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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회] "금화 5만냥"... 입이 떡 벌어지는 제안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70회]

등록|2016.07.06 16:25 수정|2016.07.06 16:25

어리둥절한 관조운과 혁련지를 바라보며 조복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신경 쓰지마. 내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이제 너희는 너희가 할 일을 해야겠지."

야릇한 미소와 함께 조복이 말했다.

"너는 노인네를 업고, 계집 너는 앞장 서."

관조운이 담곤을 업는 걸 보자 조복은 검을 검집에 넣고는 혁련지에게 다가갔다. 혁련지가 두 손이 묶인 채로 수도(手刀)의 날을 세워 가격하자 조복이 어느새 혁련지의 손목을 잡았다. 뛰어난 금나술이다.

"들고양이 같은 년이군. 걱정 마, 널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니까. 이 검은 너에게 돌려주지."

조복이 혁련지의 허리에 검을 꽂았다.

"여기 쓰러진 사람은 전광이라는 금의위 사방이야. 너희는 대명(大明) 어림군의 금의위 위관을 방금 죽인거야. 네 년의 검이 이 사실을 증명하지."

조복을 입맛을 다시고는 말을 이었다.

"다행히 영반인 내가 흉악무도한 살인자를 제압했어. 자, 이제 살인범과 그 일당들을 연행할까?"

조복이 자신의 검을 꺼내 혁련지를 겨누었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자운헌 마당으로 나가려 하자 조복이 말을 했다.

"이거 왜 이래, 미리 탈출로를 살펴보고 왔어. 절벽에 샛길이 있는 걸 알고 있으니. 그길로 가."
"당신은 금의위 아니오?"

관조운이 이상해서 반문했다. 금위위에서 체포를 하러 나왔다면 당연히 구사곡으로 이어지는 길로 가자고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는 다른 금의위 무사를 죽였다. 이 자는 금의위 옷만 입은 다른 괴한인가 아니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알 필요 없어."

조복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관조운은 담곤을 업고 조심스럽게 절벽 사이의 샛길로 들어섰다. 몸이 움직이자 담곤은 가느다란 신음을 내뱉었다. 정신이 조금씩 드는 것 같았다.

길은 사람의 내왕이 적어 그런지 잡풀로 가득했다. 이들의 행렬을 누군가 보면 기이하다고 여길 것이다. 맨 앞에 있는 낭자는 손목이 묶인 채로 잡풀을 헤치고, 뒤를 따르는 젊은 사내는 늙은 노인을 업고, 맨 뒤의 기골이 장대한 사내는 마치 마소를 부리듯 이들을 감시하고 따르고 있다. 절벽이 가파르다고는 하나 모두들 무공을 익힌 전력이 있는지라 별 어려움이 봉우리에 다다랐다. 대략 한 시진 정도 걸렸다.

반야봉 정상의 바위를 에돌아 내려가니 사방 스무 걸음 정도의 공터가 나왔다. 조복은 그곳에서 쉬자고 했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했다. 관조운은 담곤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담곤은 그새 정신이 들어 있었다.

"사숙어른, 괜찮으십니까?'
"으음, 괜찮네.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군."

관조운이 담곤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왼쪽 다리 무릎 위쪽에 세치 정도의 칼자국이 깊게 패였다.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 흘렀다.

"제가 보겠어요."

혁련지가 담곤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 손이 묶인 채로 담곤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아무래도 지혈을 해야겠어요."

혁련지가 말을 하며 조복을 쳐다보았다. 조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 제 치맛자락을 가로로 길게 잘라주세요."
"아냐, 내 옷을 자르지."

