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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에게 얼굴 그려줬더니, 좋아하더라고..."

중학 2학년 중퇴, 77세 시골화가 한 분 소개합니다

등록|2016.07.05 07:22 수정|2016.07.05 10:03
[관련 기사] 초등학교 1학년, 68세 할머니를 소개합니다

▲ 스티브잡스, 김무영 할아버지가 그렸다. ⓒ 신광태


"가난 때문이었죠. 중학교 2학년까지 다닌 게 전부예요."

강원도 화천 사내면 광덕3리에 사시는 김무영(77) 할아버지는 '미술을 전공했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사진만 놓고 이렇게 정교한 묘사가 가능할까. 명암 배치나 원근감은 전문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거란 내 생각을 뒤집었다.

"인민군 얼굴을 그려줬더니, 그렇게 좋아하더라고..."

한국전쟁 당시 김 할아버지는 11살이었다. 인민군들은 두려운 존재였다. 수가 틀리면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했다. 자신도 살고 부모도 살릴 방법을 생각했다. 몰래 무섭게 생긴 한 인민군 얼굴을 그렸다. 그러자 그들은 앞다투어 줄을 섰다. "당시 변변한 카메라 하나 없던 시절이라 자신과 똑같이 그려주니까, 좋아했던 게야." 김 할아버지는 당시 상황을 그렇게 회상했다.

"그땐 묵묵히 계시던 아버님이 6.25가 끝나자, 화를 벌컥 내시는 겁니다."

아이는 그림 그리는 게 좋았다. 잘 그린다는 말을 들을 땐 으쓱해지곤 했다. 인민군을 그려주고 목숨을 부지했다는 수치 때문일까, 휴전 후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는 아들을 못마땅히 여겼다. 아이가 가지고 있던 연필과 종이를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 김무영 어르신 부부(왼쪽 위말례 할머니) ⓒ 신광태


중학교 2학년에 진학한 소년은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가난 때문이었다. 남의 집을 전전하며 농사일을 도왔다. 숟가락 하나 줄이는 게 그나마 집안을 돕는 일이라 생각했다.

미련이 남아서일까,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다.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그리기도 했다.

▲ 화천 감성마을 촌장 이외수 작가도 그렸다. ⓒ 신광태


"밤을 새워도 힘들지 않더라고요."

70세 나이에 일에서 손을 뗐다. 얼마 되지 않은 퇴직금을 쪼개 화구(畫具)를 샀다. 사람 얼굴 그리는 게 좋았다. 마치 그 대상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빌 게이츠도 만나고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도 만났다. 시공을 초월해 세계적 명배우 알랭 들롱도 그의 친구가 됐다. 초상화에 몰두한 이유다.

▲ 최문순 화천군수, 사진보다 더 사진같다. ⓒ 신광태


"군에 나갈 일 있으면 이거 군수님 가져다 드리세요."

어느 날 느닷없이 나를 찾은 김무영 할아버지는 정성스레 싼 보자기를 풀었다.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그림. 최문순 화천군수 얼굴이다. 인터넷에서 찾아 15일간 그렸단다. 일을 할 땐 손이 저리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그림을 그릴 땐 그런 증세가 없다고 했다. 즐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차이 아닐까.

"초상화 전시 한 번 하실래요?"
"액자도 맞추어야 하고, 마땅히 걸 장소도 없잖아요."


지역 문화센터를 떠올렸다. 2층 규모 건물에선 에어로빅, 설장구, 컴퓨터 강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린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장소다. 공간을 활용하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다양성도 확보된다. 액자는 목공예품 제작 업체를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맞췄다.

▲ 김무영 할아버지 그림 전시실. ⓒ 신광태


"연세도 많으신 분이 잘 그리셨네..."

초상화 20점을 전시했다. 관람자들 반응이 의외로 시큰둥하다. 나만 감동했었나!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작가가 미술 전공인 줄 아는 듯했다. 설명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그림을 그리신 김무영 작가는 미술을 전공하신 분이 아닌 가난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때 중퇴하신 분입니다. 누구나 노력을 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것을 알려 드리기 위해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와~ 대단하신 분이네... 정말 똑같이 그리셨네."

짧은 안내 문구를 붙였더니 반응이 달랐다. 그림 관람 시간도 길어졌다. 일부러 아이 손을 잡고 찾는 주민도 늘었다.

"독학으로 그리셨대. 너도 뭐든 열심히 하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거야."

▲ 김무영 할아버지는 필자의 요청에 화구를 보여줬다. ⓒ 신광태


"지역주민들에게 무료로 그림 지도를 하고 싶습니다. 학생이나 다문화 가정이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타고난 소질보다 열정과 관심이 중요하다고 했다. 소질은 노력보다 못하단 말도 덧붙였다. 할아버지는 다문화 가정주부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 부족을 아쉬워했다. 문화센터에 미술 분야를 하나 더 추가할 수 있게 됐다.

▲ 세계적 명배우 알랭 들롱이다. ⓒ 신광태


(미술 전공이 아니기에) 교과서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김 할아버지만의 노하우, 초상화 정교하게 그리기를 쉽게 배우는 지름길이 열렸다.
덧붙이는 글 * 인터뷰는 6월 2일에 했습니다.
* 이 기사를 쓴 신광태 시민기자는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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