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짜 분수에 맞지 않는 몫을 요구하는가
[이맛에 헬조선이다 ②] 노동자 무임승차론을 기업가 무임승차론으로 전복시켜라
관련 기사: 최저임금 동결? 디시 주갤이 "이맛헬" 외친 까닭
주류 경제학은 효율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경제학자와 기업가들은 상품(서비스) 생산에 필요한 자원의 투입량 대비 부가가치 산출량이 얼마나 되는지 따지는 '생산성'이라는 지표를 입에 달고 산다. 생산성은 '최소의 투입으로 최대의 산출'을 지향하는 동시에(효율성), 실제로 생산된 상품의 질적 측면도 고려(효과성) 하는 지표다. 이 논리는 사람의 노동조차 사고팔 수 있는 '인적 자원'으로 보는 자본주의와 만날 때도 통용된다.
2017년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 심의가 법정 시한을 넘긴 가운데 오는 11일부터 11차 전원회의가 재개될 예정이다. 노동계와 경영계는 여전히 입장 차를 좁히지 못 하고 있다. 노동계는 생계의 어려움을 들어 최저임금을 최소한 1만 원까지는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경영계는 가장 먼저 "노동생산성 측면에서 접근할 경우 현 최저임금은 매우 과도한 수준"이라는 말부터 꺼내며 동결을 주장한다.
노동자들은 정말 자신들의 생산성에 비해 과도한 요구를 하는 걸까? 정반대로 생각하는 정치인이 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다. 심 의원은 지난 6월 27일 국회 정론관에서 이른바 '살찐고양이법(최고임금법)'을 발의했다. 기본 취지는 경영자야말로 과도한 몫을 분배 받지 못 하게 상한선을 긋자는 거다. 핵심은 '상한선'이 아니다. 바로 경영자야말로 과도한 몫을 챙겨가고 있다는 발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진짜 본질이다.
심상정의 살찐고양이법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인 진짜 이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1543년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고대부터 전해온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을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로 뒤집은 사건이다. 그 후로 사람들은 근거가 있고 가치 있는 발상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부른다.
심 의원의 살찐고양이법은 우선 가치가 있다. 심 의원은 "불평등 해소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라는 가치관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경제주체들이 받는 임금의 최고점(최고임금)과 최저점(최저임금)을 연동해 국민경제의 균형성, 적정한 소득 분배 유지, 경제력 남용 방지를 규정한 헌법 119조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연재 1편에서 살펴봤듯 사람들은 '물가'를 공통적으로 걱정한다.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임금은 오르지 않아 먹고살기 힘드니 최저임금을 인상해달라는 노동자든, 최저임금 인상은 부담스럽지만 물가를 잡으면 먹고 살만해지지 않겠느냐는 자영업자든 마찬가지다. 결국 둘 다 '소비자'라는 이중 신분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한국의 물가 결정의 주도권은 원청-하청 관계, 유통 구조 최상층에 위치한 대기업이 쥐고 있다.
심 의원의 살찐고양이법은 다수가 주도권도 없는 '물가'에 주목하며 제자리를 맴돌 때 '분배'를 바로 건드린다. 물가는 언제든 오르내린다. 그러나 물가가 얼마든 사람들은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구매력'이 있어야만 소비를 할 수 있다. 구매력은 어떻게 갖출 수 있을까. '분배'부터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 사회가 분배할 수 있는 경제 과실은 한정돼 있다. 한 쪽이 과도한 몫을 챙겨가면 다른 쪽이 쪼들리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분배'보다 앞서는 게 있다. 분배의 근거다. 한 쪽이 과도한 몫을 챙겨간다는 걸 증명해야 재분배를 할 수 있다. 심 의원은 "OECD 국가들의 상위 10%와 하위 10% 사이 평균 (임금 격차는) 5~7배인데 반해 한국은 11배가 넘는다"는 근거를 든다. 또한 "2014년 기준 10대 그룹 상장사 78곳의 경영자의 보수는 일반직원의 35배, 최저임금의 180배다. 323개 공기업 중 이사장의 연봉이 1억 5천 만 원을 초과하는 곳도 130곳이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심 의원은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민간 대기업 임직원은 30배, 공공기관 임직원은 10배, 고위공직자는 5배를 넘지 말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또한 "이를 초과하면 부담금 및 과징금을 부과하고 그 수입으로 사회연대기금을 만들어 최저임금자, 저소득층, 비정규직 노동자 지원 사업 등에 사용하자"고 덧붙인다.
