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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만 vs. 4만5000, 당신은 이 선택에 동의하십니까?

[오늘날의 영화읽기] <라이언 일병 구하기> 우리에겐 너무나 먼 이야기

등록|2016.07.22 11:06 수정|2016.07.22 11:16
40만 vs. 4만5000

무슨 숫자인지 짐작하시나요? 네. 바로 한참 동안 싸드(THAAD) 배치 지역으로 논의되던 두 지역인 칠곡과 성주의 인구 비교입니다. 국가는 '인구가 적은 지방'이 설득하기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일까요? 왜 저는 이 결정에 동조가 안 됩니다. 4만5000명 국민의 희생은 그저 40만 국민의 것에 비해 작으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요? 우리의 고민은 이것으로 끝났습니까? 항의하는 성주군민의 목소리는, 우리 인구 4500만 명의 0.1%에 불과하기에 무시해도 되는가요?

영화의 기록을 찾아보니 1998년입니다. 실험실에서 무료한 금요일의 밤을 보내던 대학원생들은, 시내의 개봉관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영화를 보러 나서기로 합니다. 교수님의 불호령이 대기하고 있겠지만, 주간 미팅이 예정된 월요일까지는 아직 한참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잠깐의 여유를 즐기기로 합니다. 그때만 해도, 아직 대형 멀티플렉스가 일반적이던 시기는 아니라서, 우리는 시내의 유일한 개봉관이던 '아카데미극장'을 찾았습니다.

1998년,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다

▲ 1998년 처음 본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충격적이었다. 이 영화는 웅장한 스펙터클 영화가 아니었다.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였다. ⓒ 파라마운트 픽처스


입석까지는 아니었지만 (<터미네이터2>(1991) 개봉일에는 입석이었어요!), 영화관을 꽉 채운 관객들로 '새 영화'에 기대감이 한껏 상승했습니다. 모두 20대 초중반이었던 우리는 '신나는' 2차 세계대전의 영웅담을 기대하며 영화관의 오래된 의자에 몸을 묻었습니다. 앗, 무슨 영화인지 아직도 말씀 안 드렸군요?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의 최신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였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난 직후부터, 우리는 모두 말을 잃었습니다. (영화관 안이라, 어차피 말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저 서로가 서로에게로 전해지는 '황망함'이라고 해 두죠) '통쾌할 것'이라 기대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장쾌함은, 위험천만하게도 '나무 합판' 방탄벽을 두른 목선의 허술함과 절대 상륙할 수 없을 것 같은 해변을 향해, 조건 없는 '다수의 병력 투입'이라는 1차원적 전술뿐이라서 아슬아슬했습니다.

거기에, 해변에 진지를 세운 채 무차별하게 가해지는 독일군의 공격으로 죽어 나가야 했던 수많은 연합군 병사들의 시체 위로, 떨어져 나간 팔과 다리를 들고 해변을 헤매는 부상병들의 이미지는 처참했습니다. 게다가, 화면을 가득 채운 고음의 '탕탕거리는' 총소리와 포의 굉음은 경험해 보지 못한 전장의 한가운데, 그것도 2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의 한가운데에서 같이 떨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30여 분이 넘게 이어지던 상륙작전의 오프닝 내내 눈과 귀를 가려보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던 것 같아요. 결국, 자신의 떨어져 나간 팔을 들고 허망하게 쓰러지던 병사의 모습에서 모든 노력을 포기했지만요.

'이것이 전쟁이구나.'

너무도 끔찍했어요. 하지만, 더 괴로운 질문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이 전에도 '전쟁의 사실적인 참혹함'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는 많았으니, 그것을 넘어서고자 했던 '당대 최고의 감독' 스필버그의 의도는 너무나 잔인했어요.

▲ 그저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을 희생시키는 게 온당한 일일까. 영화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 파라마운트 픽처스


'우리가 왜 새파란 일병 하나를 구하기 위해 죽어야 하는데?'

네. 이 영화가 정작 던지고 싶었던 질문은 이거였습니다. 전쟁의 참혹함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비극도, 유대인이었던 스필버그에겐 무척이나 중요한 메시지였겠지요. 하지만, 그는 '과연 한 인간의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애석하게도 무엇에 정신을 빼놓고 있었는지, 들고 간 지갑마저 잃어버렸지만) 그날 밤 이후로, 이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머릿속이 '텅~'하며 큰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답니다. 여러분,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한 사람의 생명'의 소중함, 그 유일무이함에 대한 존중에 대해서요. 저는 부끄럽게도, 그때까지는 그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나 봅니다. 그러니, 저런 충격을 받았겠지요.

