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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과 북이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는다

[중국의 고대문화 들여다보기 ⑬] 성안 종루와 고루

등록|2016.06.21 13:54 수정|2016.06.21 13:54

▲ 서안 종루 ⓒ 이상기


종루 근처 종루서점에서 차를 내린 우리는 걸어서 종루로 향한다. 종루로 가려면 지하도를 통해 지하철 2호선 종루역으로 내려가야 한다. 지하철 2호선은 서안을 남북으로 관통한다. 그에 비해 지하철 1호선은 서안을 동서로 관통한다. 그리고 두 지하철이 북대가(北大街)역에서 교차한다. 종루역은 북대가 바로 남쪽 역으로 사람의 통행이 가장 많은 역이다.

역에서 나는 특별한 포스터를 하나 발견했다. 2016년 5월 18일이 국제 박물관의 날이라는 것이다. 그래선지 포스터에 문물을 사랑하고, 고건축을 사랑하고, 박물관을 사랑하라고 썼다. 그 아래로 서안의 박물관 목록을 열거해 놓았는데, 무려 121개나 된다. 그중 1위가 섬서역사박물관, 2위가 진시황릉박물관, 3위가 서안 비림박물관이다. 이 중 비림박물관은 이미 보았고, 섬서역사박물관과 진시황릉박물관은 5월 17일에 볼 것이다.

▲ 서안박물관 목록 ⓒ 이상기


사실 이번 답사여행을 기획할 때 박물관을 너무 많이 넣었다고 일부 회원이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중요한 박물관만 해도 일곱 군데나 되기 때문이다. 앞에 언급한 세 군데 외에 이미 본 함양박물관, 무릉박물관, 18일에 보게 될 건릉박물관, 법문사박물관이 그것이다. 그 외 오전에 본 섬서성 미술박물관, 지금 찾아가는 종고루박물관, 17일에 보게 될 화청궁진보관, 임동박물관을 합하면 모두 11군데나 된다.

많은 사람들이 박물관을 따분하다고 하는데, 문명과 문화의 진수는 다 박물관에 모여 있다. 그러므로 박물관을 보지 않고는,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예술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강우방 선생은 논문이 책에서 나오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는 논문이 박물관과 현장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현장을 중시하지 않고 책만 가지고 책상에서 쓰는 논문이나 글은 틀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물관을 찾는 것은 답사여행의 기본이다.

종루에는 경운종 복제품이 걸려 있다

▲ 비림박물관에 있는 경운종 ⓒ 이상기


종루를 가려면 지하 종루역에서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종루는 도로 위 길 안에 고립되어 있다. 우리는 종루의 북쪽 통로를 통해 종루로 접근한다. 종루 북쪽에 작지만 작은 광장이 있어 이곳에서 단체사진도 찍고 건축물도 올려다본다. 종루 주변으로는 꽃을 심어 화사한 느낌이 나게 만들었다. 꽃의 색깔도 빨간색, 분홍색, 노란색, 보라색으로 다양하다.

종루에 오른 우리 일행은 먼저 종을 살펴본다. 그런데 종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이 종은 높이가 2.47m, 무게가 6t 정도 나가는 청동종이다. 6각 호형으로, 상하로 6개의 줄이, 좌우로 세 개의 줄이 처져 있다. 이들 선을 기준으로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눌 수 있다. 종의 바깥면에 용, 봉황, 사자, 소, 학이 돋을새김 되어 있고, 곳곳에 비천문양이 있다.

▲ 예종이 찬하고 쓴 명문 ⓒ 이상기


하대 가운데에는 명문이 있어, 종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이 명문은 당 황제 예종(李旦)이 직접 찬하고 글씨를 썼다고 한다. 앞부분에서는 도교의 신비하고 현묘한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뒷부분에서는 종을 찬양하고 있다. 기(氣)가 모여 진(眞)이 되고, 허(虛)가 모여 극(極)이 되며, 대도(大道)는 무위(無爲)해서 만물을 구제하고 선(善)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내용이 상당히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곳에는 원래 당나라 예종 때인 711년(景雲 2년) 만들어진 경운종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 종이 1953년 비림박물관으로 이전 전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 있는 종은 복제품으로 문화재적 가치는 없다. 이 종을 걸어놓고 있는 종루는 성안 건물 중 가장 높고 두드러진 목조건축이다. 높이가 38m나 된다. 1384년 현재의 위치보다 서쪽에 처음 지어졌으며, 158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그리고 청나라 시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종루를 한 바퀴 돌며 주변 살펴보기

▲ 종루 남쪽 남대가의 모습 ⓒ 이상기


종루 1층에는 종루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가운데는 공연장이 있어 편종을 중심으로 악기 연주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연주는 정해진 시간에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2층으로 올라가면 사방으로의 조망이 훨씬 좋다. 먼저 남쪽을 살펴본다. 남쪽으로 이어진 남대가 방향 바로 앞 서쪽에 종루반점이 있고, 동쪽에 개원상성(開元商城)이 있다. 여기서 반점은 호텔이고, 상성은 백화점이다.

