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씨들은 빗자루만 들어도 명필?
양천 허씨 직계 5대 큰 화맥의 뿌리, 남종화의 산실 '진도 운림산방'
▲ 진도 첨찰산 자락에 들어앉은 운림산방. 진도를 예술의 고장으로 승화시킨 중심지다. 국가명승 제80호로 지정돼 있다. ⓒ 이돈삼
진도 운림산방은 유서 깊은 곳이다. 시·서·화에 능했던 조선의 대표 화가 소치 허련에서부터 그의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 증손자 임전 허문, 고손자 오당 허진까지 일가 직계 5대가 200여 년 동안 그림을 그려온, 큰 화맥의 뿌리다. 진도를, 나아가 남도를 예술의 고장으로 승화시킨 중심지다. 국가명승(제80호)으로 지정돼 있다.
허씨 일기가 이곳에 터를 잡은 건 1857년. 소치가 나이 50살 때 화실을 꾸미고 머물면서부터다. 그의 후손들도 이 집에서 대를 이어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스레 남종화의 본거지이자 산실이 됐다.
'진도에서는 개도 붓을 물고 다닌다'거나 '허씨들은 빗자루나 몽둥이만 들어도 명필'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이들 양천 허씨 일가에게서 유래됐다.
▲ 운림산방에 복원된 소치 허련의 생가. 소치 허련이 37년 동안 살았던 집이다. ⓒ 이돈삼
▲ 운림산방에 있는 소치기념관. 소치 허련 일가의 화풍을 훑어볼 수 있는 곳이다. ⓒ 이돈삼
첨찰산 자락에 들어앉은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1808∼1893)이 37년 동안 살았던 집이다. 지금의 산방은 소치가 생전에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부채 산수화로 그려 놓은 것을 복원한 것이다. 소치는 여기서 미산 허형을 낳았다. 미산도 여기서 그림을 그렸다.
소치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는 재주가 빼어났다. 28살 때 두륜산방(지금의 해남 대흥사)의 초의대사 밑에서 공제 윤두서의 그림첩을 보면서 그림과 글을 익혔다. 33살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한양으로 올라가 추사 김정희에게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았다.
추사는 소치의 그림을 보고 '화법이 아름다우며, 압록강 동쪽에서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했다. 허련의 호 '소치(小痴)'도 추사가 내려줬다. 중국의 대화가 대치 황공망과 비교한 아호였다.
▲ 소치기념관 내 전시실. 소치 허련에서부터 일가 5대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곳이다. ⓒ 이돈삼
천부적인 재질과 의지를 지닌 소치는 40살 때인 1847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다. 이후 임금과 열다섯 번이나 단독으로 마주했다. 흥선대원군 등 권문세가들과도 어울리며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1849년 헌종이 승하하고,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지금의 운림산방 자리에 화실을 짓고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
소치 허련의 화풍은 아들인 2대 미산 허형, 3대 남농 허건과 그 동생인 임인 허림에 이어 4대인 임인의 아들인 임전 허문, 5대인 남농의 손자인 허진으로 이어져 남도화단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 남종화의 큰 화맥을 이룬 소치 허련과 미산 허형. 진도를, 나아가 남도를 예술의 고장으로 승화시킨 당사자들이다. ⓒ 이돈삼
미산 허형(1861∼1938)은 소치 허련의 막내아들이다. 어려서 천연두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 나라 잃은 격동기를 살면서 고난스런 화업의 길을 걸었다. 생계를 위해 화필을 들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60살이 넘어서야 그림 세계를 인정받았다. 가문의 화업을 남농 허건에게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다. 아버지 소치처럼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인연복도 없었다. 자손과 제자복은 달랐다. 두 아들 남농 허건과 허림 형제를 통해 자신의 예술혼을 꽃피웠다. 의재 허백련(1891∼1977)도 그를 통해 그림에 입문했다.
훗날 남농은 목포 유달산 자락에 둥지를 틀었다. 의재는 광주 무등산에 터를 잡고 서화가들의 모임인 연진회를 결성했다. 예향 남도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 그 윗 가지가 미산 허형이다.
▲ 목포에 있는 남농기념관 전경. 허씨 가문의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남농 허건이 세웠다. ⓒ 이돈삼
▲ 남농기념관 내 전시실. 소치 허련과 남농 허건 등 허씨 일가의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 이돈삼
남농 허건(1908∼1987)은 미산 허형의 아들이며, 소치 허련의 손자이다. 5살 때까지 진도에 살다가 아버지 미산을 따라 강진을 거쳐 목포로 옮겨갔다. 그림쟁이의 배고픔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등 너머로 사군자를 익혔다.
향토색 짙은 풍경을 천부적인 그림 솜씨와 가문의 독창적인 갈필법을 써서 많은 걸작을 남겼다. 거친 선으로 빚어낸 소나무의 독특한 구성과 생동감 있는 강렬한 필선이 특징이다. 자신만의 새로운 기법을 더해 새로운 화풍, 신남화의 창시자로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남농은 한쪽 다리의 병이 악화돼 무릎 아래쪽을 잘라냈다. 오랜 가난과 불구의 몸을 무릅쓰고 남농미술원을 열어 제자를 양성했다. 1983년에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됐다. 1985년엔 목포의 명소인 갓바위 인근에 남농기념관을 건립, 가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오랫동안 황폐한 땅으로 남아있던 운림산방을 복원한 것도 그의 공력이다. 동생의 아들 임전 허문을 통해 대화맥을 이었다.
임전 허문(1941∼)은 남농의 막내 동생(임인 허림, 1917∼1942)의 외아들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큰아버지인 남농의 슬하에서 그림공부를 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온 갈필법에다 자기만의 안목을 접합시켜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하며 찬란한 화맥을 4대째 잇고 있다. 가문의 그림집을 펴내기도 했다. 5대는 오당 허진(1962∼)이 잇고 있다. 현재 전남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소치 허련의 기념비. 허씨 일가 5대의 큰 화맥을 이룬 허련을 기념한 비다. 진도 운림산방에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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