OECD 평균과 비교해 곧바로 한국의 상위 10%가 과도한 몫을 챙겨간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건 덜 섬세하고, 또 왜 구체적인 수치로 30배, 10배, 5배가 상한선이어야 하는지 불분명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한국의 임직원, 고위공직자들이 선진국들에 비해 대단한 생산성을 갖췄다는 데 동의할 만한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또한 정치인은 구체적 수치를 정확히 맞추기보다 '정책의 방향성'의 물꼬부터 트는 게 주된 일이다. 따라서 심 의원은 좋은 발상의 전환, 즉 '출발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자본가'라는 큰 범주 내에는 다양한 경제 주체들이 있다. 회사에 소속된 임직원뿐 아니라 세습 재벌이나 건물주 등 다양한 유형이 있다. 살찐고양이법은 우선 임직원의 근로소득 불평등만 건드린다. 그 이외에 자본 세습, 불로소득 등으로 인한 불평등 문제는 유예된다.
그러나 정의당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장기적인 조세제도나 복지제도의 개편이 필요하나, 단기적으로는 대기업 임원 보수 제한을 통해 그 폐해를 일부나마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고, 강령에서도 "보편적 복지는 재정 규모 확대와 증세 없이 이룰 수 없다. 조세는 성장의 방해물이 아니라 소득 불평등을 완화해 정의를 실현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창출하는 원천"이라는 철학을 분명히 한다.
의미망 분석은 특정한 주제와 관련된 메시지들에서 공통적으로 출현하는 핵심어들을 추출해 관계를 나타내는 기법이다. 위 의미망과 같이 정의당 강령을 분석해봐도 9시 방향에 '복지-국가-정의'라는 삼각편대가 출현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의당은 '복지국가'라고 답하고 있다. 물론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는다. 우선 정의당보다 좀 더 왼쪽의 좌파들은 종종 정의당에 대해 '비판적 지지'만을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비판적'이라는 건 정의당의 가치가 좀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건 맞지만 최종 목적지는 아니라는 취지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노동 상품으로서 스펙을 갖추기까지의 비용, 자신의 임금, 임금 이상의 잉여가치를 모두 다 생산한다고 봤다. 그래서 임금 지불만으로 퉁치고 나머지 몫을 가져가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고 봤고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해 자본가라는 계급 자체가 없어져야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정의당은 강령에서 "우리는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사적 소유, 공적 소유, 사회적 소유가 균형을 이루게 할 것이다. 공정한 시장경제, 정의로운 공공 경제, 협동의 사회적 경제가 서로를 보완하고 촉진하는 새로운 상생의 경제 체제를 구축해 나갈 것이다"라고 밝힌다. 정치 체제로도 사회주의가 아닌 "사회민주주의"의 성과를 발전시키겠다고 못 박는다.
반면에 우파들은 마르크스가 자본가도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방식 등으로 지적 노동에 자주 참여하고 높은 투자 위험도 부담해야 한다는 걸 과소평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원 배분 등의 지적 노동의 가치가 인정된들 왜 생산 수단 독점까지 인정해줘야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물론 좌파들도 사적 소유 철폐가 어떻게 더 정의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주는지 증명할 책임이 있다. 이처럼 각자가 생각하는 '목적지'는 다르다.