이들 호텔과 백화점은 아직도 서안에서 가장 유명하다. 동쪽으로는 중국우정국(郵政局)이 있고, 그 앞으로 길게 동대가가 이어진다. 동서대가는 남북대가에 비해 가로수가 무성하고 길이가 길다. 그래서 동서대문이 아주 멀게 느껴진다. 그에 비해 남북대가는 거리가 짧아 남대문과 북대문이 아주 가까이 보인다. 남대문인 영녕문까지 거리가 가장 가까워 700m 밖에 되지 않는다.

▲ 종고루 광장과 상가 ⓒ 이상기


서쪽으로는 종루와 고루를 연결하는 광장과 상가가 있다. 이곳은 관광과 휴식 그리고 식사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종합 위락단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우리는 종루를 보고나서 그 상가와 광장을 지나 고루로 갈 것이다. 종루와 고루 사이의 거리는 400m 정도다. 이곳 종루 2층에는 도교의 신선들을 도자기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기도 하다.

고루에서 24절기를 대표하는 북들을 만나다

▲ 고루 북쪽면 ⓒ 이상기


고루는 종루보다 4년 빠른 1380년에 지어졌다. 종루와 달리 현재의 위치를 계속 유지해왔으며, 600년 가까이 저녁부터 밤까지 북을 쳐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재는 서안성벽과 함께 과거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로 남아 있다. 고루의 남쪽에는 문무성지(文武盛地)라는 편액이, 북쪽에는 성문우천(聲聞于天)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문과 무가 번성하는 땅이고, 하늘의 소리를 듣는 곳이란 뜻이다.

그리고 고루 외곽에는 동쪽과 서쪽에 4개의 큰 북이 걸려 있고, 남쪽과 북쪽에는 24절기를 대표하는 북이 12개씩 걸려 있다. 봄에 해당하는 절기가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다. 이들 절기가 전서체로 북면에 적혀 있다. 여름에 해당하는 절기가 입하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다. 이들은 고루의 남쪽에 걸려 있다. 가을에 해당하는 절기가 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이다. 겨울에 해당하는 절기가 입동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이다. 이들은 고루의 북쪽에 걸려 있다. 

고루박물관에서 만난 다양한 북들

▲ 고루박물관 ⓒ 이상기


이들을 보고 실내로 들어가면 고루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중국 여러 지방의 다양한 북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 가운데는 연주용 북과 편종이 있어 특별한 행사시 이들을 연주한다고 한다. 이들 주변으로 북이 진열되어 있는데, 북의 재료에 따라 돌북(石鼓), 도자기북(陶鼓), 쇠북(金鼓) 등이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북은 소가죽으로 만들어진다.

이들은 모두 타악기로, 노래와 춤의 반주용으로 사용되었다. 또 지방에 따라 크기와 소리 그리고 연주법이 달라, 단순한 악기 치고 북은 종류가 정말 다양하다. 그중 나는 장족이 사용하는 소고(小鼓)인 액(額)에 주목한다. 액은 종교적인 행사에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가무의 반주악기로도 쓰인다고 한다. 한족은 소고라는 말 대신 수고(手鼓)라는 말을 사용한다.

▲ 액과 편고 ⓒ 이상기


이곳에는 조선족의 편고(扁鼓)가 있다.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서 보내온 것으로, 무용에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 쪽에서는 별로 보지 못한 북으로, 북한 지방에서 주로 사용된다고 한다. 신장위구르 자치구 지방의 봉고(蜂鼓)도 특이하다. 도자기와 기와 같은 것으로 몸통을 만들고 소가죽을 씌워 만들었다. 그리고 티베트와 몽골 지역 라마사원에서 사용하는 신고(神鼓)도 있다.

이처럼 북은 음악용, 오락용, 의례용, 전시용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통신용 또는 군사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사물놀이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독자적인 악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북은 이처럼 우리의 삶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해 왔다. 이들 북을 살펴보고 나서 우리는 고루를 나온다.

▲ 사람들로 붐비는 회민가 ⓒ 이상기


고루 주변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시장이 잘 발달해 있다. 그것은 회민가(回民街)와 서양시가(西羊市街)와 같은 이슬람 상인거리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중앙아시아 출신의 회교도들은 장사로 먹고 살아왔다. 그들이 중국에 들어와 상가를 형성하고 산 곳이 바로 북원문(北院門)과 서성방(西城坊) 사이 청진사(淸眞寺) 지역이다. 그 중 청진대사는 서안의 대표적인 이슬람 사원이다. 우리는 그 사원을 찾아간다. 그리고 나서 시장을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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