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오를레앙, 그곳에 사군자가 있다
[인터뷰] '사군자' 화가 최주영, 1988년 도불
▲ 사군자, 최주영, 2013 ⓒ 최주영
"안녕하세요 최주영입니다"라는 문자를 시작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서로를 반가워했다. 밝고 힘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최주영 작가의 마음이 번져든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한 시간 후면 다음 전시할 곳인 오를레앙으로 떠난다는 일정을 알려주며 어느 곳에서든 꼭 만나자는 약속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열정적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생명력 때문이었을까? 목소리에서 묻어난 에너지가 두어 달 동안이나 생생했으니 참으로 긴 여운이다.
최주영 작가는 프랑스인 남편과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았고 현재 가족들은 엘살바도르에 거주 중이다. 당시에 가족들과 떨어져 프랑스에서 몇 개월 동안 아트투어를 진행 중이었다. '용감하다'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꽃향기 그리워 다가가면
어깨동무 나란히 방긋방긋 웃음으로
슬그머니 가까이 쳐다보니 예쁘구나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가의 삶 전체가 말하고 있는 어떠한 '사랑'이 있다. 그녀의 사군자는 동양적 사유만을 말하지 않았고, 꽃의 아름다움만을 그리지도 않았다. 얇디 얇은 화선지에 자신의 컬러를 소중히 담아 마음과 영혼에 각인되는 변치 않는 사랑을 펼쳐냈다. 사랑에 대한 정갈한 단어들은 시가 되어 노래하기 시작한다.
▲ 사군자, 2016, 최주영 ⓒ 최주영
바쁜 일정과 시차로 인해 틈틈이 최주영 작가를 만나 보았다.
- 작품 전체에서 부드럽고 따스한 여유가 느껴집니다.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먼저 가다듬고 붓을 들어요. 승화되어 꽃처럼 피어난 감정만을 그리려 노력합니다. 작품 제작 시간 외에도 수시로 마음을 정화시키지요. 그 마음들이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 유럽, 특히 프랑스 유학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초등학교 때 서예와 사군자를 배웠습니다. 6학년 때 고모를 따라 '한불수교기념 프랑스미술작품전시'를 관람했다가 형형색색의 유화 작품들의 아름다움에 끌려 꿈을 키웠어요. 또 미술 시간에 배운 프랑스는 서양미술의 황금기인 18~19세기에 빛과 어둠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았던 인상주의의 중심인 곳이었기에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 프랑스에서 한국화 기법의 교육을 받을 수 없었을 텐데 그 시절 프랑스 학교에서는 어떤 지도를 받았나요?
▲ 파리 89갤러리, 2016년 4월, 최주영 작가 ⓒ 최주영
-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분이 있으신가요?
"할아버지와 아버지입니다. 두 분 모두 그림을 자신의 몸처럼 좋아하셨습니다. 전문 화가는 아니지만 그림을 그리시기도 하십니다. 제가 집안의 가업을 잇기를 원하셨기에 할아버지와 부모님은 저의 재능은 칭찬하셨으나 전문 작가의 길은 크게 반대하셨지요. 그러나 지금은 저를 인정해 주시고 좋아해 주십니다."
- 예술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신지요?
"행복한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정화하면서 걸러진 마음들을 그려내고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 만 16세에 혼자서 프랑스 유학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무엇인가를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순수한 마음과 믿음으로 계산하지 말고 바보처럼 그냥 하십시오. 그냥."
어린 최주영 작가에게 어찌 어려운 시절과 과정이 없었겠는가. '바보처럼 그냥 하라'는 말 속에 자신이 그것을 얼마나 갈망하고 원했는지를 다 보여 준다. 그 갈망 앞에 상황이나 환경은 작은 언덕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녀에게서 어렵고 힘들었던 시간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도 여전히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나누는 즐거움과 의미, 용기와 열정이 점점 더 커져가기 때문이리라 짐작해 본다.
