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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충' 안 되려다가 '괴물'이 돼버렸다

[육아] 파란만장했던 외출... 다정함과 엄격함의 경계를 넘어서다

등록|2016.07.10 15:34 수정|2016.07.10 15:34

▲ 까페점령자들<키위주스와 아이들> "엄마 키위가 시큼해"/<수채화 권순지> ⓒ 권순지


지난 주말, 남편 없이 두 아이를 데리고 친구의 점심식사 초대에 가겠다고 결정한 내 선택부터 잘못이었을까. 점심식사 이후 서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찻집으로 향했던 발걸음 무리에 발을 섞고 말았던 그 선택을 원망해야 하는 걸까.

장마가 시작되면서 아이들과의 바깥 나들이가 쉽지 않았지만 친구의 초대에 응했던 건, 주말의 시작을 아이들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고민의 답이 해결되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일주일간 쌓인 피로를 이겨내지 못해 이부자리에서 버둥대던 몸을 움직이게 한 힘은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친구 집에 가면 간만에 내가 만들지 않은 정성스러운 집밥을 먹을 수 있을 터였고, 보고 싶은 친구들 얼굴도 여럿 볼 수 있었다.

"이모 집에 가자!"

아이들 역시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주말인데도 아빠는 출근한다. 이 사실을 의아해 하면서 '다녀오세요'라는 인사도 마뜩잖게 했다. 그렇게 아빠와 이별하고, 좋아하는 이모 집에 간다는 엄마의 외침은 아이들에게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흡족했던 모양이었다.

점심을 먹기 전까지는 컨디션이 좋은 편이었는데...

차로 운전해 약 30분 거리의 친구 집에 도착해 조잘대고 놀며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서까지는 아이들 컨디션이 좋은 편이었다. 가는 동안 차에서 잠들었다가 도착하자마자 깼기 때문에 낮잠은 평소보다 덜 잔 게 사실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점심식사 후 바깥에 나섰을 때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고민을 좀 더 했어야 했던 게다.

잠깐의 고민 끝에 차문을 여는 대신 트렁크를 열어 휴대용 유모차를 꺼내 작은 아이를 태웠다. 큰아이는 잘 따르는 이모의 손을 꼭 붙들게 하고 습기 가득한 주택골목길을 지나 큰 길을 건너 친구의 단골 찻집에 도착했다.

"엄마, 난 뭐 사줄거야?"

그 찻집의 명당자리, 편한 소파가 있으며 구석진 자리인 그곳이 만석이라 바로 옆 테이블에 겨우 자리를 잡으려는데 큰 아이가 대뜸 물었다. 그 물음에 대답하기 전 번뜩 든 생각은 이랬다.

'아들아, 너에게 뭘 먹일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가 큰소리 없이 잘 있을 수 있겠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 같아.'

그 생각이 들었을 때 주문을 하지 않고 나왔어야 했을까.

주말 오후, 꽤 큰 공간을 소유하고 있는 널찍하고 시원한 찻집 좌석 곳곳에는 한가롭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어떤 의자에 앉을 것인가부터 남매가 다투는 모습을 보다가 말리고 설득하다 화내기 직전의 협박 단계에 이르다 보니 시원한 커피를 마시기 전부터 가슴이 서늘해졌다.

'나는 어쩌자고 이 덥고 습한 날씨에 낮잠 덜 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걸까.'

함께 있는 친구들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 잠깐의 순간조차 기억에 없는 것 보면 아이들 뒷치닥거리에 혼이 빠졌던 게 분명하다. 아이들을 위한 음료(키위주스)가 나왔을 때부터 집에 가기 싫다고 온몸으로 반항하는 묵직한 큰아이를 차에 가까스로 태울 때까지 말이다.

주스를 마시다가 실수로 바닥에 쏟아버린 작은 녀석의 옷을 닦아주고 흥건하게 젖은 카페 바닥을 온 방법을 동원해 치웠다. 그러더니 큰아이는 뭔가를 더 먹고 싶다고 칭얼거렸다. 조각 케이크 두 조각을 주문해 가져오니 서로 더 많이 먹겠다고 또 한판 싸움이다. 두 녀석을 말리는 일은 실로 힘에 부쳤다. 말리는 엄마의 언성이 높아지고, 다투다가 밀린 작은 녀석이 울음소리가 카페 안 다른 이들의 소곤대는 소리를 삼켜버렸다. 차라리 내 몸도 삼켜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내 탓이었다

찻집 영업에 지장이 생길까봐 최대한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아이들을 설득하며 애를 썼지만, 결국은 나를 위함이었던 것 같다. 부끄러움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온라인을 달궈댔던 '맘충'이라는 소리가 내게 들릴까봐 두렵다는 듯이.

주말 아침부터 시작된 모든 일은 엄마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시끄러운 결과도 엄마의 몫임이 분명했다. 내 욕심에 아이들을 데리고 친구들을 만나러 갔고, 낮잠을 제대로 못잔 아이들의 컨디션을 배려하지 못하고 다른 공공장소에 또 아이들을 데려 갔다. 때문에 좋지 못한 결과의 화살은 아이들에게 향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화살은 아이들에게 향했다. 아이들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엄마에게 꾸중을 들으면서 음료와 케이크를 삼켰다. 급기야는 시끄럽게 울지 말라는 엄마의 말에 악을 쓰면서 울고 싶음에도 꺽꺽거리며 눈물까지 삼켰다. 그 화살이 이제야 내게로 돌아와 여기저기 생채기를 낸다.

그 날은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은 했어야 했다. 영업에 지장이 있었을 친구 단골찻집 주인장 내외에게만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짜증을 참아준 친구들과 찻집 안의 다른 손님들 그리고 엄마의 화를 이겨낸 내 아이들.

'조금 더 다정하게 설득할 걸. 조금만 더 동요 없는 낯빛으로 아이들을 대할 걸.'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아이들이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은 그 날의 일로 더 분명해졌다.
덧붙이는 글 개인블로그 http://blog.naver.com/rnjstnswl3 중복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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