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곡성>의 미끼,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다

[리뷰] 겉모습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등록|2016.05.22 10:39 수정|2016.05.22 16:04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

사르트르의 말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그 목적이나 본질과 무관하게 그 존재 자체로 소중한 것으로 보았다. '천부인권'이라는 비과학적 용어가 교과서에 쓰이는 것은 우리는 존재 자체만으로 경이롭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생각되는 본질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주관이 반영된 해석에 불과하다. 다만 그 해석에 반영된 것이 합리적인 지식과 경험 등을 토대로 했기 때문에 통용될 뿐이다.

인간은 직립보행으로 인해 지능이 발달하고, 말과 글을 통해 지식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특징이란 바로 '호기심'이라고 생각한다. 호기심이 의사소통을 유발하고 그에 필요한 언어와 문자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식이 되어 대대로 전해지는 유산과 문명이 되었다. 결국 호기심이 오늘날 인간의 근간이 된 셈이다.

이와 같은 호기심의 대상은 세상에 실존하는 수많은 존재에 대한 것이었고, 인간들은 오롯한 존재들인 그것들의 본질을 알고자 하였다. 그리고 축적된 지식을 통해 자신들의 관념을 투영하여 존재의 본질을 성립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이름'이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는 이러한 것이 잘 드러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중에서

이처럼 인간은 태초부터 실존하는 존재에 대해 주관적인 의미 부여를 하는 삶의 방식을 채택해왔고, 그 결과 우리 곁의 모든 존재는 각각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자신조차 말이다.

규범과 가치관의 기능

영화 <곡성>황정민(일광 역)이 굿을 하는 모습. 영화는 황정민의 굿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앞서 소통과 언어 및 문자는 호기심 및 의심 해소가 동기가 되어 등장하였다고 밝혔다. 이처럼, 힘의 논리가 아닌 대화를 통해 소통하기 위해서 전제돼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규범과 가치관이 그것이다. 그리고 공통된 가치관에 기반을 둔 사고를 '합리적 사고'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질보다 존재가 우선하듯, 이 규범과 가치관 역시 불변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 중세를 보라. 그때에는 종교가 진리로 받아들여졌고, 절대적인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종교와 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호기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이기 때문에 호기심을 해소할 수 없는 존재, 즉 미지의 존재에 대해 공포를 느끼거나 혹은 이에 감화되어 경외의 대상으로 변하곤 한다. 자연, 나아가 신이라는 것 역시 인간이 존재를 느낄 수 없는 미지의 것이었고, 나름의 본질을 투영하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미지의 존재는 인간에게 불안감을 불러일으켰고, 당대의 규범과 가치관에 따라 나름대로 의미 부여를 내리는 것이 필요했다. 희귀질환이었을 뿐인 알비노 환자는 흡혈귀와 마녀라는 본질을 갖게 되었고, 질병의 일종이었던 흑사병은 신의 벌, 혹은 악마의 저주라는 본질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는 오늘날 과학과 논리에 기반한 규범과 가치관에 의해 대체되었지만, 인간의 호기심과 미지의 존재에 대한 딜레마는 아직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의의를 갖게 된다.

대답이 아닌 물음을 던지는 영화

▲ 끊임없이 곽도원(종구 역)에게 혼란을 주는 황정민(일광 역). ⓒ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곡성>은 누가복음으로 시작된다. 예수는, 부활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상식인 제자들에게 상식으로서 그들과 소통한다. 미지에 대해 의심을 가진 제자들에게 '영은 살과 뼈가 없다. 고로 살과 뼈가 있는 나는 실존하고 있다'고 합리적 설득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겉모습이라는 것은 인간이 존재의 본질을 해석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정보가 된다.

감독은 바로 이 존재와 본질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감독은 미지의 살인사건과 귀신으로 소문 난 외지인의 존재, 겉모습에 현혹되는 종구 등을 통해 끊임없는 의심으로써 본질을 확인하고자 하는 인간의 한계를 그려냈다. 또 영화에서 '존재란 무엇일까, 진실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물음을 지속적으로 던진다. 그러나 대답은 담아내지 않았다. 교차편집과 암시, 시원하지 않은 결말 등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현혹시켰기 때문이다.

