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동성애를 지지한다', 이 문장의 지독한 모순

동성애자 '인권'엔 전혀 관심 없는 동성애 차별 논쟁

등록|2016.06.11 10:32 수정|2016.06.11 10:32

▲ 오는 11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성소수자 축제인 퀴어페스티벌(Korea Queer Festival 2016)이 열릴 예정이다. 사진은 지난해 열린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서 한 참가자가 든 피켓. ⓒ 하상윤


오늘(11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성소수자 축제인 퀴어 페스티벌(Korea Queer Festival 2016)이 열릴 예정이다. 벌써부터 내 주변에서는 알게 모르게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주변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을 들어보면 황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 동성애가 에이즈를 옮긴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믿는 사람부터 심할 때는 정신병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까지 더러 있다.

이런 편견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도 문제가 있다. 이전에 동성 간에 결혼을 허용하고 동성부부에게 양육권을 부여하면 사회 질서가 무너진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말자는 사람도 동성결혼이나 성소수자의 양육권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취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왜 사람들은 성소수자의 평등권 요구에 이렇게 야박할까. 이것은 요즘 처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몇몇 사람들은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길 싫어했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모두가 평등하게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누군가는 '천민'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했다.

그들을 차별하는 '누군가'의 존재는 역사와 지역마다 달랐다. 그 '누군가'는 귀족이었을 때도 있었고, 남성이거나 백인일 때도 있었다. 성소수자는 '다르게 사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있다. 그리고 지금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누군가는 바로 '우리'들이다.

성적 취향은 지지나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이전에 학교 신문에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말자는 주제의 글을 기고하려다 그만 둔 적이 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원고를 스쳐보신 선생님께서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말아도 동성애를 옹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주장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라서 기고하길 망설이다 포기했다.

재작년 서울시민 인권 헌장이 만들어질 무렵 성소수자 차별 금지 조항을 놓고 갈등이 격화된 적이 있었다. 당시 박원순 서울 시장은 개신교 종교단체와 함께 한 간담회 자리에서 "보편적인 차별은 금지돼야 하지만 동성애는 확실히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성소수자 단체들은 즉각 박원순 시장의 사과와 인권 헌장 선포를 요구했었다.

'지지(옹호)'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은 안 되지만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매우 설득력 있고 심오하게 느껴졌다. 마치 '이성애자들의 반박 불가능한 보편적인 입장'처럼 보였다.

나도 그렇게 주장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말에 동의하기에는 뭔가 꺼림칙했다. 동성애를 '지지한다'는 표현이 뭔가 어색하고 낯설었다. 나중에 이 주장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은 박원순 시장의 발언을 두고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찬반 문제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했다. 이 말에 따르면 동성애를 지지한다고 해서 동성애자들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아니며,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동성애자들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동성애자들은 실재한다. 동성애를 찬성과 반대의 기준으로 나뉠 수 있게 된다면 개인의 취향과 개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발생할 수 있다.

동성애와 이성애는 그저 성적 기호(嗜好)의 차이일 뿐이다. '독특한 취향' 혹은 '개성 있는 취향'이라는 표현은 있어도 '지지하는 취향'이라는 표현은 없다. 취향은 개인의 것이다. 애초에 공공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개인 성적 취향은 존중받아야 한다. 또한 같은 의미에서 혐오해서도 안 된다. 혐오와 지지라는 수사는 개인의 성적 취향에 붙기는 어색한 표현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은 안 되지만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틀린 것이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편과 지지하지 않는 편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바람직하지 못한 인식이다.

이미 그것의 밑바닥에는 동성애에 대한 차별이 깔려있다. 이 찬성과 반대라는 구분은 동성애를 성적 취향으로 인정하지 않고 '동성애자를 향한 차별'이 아닌 '동성애' 자체를 문제로 삼는 논쟁을 일으킨다. 이 논쟁은 동성애자의 인권에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동성애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하는 문제만이 남는 것이다.

'지지한다'라는 표현은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 표현은 듣는 이로 하여금 동성애를 어떤 하나의 주의(ism)로 생각하게 만든다. 때문에 동성애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사람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게 한다. 하지만 동성애는 종교처럼 포교하는 것도 아니고, 사상처럼 전파하는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말하고 있지만, 동성애는 단지 성적 취향, 기호일 뿐이다.

