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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를 김굉필에게 제자로 소개한 양희지

[대구의 서원] 수성구 파동 법이산 깊은 무릉계곡에 자리잡은 오천서원

등록|2016.06.16 17:12 수정|2016.06.16 17:12

▲ 오천서원 전경 ⓒ 정만진


오천(梧川)서원의 공식 주소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로2안길 20이다. 그런데 대구향교 누리집은 오천서원을 소개하면서 '무릉 계곡에 자리한 오천서원'이라는 제목을 붙여 두었다. 본문 첫줄도 '오천서원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무릉 계곡 내에 있다'라고 되어 있다.

오천서원이 무릉 계곡에 있다? 무릉(武陵)은 무릉도원(桃源)의 줄임말로, 중국에서 온 개념이다. 동양식으로 이상향(理想鄕), 서양식으로 유토피아(utopia)를 뜻하는 무릉도원은 도연명(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 무릉이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파동에 있다 하니 자연스레 호기심이 샘솟는다. <도화원기>를 간략히 줄여보면 아래와 같다.

'무릉의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가다가 복숭아꽃이 울창한 숲에서 길을 잃었다. 배에서 내린 어부는 동굴을 따라 들어갔다가 어떤 평화로운 땅에 이르렀다. 논밭과 연못이 모두 아름답고, 닭과 개들이 내는 소리도 한가로웠으며, 사람들은 모두 즐겁게 살고 있었다. 그들은 진(秦)나라의 전란을 피해 옮겨온 사람들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벌써 5백 년 이상 바깥세상과 접촉을 끊은 채 살았다고 했다. 그들은 "이곳 이야기를 밖에 나가서는 발설하지 말아 달라"면서 어부를 융숭하게 대접했다. 어부는 돌아오면서 곳곳에 표식을 남겼다. 그러나 뒷날 관리와 함께 다시 가보았을 때 동굴은 찾을 수 없었다.'

오천서원이 무릉계곡에 있다는 것은 파동로2안길 20 일대가 <도화원기>의 동천(洞天), 즉 신선이 사는 땅에 버금가는 청정 지역이라는 뜻이다. 갈등과 탐욕에 찌든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곳이고, 봄철이면 복숭아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산속이며, 전쟁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마음 편안히 지내기에 아주 적합한 깊은 계곡 속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오천서원이 자리잡고 있는 공간은 선비들이 서책을 펼쳐든 채 학문 연마에 힘쓰고, 자연을 벗 삼아 인격 수양에 몰입할 만한 천혜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는 도연명이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가 귀거래(歸去來) 사상을 실천하며 살았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권력과 부귀영화를 다투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도회지의 번잡함은 무릉도원과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 오천서원의 외삼문(왼쪽)과 강당 ⓒ 정만진


'귀거래'로 상징되는 유가(儒家)의 은일(隱逸) 사상은 공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논어>는 '써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은거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라고 정의했다.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가 벼슬을 하고, 도가 없으면 은거한다(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라는 대목도 같은 뜻이다.

공자의 발언은 유가가 자연을 은거지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학문의 목표를 수기치인(修己治人)에 둔 유가는 스스로를 수양하고, 나아가 백성과 국가가 지극한 선에 도달하는 데 역할을 하는 출사(出仕)를 지식인의 임무로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자연에 머무는 동안에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로2안길 20에 자연만이 아니라 서원도 함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오천서원이 자리잡고 있는 법이산 자락 무릉계곡의 '무'는 무릉도원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주자(1130~1200)의 무이산(武夷山)을 가리킨다. 주자는 무이산 기슭에서 40여 년 동안 성리학을 가르쳤다. 가르치는 것은 강학(講學)으로, 제향(祭享)과 더불어 서원을 설립하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룬다.

오천서원이 있는 무릉계곡은 주자의 무이산에 따온 이름

달리 말하면, 파동 무릉계곡의 '무'는 노장사상의 표어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무(無)'가 아니다. 자연에 파묻혀 산다고 하면 흔히들 무(無)를 떠올리지만 무릉계곡의 무는 '인간이 없다(無)'는 의미가 아니다. 산속에 서원을 지어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유가의 행위는 '만물을 길러주는 모성을 지닌 조화로운 공간(<장자> 제물편)'인 자연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에 은일할 것을 희구하는 도가(道家)의 태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에 대해 정연지의 논문 <귀거래의 현대적 표현 연구>는 '공자는 인간의 입장에서 자연을 보지만, 노자는 자연의 입장에서 인간을 본다, 유가는 자연의 주체를 인간으로 보지만, 도가에서는 자연 자체를 자연의 주인으로 본다, 도가에서는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도가는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는 인위(人爲)를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위(無爲)로 두라는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 오천서원의 강당(왼쪽)과 사당 ⓒ 정만진


따라서 오천서원은 너무나 조용한 산속에, 그 어떤 행인의 눈에도 띄지 않는 채 파묻혀 있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본다. 세파의 흐름이 없는 고요한 전원이 학문 연마 공간으로 바람직하고, 자신을 돌이켜보며 수양을 하기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수기치인을 위해 강학을 하고, 제향을 통해 인륜의 근본을 이어가는 공간, 그곳이 바로 오천서원인 것이다.