감독의 의도와 영화의 내용을 구분하고 싶다. 왜냐하면 외면상 보이는 사실, 즉 우리의 주관적인 해석인 본질과 감독의 의도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황정민이 범인이고, 일본인과 한패다'라는 스포일러를 당한 이후 영화를 봤다.

그 상태로 영화를 끝까지 보고나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외지인은 흉측한 형상으로 부제에게 네 마음대로 갈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으며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무명은 종구를 붙잡지 못한 채 좌절감에 휩싸여 주저앉았으며, 황정민은 살해 현장의 사진을 찍고 외지인의 사진 꾸러미로 추정되는 것들을 공개한 뒤 영화는 끝이 났다. 얼핏 보면 '외면상으로는' 황정민이 알고 보니 범인이었다는 반전 있는 스릴러&공포 영화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에서 범인이 누구인가는 '중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외지인의 존재와 본질

▲ <곡성> 속 외지인 역할 쿠니무라 준. 그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감독은 확신을 주지 않기 위해, 즉 우리를 현혹하는 장면들을 많이 담아냈다. 먼저 가장 핵심이 되는 외지인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볼 수 있던 외지인의 겉모습 및 행위는 전부 무엇이었는가? 훈도시(전통 일본 남성 속옷)만 입은 채 고라니를 생으로 잡아먹고, 사진을 수집하고 집에서 정체 모를 의식을 행하고 있으며, 꿈인지 모를 빨간 눈이 전부였다. 즉 이 사건의 범인이라는 어떠한 직접적인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일광과 굿 대결을 하는 장면에서는 교차 편집을 통해, 굿의 대상이 누군지 모호하게 처리했고, 차에서 박춘배의 시신을 보고, 또 사라졌을 때 놀라는 장면을 보며, 외지인이 이 사건의 배후인지 알 수 없게 했다. 또한 닭을 사며 흥정하는 모습, 공포에 쫓기고 절벽에서 떨어지고 울음을 삼키는 인간적인 모습에는 스포일러를 당한 나조차도 동정심을 갖기 충분했다.

어쩌면 일광의 말대로 외지인은 무당이었을 수도 있고, 그가 행한 의식은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는 것 또한 그러한 퇴마의식의 일종이었다면, 일광 역시 범인이 아닐 수 있다. 그럼과 동시에 범인일 수도 있다. 어느 답안 역시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는 제한적이었으며, 더군다나 미신적인 이야기는 종구의 영화 첫 반응처럼 외부의 누구도 믿지 않을 법한 비합리적인 것들이었다. 어느 하나 확신을 가질만한 내용이 없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의심의 해소가 불가능한 사람에는 종구를 비롯한 극 중 인물뿐만 아니라 관객인 우리 역시 해당한다는 점이다. '모지리같은 놈이 미끼를 통째로 삼켰다'는 극 중 대사는 감독이 우리에게 던지는 조롱이었을지도 모른다.

종구는 합리적인 사고체계에 의해서는 그를 범인으로 추정할 수 없었기에, 친구들과 사적으로 그를 죽이려 했다. 미지의 존재인 그의 본질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나오듯, 자신이 믿고 있는 상식에 따라 귀신이라면 죽일 수 없을 것이고, 사람이라면 죽일 수 있을 것이니 일단 죽여보자는 극단적인 확인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는 바와 같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은 줄만 알았던 외지인은 동굴 속에 생존한 채로 있었으며, 그는 부제에게 누가복음을 읊으며 기존의 상식과 주관적인 본질은 모두 허주,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충격을 부제와 우리에게 선사하였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종구는 자신의 의심을 해소하고, 미궁 속의 사건을 해결할 길이 없었던 셈이다. '의심만으로는' 말이다.

