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공지영, 이청준이 사랑한 이곳
[순천사람들 5] 소설가들의 문학적 토양이 된 순천
드라마에서 순천 출신 주인공이 고향 자랑을 하는 몇 마디 대사를 위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하나씩 꺼냈다. 서랍 속 빛바랜 일기장과 앨범을 들춰보고, 오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괜히 안부를 묻기도 했다.
스무 살, 깍쟁이들만 모여 산다는 서울에 올라와서 무시당하기 싫은 마음에 순천 자랑을 하고는 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서울 친구들에겐 별 관심도 흥미도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래도 '촌놈'은 창피한 줄 모르고 고향 자랑에 열을 올린다. 결국 나는 드라마에서까지 순천 자랑을 늘어놓고야 말았다.
서울과 지방의 대결로 시작해 순천과 여수의 대결로 넘어간 싸움에서 결국 주인공은 여수에는 없는 뉴코아 백화점으로 고향 자랑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서울 친구들은 킥킥대며 웃기 바쁘다. 나를 도와준다며 순창고추장과 순천향대학교를 이야기하는 녀석들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그때는 왜 그렇게 지방을 무시하면 욱 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사실,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순천은 조계산을 따라 소백산맥 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도심 한가운데 봉화산이 우뚝 솟아있고 그곳을 가로지르는 동천을 따라가다 보면 드넓은 갯벌의 순천만이 나타난다. 인구는 30여 만 명으로 교통이 좋아 유동인구도 많은 편이다. 또한 1948년 여순사건의 아픈 기억과 왜란을 이겨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순천 출신 작가들의 순천 자랑은 비단 오늘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김승옥, 정채봉, 서정인, 조정래 등을 순천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는데 그들의 작품을 보면 직접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고향에 대한 애정을 담아내고 있다.
2013년 순천국제정원박람회에서 소설 <태백산맥>의 뮤지컬이 선보였고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당시 정원박람회 홍보대사이기도 했던 조정래 작가.
"태백산맥은 40, 50대들이 20대 때 읽었던 소설입니다. 그런데 예전 20대는 통일의 필연성을 생각했는데 지금 20대는 역사에 대한 망각이 있는 것 같아요. 뮤지컬의 첫 공연이 소설이 시작된 고향이라서 반가웠어요."
1948년 여순사건 이후부터 농지 개혁에 대한 치열한 저항과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인 사건을 잘 담아낸 <태백산맥>. 그 거대한 이야기는 조정래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순천의 아픈 기억에서부터 시작한다.
순천에서 나고 자랐고, 어린 시절에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작가들의 작품에 고향 이야기가 담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글을 쓰는데 가장 강력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순천이 비단 출신 작가들에게만 애정의 대상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여행지 혹은 고향, 누군가에게 순천이란
"봄날 그 어느 꽃보다 화포 바다의 갯벌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작가는 순천 갯벌에서 작업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바다가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다. 날씨 좋은 날에는 순천 화포해변에서 여수 앞바다와 고흥까지 내다보이고, 겨울에는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바다가 주는 꼬막을 담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그녀에게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게 다가왔을 것이다. 민병일 시인은 박완서 작가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 고구마와 초콜릿을 나눠 먹으며 '날 따뜻해지면, 아끼고 사랑했던 순천 와온 바닷가를 같이 걷자'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공지영 작가의 소설 <도가니>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극단적인 이면을 파헤쳤고 제도적인 문제에 대한 이슈를 가져왔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꺼내기엔 두렵고 불편했던 거짓과 폭력의 이야기를 작가 특유의 감수성으로 잘 담아냈다. 공지영 작가는 <도가니>에서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을 오마주 하며 '현대문학에서 유일하게 거론된 가상 도시 무진과 무진의 안개 이미지를 빌려오자, 소설 속 청각장애인, 안개, 권력층의 은폐의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조정래 작가가 태어난 곳이자 정채봉 작가가 할머니를 따라다니다가 들은 설화에서 <오세암>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선암사는 순천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그리고 법정스님은 '순할 순'에 '하늘 천'을 쓰는 순천의 조계산 송광사의 작은 암자 불일암에 오래 머무르기도 했다. 17년 동안 홀로 이곳에서 지내며 수행과 책 읽기, 집필 작업에 몰두하였고 <무소유>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서편제>, <눈길>의 이청준 작가는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좌 교수를 역임했다. 순천대학교는 매년 추모 학술제와 기념행사를 개최하며 그를 기억하고 있다.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는 <사평역에서> 시인 곽재구와 <마당 깊은 집> 소설가 김원일이 미래의 작가들을 가르치고 있다.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비롯해 왜란을 다룬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순천왜성. 그리고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를 지내기도 했던 순천의 낙안읍성은 드라마 <허준>, <대장금>을 비롯해 영화 <아름다운 시절>, <YMCA 야구단> 등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순천문학동우회는 2004년부터 '순천문학상'을 재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제1회 수상자 서정춘 시인을 비롯해 그동안 허형만 시인, 김승옥 소설가, 정조 희곡작가, 조정래 소설가, 서정인 소설가 등이 선정되었다. 2014년에 상을 수상한 출판사 범우사의 대표이자, 수필가인 윤형두 작가가 인상 깊은 소감을 남겼다.