최저임금 협상, 반칙하지 말고 '공정한 출발선'에서 시작하자
첨예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마르크스, 정의당, 경영계 모두 실은 '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분수에 맞지 않는 몫을 챙긴다고 주장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의당도 그렇게 말한다. 반면에 경영계는 노동자가 분수에 맞지 않는 몫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누가 진짜 분수에 맞지 않는 몫을 요구하는가'가 본질이다. 그런데 여기서 부지불식간에 반칙을 쓰는 쪽이 있다. 바로 경영계다. 경영계가 최저임금 협상에서 선수를 치며 가장 먼저 꺼낸 말은 "노동생산성 측면에서 접근할 경우 현 최저임금은 매우 과도한 수준"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노동생산성'이라는 말을 흘려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노동생산성은 상품 생산에 필요한 다양한 요소 중 '노동'의 투입량을 중심으로 산출량을 따져보는 지표다. 그런데 노동생산성에 자본가의 노동도 포함되는가? 만약 포함된다면 경영계는 노동생산성을 근거로 노동자들이 과도한 몫을 챙겨간다고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순간 경영계 자신들도 과도한 몫을 챙겨간다고 시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분배해야 할 몫은 정해져 있다. 따라서 경영계의 논리대로라면 '경영계가 지나치게 많은 몫을 챙겨가 나머지 노동자들이 지나치게 적은 몫을 챙겨간다'와 '나머지 노동자들이 지나치게 많은 몫을 챙겨가 경영계가 지나치게 적은 몫을 챙겨간다'는 모순된 명제가 모두 참이 되는 이상한 상황에 봉착한다. 결국 노동생산성 자체만 갖고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 과도하다고 주장하는 건 앞뒤 안 맞는 자가당착에 불과하다.
그럼 실제로 노동생산성에는 자본가의 노동도 산입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불분명'하다. '기업 임직원'은 자본가의 일부에 불과하다. 위 자료에서 보듯 노동생산성은 분모를 '근로자수 곱하기 근로시간(노동투입량)'으로 두고 계산한다. 여기서 '기업 임직원'이 근로자수에 산입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유형의 자본가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노동생산성이란 건 노동투입량을 '중심으로' 생산성을 산출해볼 뿐이다.
실제 생산에서는 근로자들의 노력뿐 아니라 자본, 원재료, 에너지 등 다양한 생산 요소들이 투입된다. 이 투입 과정에서 자본가의 지적 노동이 개입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자본가의 실제 노력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다. 현재의 노동생산성 모델은 계층과 같은 사회인구학적 특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자본가의 노력을 과대평가해주는 나쁜 습관까지 있다.
가령 '기업가 신화' 운운하며 분배를 과학의 문제가 아닌 종교의 문제로 논점을 흐리는 사례들이다. GDP와 자본생산성 증가는 '기업가의 노력'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거기에는 노동자들의 노력이 분명 개입돼 있다. 우리는 기업가가 마치 반인반신인 양 지나치게 과장하지만 이건희나 이재용이 '평생' 소모하는 칼로리가 삼성전자 AS기사가 '평생' 소모하는 칼로리보다 대단히 높지도 않다. 전체적인 일이 완성되려면 셋 다 반드시 있어야 한다.
2007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들은 노동자들보다 평균 344배 많은 보수를 받았다. 그러나 1980년에 최고경영자들은 노동자들보다 고작 42배 많은 수익을 올렸다(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참조). 1980년에는 최고경영자들이 지금보다 재능도 적고 일도 덜 했을까? 한국의 최고경영자들이 미국 최고경영자들보다 재능도 좋고 일도 열심히 할까?
우리는 이제 좀 회장님들이 도대체 정확히 얼마만큼의 노력을 하는지 과도한 몫을 챙겨가지는 않는지 측정해볼 때가 됐다. 그런 세련되고 미시적인 측정 모델을 개발하는 건 물론 경제학자들이 책임질 문제다. 그러나 그때까지 심상정 의원의 "OECD 국가들의 상위 10%와 하위 10% 사이 평균 (임금 격차는) 5~7배인데 반해 한국은 11배가 넘는다"라는 근거는 정책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현재 가용한 가장 합리적인 출발점이다.
