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하청노동자 수만 명, 어떤 길 택할 것인가
[분석] 울산 현대중공업 구조조정 회오리에 위기감 고조
▲ 울산 동구에 있는 세계 최대 규모 조선소인 현대중공업. 최근 불어닥친 구조조정 광풍에 원청과 하청 노동자들이 불안해 하고 있다 ⓒ 울산시 조선해양산업 현황 자료사진
국내 조선업계에 구조조정 광풍이 불고 있다. 특히 세계 최대규모를 자랑하던 울산의 현대중공업은 타 조선업체에 비해 재무구조가 튼실하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대우조선·STX조선 등 대규모 부실에 덩달아 휩쓸리면서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은 지난 1년간 1만여 명이 구조조정 된 데 이어 앞으로 1만여 명이 더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1300여명의 사무직이 희망퇴직을 한 데 이어 현재 회사측이 조합원 900여명이 포함된 간접부서에 대한 분사를 추진하면서 노조가 파업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위기감에 지자체와 시민사회가 한결같이 '구조조정 중단' 혹은 '최소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과연 구조조정 광풍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잘 나가던 현대중공업에 불어닥친 구조조정
정규직과 하청 5만명 이상이 근무하는 현대중공업은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전국에서 고르고 골라 울산 동구 전하동 바닷가를 부지로 정했다. 1960년대말부터 바다를 매립하고 땅을 다진 후 1973년 200만평의 현대조선소(현대중공업)를 창립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현대중공업노조 설립에 앞장섰던 퇴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87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 권리 찾기에 나섰고 당시 하청노동자들도 거의 정규직이 됐다. 지금처럼 조선업의 덩치가 크지 않을 때인데도 한때 정규직 조합원이 2만 5천여 명에 육박했다. 현재는 1만 7천여 명으로 줄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17~18년 간 정규직노조와 회사측의 밀월이 진행됐다. 그동안 회사측은 기업의 목표인 '이윤추구'에 충실해 시나브로 업무를 아웃소싱(외주화)해 나갔다. 결과적으로 그후 현대중공업이 세계적 조선소로 발돋움하면서 수주 물량이 크게 늘어 더 많은 인원이 필요했지만, 결국 정규직의 2배가 훨씬 넘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정규직 조합원과 달리 수주량과 작업량에 따라 인원을 늘이고 줄이는데 용이한 하청노동자가 현재 불어닥친 세계적 조선업 불황에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
현대중공업노조와 하청노조, 시민사회는 14일 연 기자회견에서 "4만명에 달하는 울산 동구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은 누가, 언제, 얼마나 잘릴지 모르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다"며 "그동안 업체폐업과 물량팀으로 가려진 일상적 구조조정 속에서 체념과 한탄으로 고용불안을 삶의 일부처럼 감내해 왔다"고 밝혔다.
▲ 현대중공업노동조합,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선산업대량해고·구조조정저지 울산지역대책위가 14일 오전 11시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4만 하청노동자 노조가입 운동을 선포하고 있다 ⓒ 박석철
이는 맞는 지적이다. 정규직 조합원이 회사 창립 때 혹은 공채로 입사하면서 처음부터 조선업을 숙명처럼 선택한 반면 회사측의 아웃소싱에 따라, 물량의 유무에 따라 들어온 하청노동자들은 구조조정을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시민사회 등은 이를 두고 "그저 다른 업체, 다른 지역의 조선소를 전전하며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것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왔다"고 했다. 또한 "조선산업 구조조정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워지면서 이제는 더 이상 갈 데도 없다"고도 했다.
이처럼 조선업 하청노동자들이 구조조정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는 것은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자리 잡은 파견법 등 법 제도가 그 배경이라는 지적이 있다.
또한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노조가 유니온숍(입사하면서 자동적으로 노동조합원이 되는 제도)을 적용받는 반면 하청노동자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도 작용한다. 대기업 조선소에 상주하는 수백 수천 개의 하청업체가 유니온숍을 적용받지 못하기 때문에 대기업의 결정에 따라 업체가 폐업하면 단결권 한 번 발휘 못하고 운명을 같이 해야 된다.
결국 이번 조선업 구조조정에서 하청노동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규직노조와 같은 강한 노조를 결성해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을 보장받아야, 그나마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4만여 명의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중 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100~200명이 채 안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조 가입률이 0.5%가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청노조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가 힘든 것이다.
이같은 저조한 노조가입률은, 그동안 하청노조를 설립하고 가입하는 동료들이 해고되거나 구속되는 등 고통을 받는 모습을 지켜본 하청노동자들에게는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생존권과 권리를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남이 해주기만을 바란다는 지적도 심심찮게 나왔다.
시민사회 "하청노동자 노조가입 운동 전개"
이런 연유로 현대중공업노조,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선산업 대량해고·구조조정 저지 울산지역대책위원회는 14일 오전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4만 사내하청노동자 힘 만들기 운동'을 선포했다. 공세적인 노조가입 운동을 벌여, 하청노동자들과 함께 구조조정에 맞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겠다고 나선 것.
이후 하청노동자들이 그동안 보아온 노조가입에 따른 불이익에 계속 침묵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시민사회가 제안한 노조가입 운동에 동참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하청노동자들이 구조조정 광풍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한편 현대중공업노조 조합원들에게도 구조조정의 칼날이 향하고 있다. 회사측이 최근 설계, 용접 등 선박이나 플랜트를 만드는 직접부서 외의 설비보전, 동력 등 간접부서를 분사하겠다고 노조측에 통보하면서다. 이 간접부서에는 정규직노조 조합원 994명이 일하고 있고 전체가 분사대상이다.
이 때문에 현대중공업노조는 파업을 불사하겟다는 입장이다. 현대중공업 회사측이 "회사가100% 출자하는 그룹 자회사로의 100% 고용을 보장되고, 자회사 정년 후 희망자는 최대 3년까지 계약직으로 근무하도록 하겠다"고 밝혔지만 노조는 이를 믿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현대중공업노조는 오는 17일 파업 결의를 하고 다음주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해 쟁의행위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라 갈등이 악화되는 양상이다.
이같은 위기감 고조에 일부 조합원과 회사측 간부는 한결같이 "자생력이 있는 현대중공업도 대우조선 등 부실기업과 함께 '위기의 조선업' 테두리에 넣은 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지적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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