"내 문학적 토양이 있었다면 그 토대는 '순천'이다."
돌이켜보니 순천에는 인물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글재주가 뛰어난 작가들이 많다. 그리고 글재주가 뛰어난 작가들 중에 순천을 사랑하는 이가 많다. 하지만 오래전 문학 속 순천과 지금의 순천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갯벌과 갈대가 전부였던 순천만 일대에는 대규모의 정원이 들어섰고, 작가들이 기억하는 옛 도심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스무 살, 깍쟁이들만 모여 산다는 서울에 올라와서 무시당하기 싫은 마음에 순천 자랑을 하고는 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서울 친구들에겐 별 관심도 흥미도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래도 '촌놈'은 창피한 줄 모르고 고향 자랑에 열을 올린다. 결국 나는 드라마에서까지 순천 자랑을 늘어놓고야 말았다.
서울과 지방의 대결로 시작해 순천과 여수의 대결로 넘어간 싸움에서 결국 주인공은 여수에는 없는 뉴코아 백화점으로 고향 자랑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서울 친구들은 킥킥대며 웃기 바쁘다. 나를 도와준다며 순창고추장과 순천향대학교를 이야기하는 녀석들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그때는 왜 그렇게 지방을 무시하면 욱 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사실,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순천은 조계산을 따라 소백산맥 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도심 한가운데 봉화산이 우뚝 솟아있고 그곳을 가로지르는 동천을 따라가다 보면 드넓은 갯벌의 순천만이 나타난다. 인구는 30여 만 명으로 교통이 좋아 유동인구도 많은 편이다. 또한 1948년 여순사건의 아픈 기억과 왜란을 이겨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순천 출신 작가들의 순천 자랑은 비단 오늘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김승옥, 정채봉, 서정인, 조정래 등을 순천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는데 그들의 작품을 보면 직접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고향에 대한 애정을 담아내고 있다.
▲ 순천 출신 작가들의 순천 자랑은 비단 오늘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김승옥, 정채봉, 서정인, 조정래 등을 순천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는데 그들의 작품을 보면 직접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고향에 대한 애정을 담아내고 있다. 사진은 순천 와온해변. ⓒ Wikimedia Commons
"순천은 뒤로 높은 산이고 앞으로 들판 건너 바다여서 이름대로 우순풍조, 날씨 좋고,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고, 우리나라 어느 고을이나 마찬가지로 인심 좋고, 사람들이 순박했다."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순천 밖으로 나간 적이 별로 없다는 서정인 작가의 산문 <기억 속의 고향>은 순천에 대한 탁월한 묘사가 돋보인다. 지리적인 순천의 모습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본인이 겪고 기억한 고향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기차가 곡성역에 닿으면 집에 다 온 것 같다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책 (<개나리 울타리> 서정인 / '기억 속의 고향' 일부)
"순천의 흙은 흑토와 황토가 모두 차져서 안 되는 농작물이 없고 그래서 꽃과 과일도 제일이다."못된 병마는 정채봉 작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병실 창밖의 저녁노을을 보면서 눈물을 머금다가도 순천 출신이라며 책에 사인을 요청하는 간호사에게 생긋 웃음을 건넨다. '고향 사람을 타향에서 흰 구름 스치듯 보네' 그는 순천 사람들을 유난히 반가워했고, 먼저 말 거는 것을 즐거워했으며 순천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책 (<엄마 품으로 돌아간 동심> 정채봉 / 본문 일부)
2013년 순천국제정원박람회에서 소설 <태백산맥>의 뮤지컬이 선보였고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당시 정원박람회 홍보대사이기도 했던 조정래 작가.
"태백산맥은 40, 50대들이 20대 때 읽었던 소설입니다. 그런데 예전 20대는 통일의 필연성을 생각했는데 지금 20대는 역사에 대한 망각이 있는 것 같아요. 뮤지컬의 첫 공연이 소설이 시작된 고향이라서 반가웠어요."