주류 경제학은 효율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경제학자와 기업가들은 상품(서비스) 생산에 필요한 자원의 투입량 대비 부가가치 산출량이 얼마나 되는지 따지는 '생산성'이라는 지표를 입에 달고 산다. 생산성은 '최소의 투입으로 최대의 산출'을 지향하는 동시에(효율성), 실제로 생산된 상품의 질적 측면도 고려(효과성) 하는 지표다. 이 논리는 사람의 노동조차 사고팔 수 있는 '인적 자원'으로 보는 자본주의와 만날 때도 통용된다.
2017년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 심의가 법정 시한을 넘긴 가운데 오는 11일부터 11차 전원회의가 재개될 예정이다. 노동계와 경영계는 여전히 입장 차를 좁히지 못 하고 있다. 노동계는 생계의 어려움을 들어 최저임금을 최소한 1만 원까지는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경영계는 가장 먼저 "노동생산성 측면에서 접근할 경우 현 최저임금은 매우 과도한 수준"이라는 말부터 꺼내며 동결을 주장한다.
노동자들은 정말 자신들의 생산성에 비해 과도한 요구를 하는 걸까? 정반대로 생각하는 정치인이 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다. 심 의원은 지난 6월 27일 국회 정론관에서 이른바 '살찐고양이법(최고임금법)'을 발의했다. 기본 취지는 경영자야말로 과도한 몫을 분배 받지 못 하게 상한선을 긋자는 거다. 핵심은 '상한선'이 아니다. 바로 경영자야말로 과도한 몫을 챙겨가고 있다는 발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진짜 본질이다.
심상정의 살찐고양이법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인 진짜 이유
▲ 심심상 정의당 대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지난 5월 17일 오후 광주광역시 광주공원에서 열린 제36주년 5.18민중항쟁 전야제 민주대행진에 참석해 참석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권우성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1543년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고대부터 전해온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을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로 뒤집은 사건이다. 그 후로 사람들은 근거가 있고 가치 있는 발상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부른다.
심 의원의 살찐고양이법은 우선 가치가 있다. 심 의원은 "불평등 해소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라는 가치관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경제주체들이 받는 임금의 최고점(최고임금)과 최저점(최저임금)을 연동해 국민경제의 균형성, 적정한 소득 분배 유지, 경제력 남용 방지를 규정한 헌법 119조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연재 1편에서 살펴봤듯 사람들은 '물가'를 공통적으로 걱정한다.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임금은 오르지 않아 먹고살기 힘드니 최저임금을 인상해달라는 노동자든, 최저임금 인상은 부담스럽지만 물가를 잡으면 먹고 살만해지지 않겠느냐는 자영업자든 마찬가지다. 결국 둘 다 '소비자'라는 이중 신분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한국의 물가 결정의 주도권은 원청-하청 관계, 유통 구조 최상층에 위치한 대기업이 쥐고 있다.
심 의원의 살찐고양이법은 다수가 주도권도 없는 '물가'에 주목하며 제자리를 맴돌 때 '분배'를 바로 건드린다. 물가는 언제든 오르내린다. 그러나 물가가 얼마든 사람들은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구매력'이 있어야만 소비를 할 수 있다. 구매력은 어떻게 갖출 수 있을까. '분배'부터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 사회가 분배할 수 있는 경제 과실은 한정돼 있다. 한 쪽이 과도한 몫을 챙겨가면 다른 쪽이 쪼들리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분배'보다 앞서는 게 있다. 분배의 근거다. 한 쪽이 과도한 몫을 챙겨간다는 걸 증명해야 재분배를 할 수 있다. 심 의원은 "OECD 국가들의 상위 10%와 하위 10% 사이 평균 (임금 격차는) 5~7배인데 반해 한국은 11배가 넘는다"는 근거를 든다. 또한 "2014년 기준 10대 그룹 상장사 78곳의 경영자의 보수는 일반직원의 35배, 최저임금의 180배다. 323개 공기업 중 이사장의 연봉이 1억 5천 만 원을 초과하는 곳도 130곳이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심 의원은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민간 대기업 임직원은 30배, 공공기관 임직원은 10배, 고위공직자는 5배를 넘지 말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또한 "이를 초과하면 부담금 및 과징금을 부과하고 그 수입으로 사회연대기금을 만들어 최저임금자, 저소득층, 비정규직 노동자 지원 사업 등에 사용하자"고 덧붙인다.