겉모습과 인상이 선사하는 현혹

▲ 곽도원(종구 역)은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악마인지, 범인인지 확신할 수 없자 친구들과 사적 복수에 나선다. ⓒ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외지인이 악마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고라니를 생으로 먹고, 눈이 빨개지는 등 기괴해지는 겉모습이 전부였다. 그가 사람을 병들게 하는지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겉모습만으로 존재의 본질을 전부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중세 시대의 흡혈귀와 마녀가 오해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듯이 말이다. 나홍진 감독 역시 박춘배와 같은 인물들은 좀비가 아니며, 단지 두드러기나 공격성이 강화되는 정신질환 등이 혼합되니 우연히 좀비와 같은 겉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외지인을 찾아간 부제는 혼란에 빠진다. 악마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괴기한 형상, 그러나 뼈와 살이 있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악마와 배치되는 손바닥의 성흔 등 악마라는 의심을 해소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 부제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기에 공포 역시 거둘 수 없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외지인은 자신 존재의 정체, 즉 본질이 무엇이라고 밝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며 조롱한다. 중한 것은 자신의 본질이 아닌 너의 마음가짐이라고 하며, 자신의 정체를 '바로 나'라고 소개한다. 무당이나 신, 그리고 악마도 아닌 바로 '나'로 표현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자신을 그 무엇도 아닌 '나'라고 밝힌 이 대사야말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관적인 해석이 투영된 특정한 명칭이 아닌, 오롯이 존재하는 '나'는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해석인 본질과는 달리 절대적인 단수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는 것 역시 퇴마의식 혹은 좀비로 만드는 강령술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 행위에 담겨있는 메시지는 '이 사진은 감정도 의사도 나눌 수 없이 존재의 겉모습만 담겨있다, 너의 모습이 이 사진에 갇히듯, 너의 사고 역시 존재가 아닌 본질에 갇혔을 뿐'이라는 것이 아닐까.

신은 꼭 미남이고 후광이 비치는 외모를 가져야만 하는가? 외지인과 같이 흉측한 외모를 가진 신이라고 하여 신의 존재가 변질되고 부정되는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금발의 곱슬머리. 미남형인 오늘날 예수의 모습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예수는 셈족에 양치기였기에 실제로는 까무잡잡하고 투박한 외모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종과 이순신의 외양 역시 좀 더 추한 외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신이라면 당연히 미남이 적합하다면서, 결함을 가진 인간만의 본질을 묵인한다. 감독은 우리가 존재 자체와 마주하기 위해서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며, 무의미한 의심을 거둔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의 원죄

▲ 천우희(무명 역)은 종구를 도우려 했던 걸까, 해하려 했던 걸까?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의심의 이득'이라는 용어가 있다. 특정 행위로 인해 초래되는 위험이 예상된다면 그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이득이 된다는 내용이다. 안전벨트를 예로 들면, 운전한다고 오늘 내가 사고를 당할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위험을 최소화하고자 안전벨트를 하게 된다. 음주 등으로 인해 그 의심의 정도가 커진다면, 아예 운전을 포기할 수도 있다. 이처럼 위험을 예방하고 인류라는 '종족'을 보존하는 데 있어, 의심은 매우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함을 지닌 인간에게 의심과 불신은 필요불가결의 요소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과 불신을 완전히 해소할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방어 운전을 하고 안전 장비를 갖춘다 하더라도, 운전하다 사고를 당할 일은 절대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의심과 불신, 그리고 이를 아우르는 호기심은 오늘날 인간의 지식과 문명을 이룩한 축복임과 동시에 인간의 원죄일지도 모른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진정한 존재를 마주하는 것을 가로막고 잘못된 본질을 마음속에 심어놓기도 한다. 바로 <곡성>처럼 말이다. '의심이 정말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원죄라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것이 영화가 던지는 물음이라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당연히 끝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고 그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다만 중한 것은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반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에 후회가 수반돼도, 번복하지 않을 최선의 선택 말이다. 다만, 우리가 또 다른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의 선택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시행착오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 <곡성> 포스터 ⓒ 20세기폭스 코리아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