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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자퇴하고 잡은 칼, 운명이 바뀌었다

[시드니 속 한인이야기] 멜버른 거주 요리사 황세연씨

등록|2016.07.19 08:50 수정|2016.07.19 08:50

요리사 황세연 씨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개척하고 있다. ⓒ 황세연


"아무것도 아닌 제가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는 시드니에서 먼 멜버른에 거주하고 있었다. 직접 찾아가기는 어려운 일. 시드니에서 멜버른은 비행기를 타고 1시간 이상 가야 한다. 워낙 나라가 넓기 때문. 고육지책으로 서면인터뷰를 진행했다. 놀랍게도 그는 이틀도 안돼 답장을 보냈다. 상세한 답변과 함께. 이제 황세연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고등학교 자퇴 후 찾아온 호주

그는 가난했다. 가난한 가정. 고등학교를 다닐 엄두도 안났다. 절망만이 가득했던 그때 희망이 돼준 건 요리였다.

"막연하게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다행히 친구 덕분에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렇게 5년 동안 여러 가게를 돌며 공부했다.

"제 전공이 웨스턴푸드예요. 그러다보니 외국 요리사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어요."

그는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공부했다. 그러나 주위 시선은 곱지 않았다.

"선배 요리사들에게 욕 많이 먹었어요. 요리사 세계도 군대처럼 계급사회거든요. 눈치도 많이 봤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한계가 다가오는구나."

박봉이었던 근무요건, 주위의 시샘. 그에게 도전은 선택이 아닌 필수요건이었다. 그러나 그가 할 줄 아는 건 요리뿐.

"영어 한마디도 못했어요. 그래도 일단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봤어요. 호주는 호스탈리피 산업(Hospitality, 고객 감동을 생산하는 서비스업)에 대한 지원이 좋아요. 그래서 호주로 가기로 했죠."

더군다나 요리사에 대한 높은 임금과 세계 여러나라 요리사들과의 교류가 이뤄지는 호주였다. 그에게 호주는 기회의 땅이었다.

860달러를 가지고 시작하다

호주에 대한 동경심은 없었다. 단지 외국에 나간다는 막연한 생각 뿐이었다. 부리나케 짐을 챙기고 호주로 출국했다.

"호주에 막 도착했을 때 입국심사를 받았거든요. 그때 가지고 왔던 칼이 걸렸어요."

시큐리티가 '이거 뭐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결국 캐리어를 열고 짐 검사를 받았다.

"그때 영어도 못 알아들어서 오해를 받았어요. 요리용 칼이었거든요. 그런데 시큐리티는 뭔가 불법적인 목적을 가지고 들고 왔다고 생각한 거죠."

결국 스마트폰에 저장돼 있던 사진과 통역서비스까지 동원해서야 오해를 풀 수 있었다.

"하루 동안 멜버른 시티를 구경했어요. 그리고 바로 일을 찾았죠."

그의 수중에는 860달러가 전부였다. 호주에서는 버티기 힘든 자금. 자칫 한국으로 되돌아가야할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농장에서 일했어요. 그런데 시즌 시작 전이라 벌이가 별로였어요. 그래서 육가공공장으로 옮겼죠."

육가공공장에서의 하루는 피와의 전쟁이었다. 그나마 보닝룸(Boning Room)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육가공공장은 도축, 내장 등을 다루는 킬링플로우와 살을 발라내는 보닝으로 나눠져 있다.

"요리하면서 칼을 다뤘던 점을 높이 샀죠. 그래서 보닝룸에서 시작했어요."

어떤 날에는 양 2300마리, 송아지 500마리를 잡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돈은 제법 모았다. 세컨비자를 딸 여건도 만족했다. 농장이나 공장 같은 곳에서 3개월 이상 일을 하면 호주는 워킹홀리데이 세컨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

"비자 준비 끝나고는 멜버른 시티로 왔어요.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던 요리를 공부해보려고요 몇 곳의 레스토랑에 레쥬메(이력서)를 돌렸죠."