OECD 평균과 비교해 곧바로 한국의 상위 10%가 과도한 몫을 챙겨간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건 덜 섬세하고, 또 왜 구체적인 수치로 30배, 10배, 5배가 상한선이어야 하는지 불분명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한국의 임직원, 고위공직자들이 선진국들에 비해 대단한 생산성을 갖췄다는 데 동의할 만한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또한 정치인은 구체적 수치를 정확히 맞추기보다 '정책의 방향성'의 물꼬부터 트는 게 주된 일이다. 따라서 심 의원은 좋은 발상의 전환, 즉 '출발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 정의당 강령 의미망선으로 연결되지 않은 핵심어들끼리 전혀 관계가 없는 건 아니다. 통계적 기준에 따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의미망을 표시했을 뿐이다. ⓒ 하지율
'자본가'라는 큰 범주 내에는 다양한 경제 주체들이 있다. 회사에 소속된 임직원뿐 아니라 세습 재벌이나 건물주 등 다양한 유형이 있다. 살찐고양이법은 우선 임직원의 근로소득 불평등만 건드린다. 그 이외에 자본 세습, 불로소득 등으로 인한 불평등 문제는 유예된다.
그러나 정의당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장기적인 조세제도나 복지제도의 개편이 필요하나, 단기적으로는 대기업 임원 보수 제한을 통해 그 폐해를 일부나마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고, 강령에서도 "보편적 복지는 재정 규모 확대와 증세 없이 이룰 수 없다. 조세는 성장의 방해물이 아니라 소득 불평등을 완화해 정의를 실현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창출하는 원천"이라는 철학을 분명히 한다.
의미망 분석은 특정한 주제와 관련된 메시지들에서 공통적으로 출현하는 핵심어들을 추출해 관계를 나타내는 기법이다. 위 의미망과 같이 정의당 강령을 분석해봐도 9시 방향에 '복지-국가-정의'라는 삼각편대가 출현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의당은 '복지국가'라고 답하고 있다. 물론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는다. 우선 정의당보다 좀 더 왼쪽의 좌파들은 종종 정의당에 대해 '비판적 지지'만을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비판적'이라는 건 정의당의 가치가 좀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건 맞지만 최종 목적지는 아니라는 취지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노동 상품으로서 스펙을 갖추기까지의 비용, 자신의 임금, 임금 이상의 잉여가치를 모두 다 생산한다고 봤다. 그래서 임금 지불만으로 퉁치고 나머지 몫을 가져가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고 봤고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해 자본가라는 계급 자체가 없어져야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정의당은 강령에서 "우리는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사적 소유, 공적 소유, 사회적 소유가 균형을 이루게 할 것이다. 공정한 시장경제, 정의로운 공공 경제, 협동의 사회적 경제가 서로를 보완하고 촉진하는 새로운 상생의 경제 체제를 구축해 나갈 것이다"라고 밝힌다. 정치 체제로도 사회주의가 아닌 "사회민주주의"의 성과를 발전시키겠다고 못 박는다.
반면에 우파들은 마르크스가 자본가도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방식 등으로 지적 노동에 자주 참여하고 높은 투자 위험도 부담해야 한다는 걸 과소평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원 배분 등의 지적 노동의 가치가 인정된들 왜 생산 수단 독점까지 인정해줘야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물론 좌파들도 사적 소유 철폐가 어떻게 더 정의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주는지 증명할 책임이 있다. 이처럼 각자가 생각하는 '목적지'는 다르다.