그 이후, 오를레앙 전시 소식을 보내왔다. 사군자재단은 2004년 오를레앙에서 최주영 작가가 창단했다. 오를레앙 전시 주최는 최주영 작가와 사군자재단이다. 한국 사군자가 프랑스에서 뿌리 내리는 과정을 보았다.
1세대는 창단자인 최주영 작가, 2세대는 최주영 작가가 길러낸 프랑스인 사범들이며, 3세대는 프랑스인 사범들의 연구생들이다. 이들이 모여 그들의 아뜰리에를 오를레앙 시민들에게 열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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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화 퍼포먼스, 오를레앙, 2016년 5월 >
10년이 된 사군자 연구반 프랑스인 제자들이 사범이 되어서 그들의 제자들과 3대가 어우러져 오를레앙에서 퍼포먼스를 한다. 모두 '아젤꼬 오를레앙 시민학교' 강사들이다.
프랑스에 올 때마다 오를레앙에서 강의하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즉흥 퍼포먼스는 마음으로 그리고 답하며 함께 시를 쓰듯 즉흥으로 난과 대를 치고 난 후 글도 함께 쓴다. 한국화 기법만 배워서는 소통할 수 없는 작업이다.
최주영 작가가 '나비와'를 쓰고, 르네(Renée)씨가 '꽃잎이' , 마리폴(Marie-Paule)씨가 '빛에', 클레르(Claire)씨가 '바람과' , 로렌스(Laurence)씨가 '봄비를' ,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주영 작가가 '맞이합니다' 라고 쓴다.
한류문화의 진수를 현지인과 더불어 맛을 내고 있다니 멋지지 않은가. 프랑스 시민들은 무엇을 썼는지 궁금해 하고 사범과 제자들은 설명을 한다. 시민들이 즉흥으로 그림과 글을 쓰는 것에 놀라고 신기해 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한국에서도 점점 잊히는 우리의 문화 예술을 프랑스에서 뿌리 내리는 것, 아름다움 자체이다.
▲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강의 시간 ⓒ 최주영
재단 활동 중 하나로 2006년에 한글학교를 만들었고 주불대사관의 인가를 받아 3개의 한국어 강좌를 시작했다. 다양한 직업군의 사군자재단의 회원들 절반은 한국화를 선택하고 나머지는 한국어를 배운다. 교포들보다 현지 프랑스인이 더 많다. 한 달에 한 번씩 K-POP을 부르고 김치 및 요리 프로그램등 다양한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한류'의 전파는 K-POP이 알려지기 전부터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자신이 있는 곳에서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한류의 시작'인 것 같다. 최주영 작가가 1988년도 도불하였으니 20년도 훨씬 전이다.
▲ 초월, 시서화, 최주영, 2016 ⓒ 최주영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 불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던 동양 소녀의 조그만 습작 노트를 보고 단번에 입학을 허락한 학장과 교수들의 마음도 비슷했을 것 같다. 유럽인의 마음을 휘어잡은 동양의 소녀는 지금도 열정을 다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5월, 동네 모퉁이 햇살 좋은 담벼락에 붉은 개양귀비가 한 무더기 피었다.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훔칠 수 없고 꺾을 수 없는 그 아름다움에 중독된 듯하다. 갑자기 최주영 작가가 생각나서 메시지를 띄웠다.
사람들이 오가는 모퉁이에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흠뻑 드러낸 개양귀비처럼, 최주영 작가는 유럽의 중심 프랑스에서 용기있게 사군자(시서화)로 그들 마음속에 '한국의 미'를 뿌리 내리고 있다.
6월에 잠시 한국에 머무른다 하였으니 만나볼 수 있겠다. 인천 영종대교 '포춘힐 갤러리(Fortune hill gallery)'에서는 연중 그녀의 작품이 전시 중이다. 올 여름, 중독되어도 좋겠다.
덧붙이는 글
남도투데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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