그 중 애틀랜틱 그룹의 더 애틀랜틱(THE ATLANTIC)이라는 레스토랑과 계약했다.

"12시간 이상씩 일하고 100명 이상의 손님을 받아도 괜찮아요. 일이 좋거든요. 오히려 집에 가면 뿌듯해요."

친구 도움으로 언어를 뛰어넘어

- 영어는  좀 늘었나요?
"아직도 부딪히고 있죠. 오늘도 잘 알아듣지 못해서 낭패를 봤어요."

친구들이 많은 도움을 줬단다. 쉽게 얘기하고 못 알아들으면 종이에 써서 주고.

"처음에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울었어요. 너무 억울했거든요. 소통문제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을 못하고."

퇴근하고 나면 갑자기 억울해졌다 한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분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영어공부에 매진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늘었지만 공부를 한창하던 중에는 입 꾹 다물고 있었거든요. 그때 셰프에게 혼났어요. '토니(황세연씨의 영어 이름) 여긴 호주고 영어를 쓰는 나라야. 난 셰프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어. 두려워하지 말고 말해. 내가 도와줄게.' 이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

이후 그는 말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물을 마시러 갈 때도 행선지를 알리며 말을 걸었다. 친구들은 발음이나 어색한 부분을 고쳐줬다.

- 친구들이 많은 것 같아요. 혹시 문화적 차이를 느낄 때가 있나요?
"있죠. 솔직히 모든 게 다 문화 차이에요. 밥 먹는 거, 물건 사는 거 하나도 말이죠."

그는 대만인과의 에피소드를 꺼냈다. 대만이나 중국은 머리를 만지는 것이 실례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머리는 함부로 만질 수 없는 곳이다. 만진다면 굉장히 큰 실례다.

"대만인 친구가 머리를 자꾸 만지는 거예요. 몇 번을 계속 그러길래 붙잡고 말했어요. 그래도 대만인 친구는 이해를 못하는 눈치더라고요."

하늘 볼 여유가 생겼다

그는 호주에 와서 좋은 점으로 여유를 꼽았다. 바쁘게 살아도 하늘 볼 여유가 있다는 것.

"저를 돌아보거나 여유있게 생각하는 법을 호주에서 배우는 것 같아요."

그는 주위에 호주행을 권하고 싶다고 말한다.

"20대에는 한 번쯤 와볼 나라라고 생각해요. 문화 포용력만 배워가도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도움이 되겠죠. "

그러면서 호주행을 택하는 사람들에게 명심해야할 점을 꼽았다.

"허송세월 할 수도 있어요. 계획 없이 오면요. 자신이 어떤 생각으로 올 것인지 고민하고 왔으면 좋겠어요. 아, 영어공부도요. 특히 요리사 분들은 최소 주방에서 쓰는 용어 정도는 공부하고 오시면 좋겠네요."

그는 돈이 없다고 비관하지 말라고 덧붙인다. 고작 70만 원 들고 온 자기도 지금은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다.

"이 나라는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준다고 생각해요. 도전해보세요."

마지막으로 그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어머니가 제 자퇴를 막지 못하신 것에 대해 후회하시는 것 같아요. 당신께서 엄하게 하더라도 막았어야 했다고 하시면서요. 아직 자랑스런 아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 떳떳하게 살고 있어요. 이제 그만 후회하셨으면 좋겠어요. 엄마 걱정하지 마시고 건강 챙기세요. 꼭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덧붙이는 글 시드니 속 한인들을 만납니다. 기들의 이야기를 듣고 옮깁니다. 더 솔직하고 더 자세하고 더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습니다. // 이번 인터뷰는 시드니가 아닌 멜버른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입니다. 독특한 스토리가 있어 부득이하게 인터뷰를 하게 됐습니다. 이점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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