최저임금 협상, 반칙하지 말고 '공정한 출발선'에서 시작하자
▲ 노동생산성은 적은 노동투입량으로 많은 산출량을 내거나 노동투입량이 그대로인데 많은 산출량을 낼 때 높다고 본다. ⓒ 한국생산성본부 갈무리
첨예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마르크스, 정의당, 경영계 모두 실은 '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분수에 맞지 않는 몫을 챙긴다고 주장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의당도 그렇게 말한다. 반면에 경영계는 노동자가 분수에 맞지 않는 몫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누가 진짜 분수에 맞지 않는 몫을 요구하는가'가 본질이다. 그런데 여기서 부지불식간에 반칙을 쓰는 쪽이 있다. 바로 경영계다. 경영계가 최저임금 협상에서 선수를 치며 가장 먼저 꺼낸 말은 "노동생산성 측면에서 접근할 경우 현 최저임금은 매우 과도한 수준"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노동생산성'이라는 말을 흘려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노동생산성은 상품 생산에 필요한 다양한 요소 중 '노동'의 투입량을 중심으로 산출량을 따져보는 지표다. 그런데 노동생산성에 자본가의 노동도 포함되는가? 만약 포함된다면 경영계는 노동생산성을 근거로 노동자들이 과도한 몫을 챙겨간다고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순간 경영계 자신들도 과도한 몫을 챙겨간다고 시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분배해야 할 몫은 정해져 있다. 따라서 경영계의 논리대로라면 '경영계가 지나치게 많은 몫을 챙겨가 나머지 노동자들이 지나치게 적은 몫을 챙겨간다'와 '나머지 노동자들이 지나치게 많은 몫을 챙겨가 경영계가 지나치게 적은 몫을 챙겨간다'는 모순된 명제가 모두 참이 되는 이상한 상황에 봉착한다. 결국 노동생산성 자체만 갖고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 과도하다고 주장하는 건 앞뒤 안 맞는 자가당착에 불과하다.
그럼 실제로 노동생산성에는 자본가의 노동도 산입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불분명'하다. '기업 임직원'은 자본가의 일부에 불과하다. 위 자료에서 보듯 노동생산성은 분모를 '근로자수 곱하기 근로시간(노동투입량)'으로 두고 계산한다. 여기서 '기업 임직원'이 근로자수에 산입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유형의 자본가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노동생산성이란 건 노동투입량을 '중심으로' 생산성을 산출해볼 뿐이다.
실제 생산에서는 근로자들의 노력뿐 아니라 자본, 원재료, 에너지 등 다양한 생산 요소들이 투입된다. 이 투입 과정에서 자본가의 지적 노동이 개입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자본가의 실제 노력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다. 현재의 노동생산성 모델은 계층과 같은 사회인구학적 특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자본가의 노력을 과대평가해주는 나쁜 습관까지 있다.
가령 '기업가 신화' 운운하며 분배를 과학의 문제가 아닌 종교의 문제로 논점을 흐리는 사례들이다. GDP와 자본생산성 증가는 '기업가의 노력'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거기에는 노동자들의 노력이 분명 개입돼 있다. 우리는 기업가가 마치 반인반신인 양 지나치게 과장하지만 이건희나 이재용이 '평생' 소모하는 칼로리가 삼성전자 AS기사가 '평생' 소모하는 칼로리보다 대단히 높지도 않다. 전체적인 일이 완성되려면 셋 다 반드시 있어야 한다.
2007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들은 노동자들보다 평균 344배 많은 보수를 받았다. 그러나 1980년에 최고경영자들은 노동자들보다 고작 42배 많은 수익을 올렸다(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참조). 1980년에는 최고경영자들이 지금보다 재능도 적고 일도 덜 했을까? 한국의 최고경영자들이 미국 최고경영자들보다 재능도 좋고 일도 열심히 할까?
우리는 이제 좀 회장님들이 도대체 정확히 얼마만큼의 노력을 하는지 과도한 몫을 챙겨가지는 않는지 측정해볼 때가 됐다. 그런 세련되고 미시적인 측정 모델을 개발하는 건 물론 경제학자들이 책임질 문제다. 그러나 그때까지 심상정 의원의 "OECD 국가들의 상위 10%와 하위 10% 사이 평균 (임금 격차는) 5~7배인데 반해 한국은 11배가 넘는다"라는 근거는 정책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현재 가용한 가장 합리적인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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