여자의 치마를 어떻게 자르겠느냐는 투로 관조운이 말했다. 혁련지가 관조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관조운은 왠지 뜨끔했다. 그녀에게 다른 의도가 있는 모양이다. 혁련지가 등을 돌리자 관조운이 그녀의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조복은 물끄러미 바라보며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조복은 담곤이 무기력해진 상태에서 혁련지나 관조운의 무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너희 둘이 덤벼도 나 하나는 못 당한다. 게다가 너희 사숙이 부상당해 거동을 못하는 상태에서 어찌 도망이라도 가겠느냐. 그는 무영객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운부산 조수협을 지나던 중 까마귀 울음소리를 들렸다. 그가 접선을 지시한 것이다. 대원들을 쉬게 하고는 볼 일 보는 척하고 혼자 숲에 들어갔다. 잠시 후 덤불 속에서 그 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이번 일의 마무리는 자네가 해주었음 해."
"내가 할 일은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 아니오?"
"알아, 사정이 있어 그러니 한 가지 임무를 더 주겠어."
"무슨 일이오."
"담곤과 서생, 낭자를 납치해 와. 일이 힘들면 서생과 낭자는 처치해 버리고 담곤만 데려와도 돼."
"보수는?"
"금화 오만 냥."

조복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금화 오만 냥이면 그의 사명은 여기서 끝낼 수 있다. 그가 금의위에 적을 둔지 11년. 진작 장반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요(瑤)족 출신이라는 성분 때문에 영반에 머무르고 있다. 아니 영반이라도 나름 뛰어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무공은 금의위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고, 그의 기찰·탐문·수집 능력은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작 금릉의 영반이라니. 물론 금릉이 북평 못지않게 중요한 고을일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까진 인정받아 정탐과 체포를 담당하는 특수직 제기(緹騎)를 맡긴 했다. 그래도 자신의 능력에 비해 대우가 제대로 되었다곤 할 수 없다.

요족인 그가 금의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유래가 있었다. 전 황상 성화제는 남쪽의 요족을 정벌하고는 포로로 잡혀온 여인 중에서 후궁을 삼았다. 그녀가 기비(紀妃)다. 기비가 황상의 총애를 받자, 그녀의 청에 의해 포로로 잡혀 온 요족이 대거 사면되었다. 심지어 관직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조복은 아버지에게서 요족의 무예를 배웠다. 조복의 아버지 조예는 요족의 무장이었으나 명(明)의 관직을 거부했다. 그러나 아들이 금의위에 들어가는 것까진 막지 않았다. 조복을 특채한 금의위 교위는 그의 무공에 관심이 있었다. 비록 변방의 만족(蠻族) 출신이지만 무공이 특이하고 변방의 언어를 구사하니 남쪽의 변란에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복에게 요족의 밀명이 전해진 건 5년 전이었다. 요족이 한족의 지배를 벗어나 옛 영화를 되찾고자 봉기를 준비하고 있으니 가담하라는 아버지의 지시였다. 조복은 별 망설임 없이 금의위에서 간세(姦細) 업무를 해냈다. 그리고 그에게 떨어진 또 하나의 지령은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개인적으로 강남의 부호들을 조사하고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무영객을 만났다. 자신의 정보를 그는 꽤 비싸게 사주었다.

무영객은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거금을 제시했다. 오만 냥이면 당장이라도 아버지와 함께 요족 땅으로 돌아가 살 수 있었다. 한족의 멸시와 견제를 떨쳐버리고 편히 살 수 있는 것이다. 조복은 요족의 봉기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어디든 중원을 벗어나 차별받지 않고 맘껏 살면 그만이다.

무영객이 자기에게 담곤과 일당들을 반야봉으로 데려오라고 했을 때 망설임 없이 수락한 건 이번 일로 모든 걸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복은 마음이 급했다. 풍장반과 은화사 예총관이 오기 전에 일을 마무리져야 했다. 자신의 오른팔 전광도 무공 수위는 고수급에 속했으니, 자신과 전광이 함께 나서면 담곤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담곤이 쉽게 제압된 것이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마침 전광에게 틈이 보였다.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하려고 했으면 전광석화처럼 해치워야 했다. 전광 역시 금의위 직을 수행하면서 수많은 이속과 관헌과 벼슬아치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지 아니했던가. 눈앞의 서생과 낭자 정도는 한쪽 팔만으로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낭자가 전광과 대결하는 걸 얼핏 보니 제법 초식을 펼치는 것 같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고 정교해 보이지 않았다. 무예 수련에 한동안 공백이 있었다는 증거다.