1948년 여순사건 이후부터 농지 개혁에 대한 치열한 저항과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인 사건을 잘 담아낸 <태백산맥>. 그 거대한 이야기는 조정래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순천의 아픈 기억에서부터 시작한다.
"무진(霧津)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문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소설 <무진기행>의 무진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다. 무진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별할 것 없는 도시다. 주인공 '나'의 이상이기도 했고, 현실에 쫓겨 달아난 이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김승옥 작가는 무진이 바로 자신의 고향인 순천이고, 그곳에서 겪었던 일을 모티브로 했다고 밝혔다.
-책 (<무진기행> 김승옥 / 본문 일부)
순천에서 나고 자랐고, 어린 시절에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작가들의 작품에 고향 이야기가 담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글을 쓰는데 가장 강력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순천이 비단 출신 작가들에게만 애정의 대상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여행지 혹은 고향, 누군가에게 순천이란
▲ 화포해변박완서 작가가 좋아했던 화포해변 ⓒ 순천시청
"봄날 그 어느 꽃보다 화포 바다의 갯벌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작가는 순천 갯벌에서 작업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바다가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다. 날씨 좋은 날에는 순천 화포해변에서 여수 앞바다와 고흥까지 내다보이고, 겨울에는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바다가 주는 꼬막을 담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그녀에게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게 다가왔을 것이다. 민병일 시인은 박완서 작가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 고구마와 초콜릿을 나눠 먹으며 '날 따뜻해지면, 아끼고 사랑했던 순천 와온 바닷가를 같이 걷자'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공지영 작가의 소설 <도가니>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극단적인 이면을 파헤쳤고 제도적인 문제에 대한 이슈를 가져왔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꺼내기엔 두렵고 불편했던 거짓과 폭력의 이야기를 작가 특유의 감수성으로 잘 담아냈다. 공지영 작가는 <도가니>에서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을 오마주 하며 '현대문학에서 유일하게 거론된 가상 도시 무진과 무진의 안개 이미지를 빌려오자, 소설 속 청각장애인, 안개, 권력층의 은폐의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조정래 작가가 태어난 곳이자 정채봉 작가가 할머니를 따라다니다가 들은 설화에서 <오세암>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선암사는 순천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그리고 법정스님은 '순할 순'에 '하늘 천'을 쓰는 순천의 조계산 송광사의 작은 암자 불일암에 오래 머무르기도 했다. 17년 동안 홀로 이곳에서 지내며 수행과 책 읽기, 집필 작업에 몰두하였고 <무소유>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서편제>, <눈길>의 이청준 작가는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좌 교수를 역임했다. 순천대학교는 매년 추모 학술제와 기념행사를 개최하며 그를 기억하고 있다.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는 <사평역에서> 시인 곽재구와 <마당 깊은 집> 소설가 김원일이 미래의 작가들을 가르치고 있다.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비롯해 왜란을 다룬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순천왜성. 그리고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를 지내기도 했던 순천의 낙안읍성은 드라마 <허준>, <대장금>을 비롯해 영화 <아름다운 시절>, <YMCA 야구단> 등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 윤형두 작가<범우사>의 대표이자 수필가인 윤형두 작가 ⓒ 범우사
순천문학동우회는 2004년부터 '순천문학상'을 재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제1회 수상자 서정춘 시인을 비롯해 그동안 허형만 시인, 김승옥 소설가, 정조 희곡작가, 조정래 소설가, 서정인 소설가 등이 선정되었다. 2014년에 상을 수상한 출판사 범우사의 대표이자, 수필가인 윤형두 작가가 인상 깊은 소감을 남겼다.
"내 문학적 토양이 있었다면 그 토대는 '순천'이다."
돌이켜보니 순천에는 인물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글재주가 뛰어난 작가들이 많다. 그리고 글재주가 뛰어난 작가들 중에 순천을 사랑하는 이가 많다. 하지만 오래전 문학 속 순천과 지금의 순천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갯벌과 갈대가 전부였던 순천만 일대에는 대규모의 정원이 들어섰고, 작가들이 기억하는 옛 도심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순천은 동서도 몇 배가 늘어났다. 동쪽으로 조례 생목까지 집단주택들이 들어서고 서쪽으로도 서소학교며 관음사 밑에까지 집들이 꽉 들어찼을 것이다. 그는 순천에 가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의 순천은 이제 아무 데에도 없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있었다."모양새는 달라졌어도 그곳은 여전히 순천이다. 누군가에겐 마음 속의 추억으로, 누군가에겐 걸어보고 싶은 여행지로, 누군가에겐 위로받고 싶은 고향으로.
-책 (<개나리 울타리> 서정인 / '기억 속의 고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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