은사 조지훈 선생님 아드님(조광렬 선생)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즉석에서 조지훈 선생님이 소천한지가 48년이나 되었다고 애석한 마음을 전하자 곧 답장이 왔는데, 그날이 선생님 돌아가신 날이라는 회신이 왔다.  

나는 문득 그때가 되새겨졌다. 1968년 5월로, 대학 3학년 때였다. 그해 5월 19일, 고려대 소운동장에서 조지훈 선생의 영결식이 있었고, 그날 오후 경기도 마석 멧기슭에 안장되셨다. 벌써 선생의 전 생애와 맞먹는 48년이 지났으니 세월의 무상함이여!

나는 늘 선생의 생가를 찾아뵙는다는 생각을 가졌으나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불현듯 스승의 생가를 찾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경북 영양의 그 먼 산골마을을 혼자 가기보다는 벗과 같이 간다면 선생님도 더 반기실 것 같았다. 그래서 용인 수지에 사는 친구(민병기 창원대 명예교수)에게 의사를 물었다.

"뭐, 오늘이 지훈 선생 기일이라고? 그렇다면 오늘 당장 가세."

사실 나는 이번 주말이나 다음 주중 아무 날로 생각하고 전화를 했다. 그 친구의 제의에 그날 일정을 미루고 떠날 차비를 하고 나섰다. 영양의 주실마을 조지훈문학관에 대중교통으로 가는 지름길을 문의하자 일단 안동으로 와서 영양행 버스를 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원주에서 열차로, 그 친구는 성남에서 버스를 탄 뒤 2시 30분 전후로 안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했다.

원주역에서 출발하는 11시 43분 행 안동행 열차를 타고 신록이 풋풋하고 흐뭇하게 짙은 산하를 달리는데 스승님과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 어느 날 산책길에서(지훈 조동탁 선생) ⓒ 조지훈전집

지훈 선생과의 인연

고등학교 때 '승무'를 배우면서 경이로움에 빠졌다. 우리말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으랴. 시선(詩仙)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시를 토해낼 수 있을까.

마치 그윽한 한 편의 승무를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그런 가운데 선생을 처음 뵌 것은 고2 가을이었다.

그 무렵 학교(중동고) 문예반에서 문학 특강을 열었는데 시인 조지훈, 소설가 오영수 선생을 모셨다. 그때 지훈 선생은 '승무'시작 과정을 말씀했다.

선생은 이 한 편을 쓰기 위해 2년 남짓 시유(詩瘐: 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앓는 병)를 앓으면서 최승희 춤과 김은호 화백의 '승무도'를 감상하고, 수원 용주사로 달려가서 달밤에 승무를 보고서도 완성치 못했다.

그런 가운데 마침내 구황실 아악부의 '영산회상' 가락을 듣고야 비로소 이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었다는 산고(産苦)를 들려주셨다. 

그때 선생의 훤칠한 체구와 시원한 음성, 굵은 뿔테 안경의 진지하신 모습은 아직도 어제 뵌 듯 또렷이 남아 있다. 마치 선생은 학(鶴)처럼 우아한 고고(孤高)의 선비 모습이었다.

그때의 만남이 인연 탓이었는지 나는 공교롭게도 선생이 계시는 고려대학교 국어국문과에 진학케 되었다.

대학 입학 후 신입생 환영회 때, 지훈 선생이 먼저 막걸리 한 바가지를 들이키신 뒤 신입생 모두에게 돌렸다. 나는 그 바가지의 막걸리를 호기 있게 마신 다음 그대로 쓰러졌기 때문에 선생의 멋들어진 농무(農舞) 춤사위를 다시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선생이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한 까닭 가운데 하나도 자주 제자들과 밤새워 마신 술 탓이라고 할 만큼 당신은 술과 제자를 좋아하셨다.