오천서원으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무릉도원을 연상하게 한다.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마지막 동네인 파동, 그 파동 중에서도 끝 부분인 용계교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서원 입구 첫머리이다. 대구 250만 시민 중 이 길을 걸어본 이는,  오천서원과 그 아래 무등재 관련 문중 사람을 제외하면 열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서너 집의 담장이 끝나면 곧장 법이산 자락이 나타난다. 길은 그냥 산으로 이어진다. 아무도 다니는 이 없으니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거나 잡음을 내는 사람도 없다. <도화원기>의 동굴 속 세상은 닭과 개들의 소리조차 평화롭다고 했지만, 이 계곡에는 닭도 개도 없다. 300미터 가량 호젓한 산길을 걸으면 문득 오천서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외삼문 앞에 서니 왼쪽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중화양씨대동종친회(中和楊氏大同宗親會) 헌성록(獻誠錄) 비석과 중화양씨대동종친회 창립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대동종친회를 창립하고, 서원을 중창할 때 기부를 한 문중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빗돌이다. 서원 전체를 설명해주는 안내판은 외삼문 오른쪽 담장 모서리 앞에 있다.

깊은 산속에 있지만 규모는 예상 외로 큰 오천서원

오천서원은 뜻밖에도 상당히 규모가 크다. 깊은 산속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름만 서원이지 사실은 오래된 기와집 한 채 정도가 아닐까 여겼던 지레짐작이 무색할 지경이다. 무엇보다도 특히 4칸으로 지어진 강당이 뒤로 산을 등지고 있어 자연스럽게 웅장한 면모를 띠게 된데다, 그 왼쪽에 서재(西齋)처럼 자리잡고 있는 무릉재(武陵齋)가 전체 건물을 ᄀ자 형태로 키우고 있어 한결 우람차 보인다.

강당 동쪽에는 담장을 달리한 채 오천사(梧川祠)가 세워져 있다. 그래서 안내판은 '1786년(정조 10)에 건립한 오천서원은 조선 성종 때 대사헌을 지낸 대봉(大峯) 양희지(楊熙止)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사림(士林)에서 세운 것으로, 좌측에는 외삼문(外三門), 강당(講堂), 제수청(祭需廳)이 일곽(一廓)을 이루고 있으며, 강당 우측에는 제향(祭享) 공간인 사당(祠堂)이 한 단 높게 토장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이루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외삼문, 강당, 제사청이 한 울타리 안에 있고, 사당이 별도로 독립된 울타리 안에 들어있다는 뜻이다. 사당 담장 밖에는 중화양씨 시조인 당악군(唐岳君) 등 다섯 분 선조의 단소(壇所)가 있다.

오천서원은 양희지 한 분을 제향하고 있다. 양희지는 연산군 당시 대사헌을 지낸 인물로, 1437년(세종 21)에 태어나 1504년(연산군 10) 타계했다. 그는 삼포(三浦)에 왜구가 노략질을 하는 난리가 발생했을 때 경상도로 내려가 장수들을 지휘, 왜구 추장 사두(沙豆)를 잡아 처형했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굉필, 정여창 등이 멀리 서북도로 유배 되자 그들을 한양 가까운 곳으로 옮겨달라고 주장하다가 경북 포항 장기 바닷가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 오천서원의 사당과, 그 오른쪽의 비석들 ⓒ 정만진


양희지와 관련되어 전해지는 유명한 일화 두 가지를 돌이켜본다. 첫째는, 그가 조광조를 김굉필에게 제자로 소개했다는 사실이다. 김굉필이 평안도 희천으로 귀양살이를 오자 그 인근 어천역 찰방 조원강은 자신의 아들 조광조를 그의 제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대사헌 양희지를 찾아가 부탁하였다. '조광조를 제자로 추천하니 받아달라'는 편지 한 통을 써 주십사 하는 내용의 부탁이었다. 

당시는 유배 중인 죄인과 임의로 만나면 그 역시 처벌을 한 시대였다. 그런데도 양희지는 조광조가 보통의 천재가 아닌 것을 간파, 김굉필에게 소개 편지를 써주었다. 현대의 검창총장격인 대사헌 양희지는 법을 어기는 대신 유학 연구의 맥을 과감히 잇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편지 속에 양희지가 써둔 시를 읽어본다.

十七趙家秀 열일곱 살 조씨 집안 수재
三千弟子行 삼천 제자가 가는 듯하도다
慇懃求道志 은근히 도를 구하는 뜻 있어
迢遽關西行 아득한 관서까지 찾아가는구나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그가 과거에 합격한 1474년의 일이다. 성종이 그에게 이름을 희지(稀枝)로 바꾸라면서, 직접 시의 첫 구절을 짓고는 신하들에게 뒤를 지어 읊으라 했다. 성종이 먼저 '양씨 가문의 뛰어난 선비로서 자태가 옥으로 만든 나무와 같으니 그 이름을 희지로 바꿈이 합당하리라(才子楊家玉樹姿 其名端合換稀枝)' 하고 시를 시작하니 신숙주 등이 '하늘에서 비와 이슬이 내리듯 임금께서 합격자를 발표하시는 날, 초시, 복시, 전시 3단계를 거쳐 유능한 인재를 뽑으셨네(九天雨露傳臚日 三級風雷漉海時)' 하고 뒤를 이었다.

마지막 구절은 양희지 본인이 직접 지었다.

隆恩曠世酬無路 높은 은혜 크고 넓어 보답할 길 없으니
聖壽恭祈億萬斯 임금께서 천수를 누리시도록 공손히 기원드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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