성소수자의 인권은 누군가가 베푸는 시혜가 아니다

▲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동성애자의 양육권과 동성결혼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사진은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영화 '동성애 처벌조항 377'(2011). ⓒ 동성애처벌조항377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동성애자의 양육권과 동성결혼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성소수자를 차별해서는 안 되지만 그들의 군 입대 권리에 대해서는 대답하길 망설이며, 결혼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양육권에 대해서는 "다른 건 몰라도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말한다.

동성애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이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몇몇 사람들의 경우 '차별하지 말자'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소수자이지'만' 그래도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미를 한정하는 표현에는 동성애를 일탈이나 비정상으로 보는 인식이 깔려있다. 한 마디로 "나는 동성애를 하지도 않고 동성애를 좋게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자를 차별해서는 안 돼"라는 것이다.

동성애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는 동성애와 이성애를 동등한 위치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동성애는 하나의 성적 취향이 아닌 '일탈', '비정상'이고 이성애는 '정상'이다.

"동성애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도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사이의 구분이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성소수자의 권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 권리는 '인간의 권리'와 구분되어 버린다. 결국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말자는 몇몇 사람들도 동성애자가 '결혼'이나 '양육'같은 공적인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권'은 성소수자의 소유가 아니다. 이성애자들의 점유물도 아니다. 인권은 인간이라면 모두가 누릴 권리다. 따라서 우리는 성소수자의 인권을 '인간으로서 누릴 권리'로 생각해야 한다. 차별 금지와 권리 보장은 누군가가 성소수자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불필요한 논쟁과 편견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동성애자가 생겨난 이유를 설명할 때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동성애를 환경적 요인이나 사회적 요인을 통해 후천적으로 습득하게 된다는 사회 구성론적 접근과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선천적인 속성이라는 본질론적 접근이다. 간단히 말해서 동성애가 후천적이냐 선천적이냐를 생각하는 것이다.

후천적 요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동성애를 '장애'로 보는 경우가 많다. 즉, 정상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동성애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 말에 따르면 동성애는 '치유'나 '극복'이 가능한 정신질환이다.

반면 선천적 요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동성애가 타고난 속성이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천적 요인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치유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동성애자가 되는 원인을 뇌 구조나 유전자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바꾸면 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러하다.

사실 이런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하는 문제는 동성애자가 차별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논의는 마치 동성애자가 발생하는 것이 교정 가능한 원인에 있다고 보고 동성애를 이성애로 교정하려는 시도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단연 동성애자에 대한 이성애 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폭력이다. 문제의 핵심은 항상 '왜 동성애자가 되는가'가 아니라 '왜 동성애자가 차별받으면 안 되는가'이다.

한편, 동성애를 향한 근거 없는 괴담도 큰 문제다. 특히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동성애가 에이즈를 옮긴다는 괴담이다. 동성애는 에이즈 감염의 원인이 아니다. 동성애자 집단, 특히 남성 동성애자(Gay)들 사이에서 에이즈 감염 비율이 비동성애자들보다 높은 까닭은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 때문이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는 에이즈의 감염 원인이다. 따라서 에이즈의 전파를 줄이기 위해서는 '동성애'가 아니라 '성관계 습관'을 바꿔야 한다. 콘돔 사용 등의 예방법을 사용한 안전한 성관계 습관을 통해 에이즈는 충분히 예방 가능하다.

성소수자의 결혼과 양육권에 대해서도 괴담에 버금가는 이야기가 오간다. 성소수자의 자녀가 성소수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과 결혼제도가 붕괴된다는 등의 여러 가지 '가설'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가설들이 이성애자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설은 가설일 뿐이다. 실제 동성부부 가족에 대한 연구들은 자녀들의 정서와 행동이 부모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경제적 여건으로 인한 생활환경이 자녀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개선되어야 할 것은 형편이 어려운 동성부부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다(물론 한국은 아직 동성결혼을 법제화 하지 않았다. 이 사례는 북미지역에 해당한다).

인권은 우리의 운명이다

가끔 보면 성소수자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아마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성소수자를 '돌연변이'나 'GMO 동식물' 쯤으로 여기는 것이 틀림없다.

동성애자는 엄연한 인간이다. 퀴어 문화 축제는 성소수자 또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축제를 한다. 즐거워하고 분노하기도 하며 '남들이 다 하는 연애'도 한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이야기 할 때 '우리'라는 개념은 더 이상 '이성애'나 '동성애'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라는 개념은 모든 인간을 포함해야 한다. 성소수자의 권리와 이성애자의 권리는 모두 인간의 권리이다. 결국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권은 '우리'의 운명이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