▲ 조지훈 생가 사랑채 ⓒ 박도


대학 1학년 때 나는 지훈 선생님으로부터 교양 국어와 작문을 들었다. 작문시간에는 때때로 당신 시집을 펼치시고는 굵은 저음으로 자작시를 낭독했다.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는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허공 중천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 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 조지훈 '석문(石門)'

선생 강의는 선사(禪師)의 설법이었다. 동서고금의 이야기가 산만하면서도 조리가 있었고, 우스갯소리임에도 해학과 지혜로움이 있었다.

선생은 한때 '정치교수'로 몰려 대학을 떠났다. 선생이 없는 고대국문과는 텅 빈 듯했다. 선생이 다시 강단에 돌아왔을 때는 심한 기관지염을 앓았다. 그래서 2학년 2학기 선생의〈문학개론〉은 한 학기 내내 두 시간밖에 듣지 못했다.

▲ 선생의 젊은날 모습(조지훈문학관) ⓒ 박도


마지막 모습

내가 뵌 선생의 마지막 모습은 돌아가시기 전 해 여름이었다. 늘 병환으로 결강하던 선생이 그 날은 교문을 지켰다. 그 해 여름은 대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로 유난히도 맵고 지루했다. 교문 앞은 교통이 차단된 채 무장한 군인들이 길을 메웠고, 교내에서는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교정을 휘돌았다. 선생은 동료들과 함께 교문을 지키고 있었다.

선생은 흰 남방 차림으로 병색이 역력한 얼굴에는 비지땀을 쏟으며 굵은 뿔테 안경을 연신 벗어 땀을 닦았다. 데모 대열의 선두가 철책 교문을 박차고 나가려 하자 선생은 두 팔을 벌려 학생들 앞을 가로막고 서서 안간힘을 다해 절규했다.

"너희들 나가면 죽어!"
"너희 맘 다 알아!"
"안 돼! 죽는다 말이야."

이런저런 추억을 반추하는 새 열차는 안동역에 도착했다. 거기서 택시를 타고 안동시외버스터미널로 간 뒤 친구 민 교수를 만났다. 우리는 터미널 매점에서 생수 한 병을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킨 뒤 오후 2시 53분 영양행 시외버스를 탔다.

우리는 한적한 버스 뒷자리에 앉아 지난 대학시절을 오손도손 추억했다. 나는 학번이 65006인데, 그는 65007이었다. 그와 나는 102 학훈단(학생군사교육단의 전 이름) 단번마저도 나란히 붙고, 교직마저 선택한 탓으로 4년간 줄곧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그런데다가 그는 나의 마지막 직장인 이대부고로 안내한데다 내 결혼식 때는 사회까지 봤으니 나를 가장 잘 아는 지기지우(知己之友)다. 우리는 선생에 대한 추억과 대학시절 친구들을 얘기하면서 그때마다 손 전화로 친구들과 연결하면서 죽기 전에 다시 과 교우들이 한 자리에 모여 밤새워 학창시절을 반추하자는 모임을 즉석에서 기획하기도 했다.

그 친구는 대학에서 시론을 평생 강의했기에 스승 조지훈의 작품은 거의 외고 있었다. 나도 30여 년 동안 선생의 시를 학생들에게 가르쳐 선생의 웬만한 시는 아직도 거의 외우고 있다.

이즈음은 내가 늙은 탓인지 선생의 '병에게'를 가장 좋아한다. 그 시에서는 병을 향한 선생의 조용한 속삭임으로 달관한 한 시인의 다정한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 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 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 그려.
- 조지훈 '병에게'

▲ 조지훈 고향 주실마을 ⓒ 박도


친구와 함께 이런저런 스승의 작품세계를 더듬는 동안 버스는 영양정류장에 닿았다. 이미 오후 4시를 넘겼다. 안동역에서 원주로 가는 막차 시간이 7시 20분이라 군내 버스를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주차장에 늘어선 택시기사에게 왕복요금에 약간의 대기료를 지불키로 하고 주실마을로 달렸다.

(관련기사 :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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