조복은 경계의 눈길을 거두진 않았지만 마음은 무영객과의 마지막 거래를 상상하며 자신도 모르게 부풀었다. 그래, 이제 일은 다 됐어. 이들을 그자에게 넘기고, 나중에 정산만 하면 모든 걸 벗어날 수 있어. 무영객이라는 자, 대금에 관한 신용만큼은 확실했지.

혁련지가 일어서자 관조운이 쪼그려 앉아 치마 끝단을 빙둘러 자르기 시작했다. 혁련지는 조복을 보았다. 조복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진 않았다. 이때 덤불에서 부시럭하는 소리가 났다. 조복이 벌떡 일어서 칼을 뽑았다. 그의 발검 솜씨는 일품이었다. 조복은 소리 나는 쪽을 노려보며 검을 꽉 쥐었다. 여차하면 검을 휘두를 기세였다. 혁련지는 이틈을 타 관조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관조운이 매듭을 끊으려고 칼날을 내밀자 혁련지는 살짝 칼집만 내고는 손을 거두었다.

조복이 소리 나는 쪽으로 한 발자국 떼었다. 덤불 속에선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가 있다. 조복은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다시 한 발을 떼었다. 갑자기 꺼어어억, 하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덤불에서 뭔가 뛰쳐나와 조복의 머리 위를 넘었다. 조복은 자세를 낮추고 위쪽으로 검을 그었다. '쉬익' 하는 파공음이 허공을 갈랐다. 뛰쳐나온 것은 사람이 아니라 노루였다. 노루는 순식간에 맞은편 숲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조복의 검에 어딘가를 베였는지 땅바닥에 핏자국이 점점이 뿌려져 있다. 조복이 노루가 도망간 방향으로 몇 걸음 가니 덤불 속에서 아까와 비슷하지만 좀더 가냘픈 '깨액 깨액' 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조복이 다시 돌아왔다.

"쳇, 노루 새끼들였어. 이 근처에 둥지가 있는 가봐."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혁련지와 관조운을 보았다. 혁련지의 손목에 묶인 포승줄이 그대로 있는 걸 보자 조복은 안심한 듯 다시 조그만 바위에 앉았다.

혁련지는 끊어낸 치맛자락으로 담곤의 다리를 정성스럽게 감았다. 손이 묶인 상태에서 천을 감으려니 부자연스럽고 더뎠다. 담곤은 그런 혁련지를 감동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천을 다 감아 매듭을 묶어야 했다. 담곤이 한쪽 끝을 잡고 나머지 끝을 혁련지가 잡고는 서로의 손이 교차했다. 이때 담곤이 혁련지의 손에 묶인 포승줄 매듭을 살짝 당겨주었다. 사숙님은 눈치가 빠르시군, 혁련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한 시각이 지났다. 숲에선 정적이 쌓였다. 조복은 무영객이 언제 나타날지 몰랐다. 오늘밤을 여기서 지내야 될 지도 모른다. 담곤의 부상이 걱정되었다. 출혈이 계속되고 있다. 계집년이 지혈을 한다고 할 때 말리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달리 수상한 짓을 하더라도 그들의 무공 수준으로 볼 때 능히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저들 또한 부상당한 사숙을 놔두고 도주할 것 같지도 않았다.

무영객, 그 자는 올 것이다. 기다리자. 조복은 한편으론 무료하고 한편으론 초조했지만, 오늘 내일로 중원의 인연을 끝낼 수 있다면 아무리 지루하더라도 기다려 줄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월, 수, 금요일 주 3회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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