이야기는 모두 아실 겁니다. 밀러 대위(톰 행크스)가 이끄는 여덟 명의 대원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나섭니다. 하지만, 이 부대의 실제 목적은 맷 데이먼이 분한 라이언 일병을 무사히 구해내어 그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라이언 집안 네 명의 아들들이 모두 2차대전에 참전했는데, 바로 얼마 전에 그들 중 세 명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미국은 결심합니다. 마지막 남은 막내아들을 무사히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2016년, 칠곡과 성주를 보다

▲ 천주교 대구대교구·안동교구·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정의평화위원회는 지난 18일 경북 칠곡에서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생명평화미사를 열었다. 미사를 마친 500여 명의 참가자들은 인근의 미군 부대까지 행진하며 한반도 사드 배치 계획 철회를 요구했다. ⓒ 정민규


여러분, 여기서 질문이요. 이 '임무'에 동의하시나요? 왜 위대한 장군도 아니고, 국가의 중요 인사도 아니고, 엄청난 재력가의 아들도 아닌, 평범한 가정의 아들인 라이언을 왜 국가가 나서서 구하려고 했는지 이해가 되세요? 그것도 수많은 다른 병사들의 생명과 맞바꿔 가면서요? 솔직히, 저는 그 당시에는 물론이고, 지금도 이 영화를 다시 생각하면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제가 밀러 대위였다면 항명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절대 못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에겐 그의 지시에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여덟 명의 부대원에 대한 책임감도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이날 저는 저 스스로 매우 부끄럽게도, '개인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우리가 그리도 중요하게 '외워'왔던 '인간의 존엄성'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말로는 수도 없이 '생명존중'이니 '인간의 존엄'이니 외워대었고, 시험지에 '순순히' 답을 썼어도 그것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저 단순히 '사람을 다치게 하면 벌을 받으니, 조심해!' 정도로 알면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나름 성적'은' 좋은 모범학생이었는데 말입니다. 매우 부끄럽습니다) 사람을, 인간의 생명을 '숫자'로 판단해도 좋다는 것을 어쩌다가 먼저 배워버린 걸까요? 여전히 '하나하나의 생명'이 소중함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짐작하시는 것처럼 밀러 대위가 작전을 지휘해 나가는 과정은 매우 험난합니다. 대원들은 그들이 구해야 하는 자(라이언 일병)에 대해 끝없이 의문을 제기했고, 그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헤쳐나가야 했던 위협적인 상황들은 몇 번이나 작전을 포기하자며 유혹했습니다. 게다가, '불가능해 보였던'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기적적'으로 성공한 이후, 독일군의 저항은 처절하고, 집요하며 노련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던 내내 마음으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만해. 너희들이 왜 그 아이 때문에 죽어야 해? 그만하자.'

나머지 이야기는 '실화에 기반'했으며 '생존자의 회상으로 그려진다'는 언급으로 줄이겠습니다. 분명히 전쟁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영화답게 오마하 해변의 처절한 오프닝을 포함하여 영화 내내 이어지는 세부적인 전투 장면의 묘사는 무척이나 훌륭합니다. (혹자는 <에너미 앳 더 게이트>(2001년)의 저격병 장면이 훌륭하다고 하는데, 저는 이 영화에서 연합군과 독일군 저격병들의 건물 전투에서 울어버렸답니다.) 못 보셨다면 한 번 찾아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분명, 머리가 아파지실 테지만, 생각해야만 할 것들입니다.

상경한 성주 군민들 "사드는 필요없다"상경한 성주 군민들이 지난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사드 배치 철회 성주군민 결의대회'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사드 배치 결정을 규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자. 그럼, 다시 처음의 '부끄러운'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당신은 40만 명 칠곡군민의 희생보다는 4만5000명 성주군민의 희생에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싸드(THAAD)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국민을 설득시키지도 못했으면서, 국가의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헤아릴 수 없는 광주 시민의 희생 위에서 '피를 먹고' 자라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지난 십 년을 잘라내어 보더라도 용산 망루 위에서 여섯 생명을 죽게 했고, 평택 쌍용차의 아픔에 스물여덟의 생명을 스러지게 했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아픔이 해결되지 못한 세월호의 아이들 304명은 아직도 부모님들과 우리들의 마음에 무겁게 남아있습니다.

이외에도 충분히 협의가 이뤄지지 못한 정책이나 제대로 수습되지 못한 사고로 인해, 수많은 국민이 희생되었습니다. 우리는 혹시 '죽음'에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젠 4만5000명의 희생쯤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요?

물론, 이 질문이 과장되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싸드가 설치된다고 주민이 모두 죽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런 식의 '선택'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서는 '과장스럽더라도' 한번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제대로 '경중'을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선택을 강요받는 질문에서 제3의 해법을 찾아내는 현명한 선택이 점차 불가능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대한민국이 '국민'을 위해 존재해 줄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 하나를 구해내기 위해, 어딘가에서 '짜잔~'하고 나타날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처럼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에서 상륙작전을 펼쳐 구해줄 것은 아니더라도, 어마어마한 희생과의 등가교환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필요로 할 때 모든 국민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여겨주기를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요? 제발, 국민에게 국가의 존재를 믿게 해 주세요. 이대로는 국가가 강요하는 '세뇌'로서의 충성은 분명 그 끝이 있습니다. 누군가 당신의 아들이 전장에서 헤매고 있을 때, 그를 구해주겠다고 국가가 앞장서 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꿈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민주국가의 국민'이지 '노예(혹은, 가축)'가 아니고, 게다가 지난 17일은 '모든 국민은 존엄한 존재'임을 선언한 대한민국 헌법이 태어난 제헌절이었습니다.

▲ 사람의 목숨은 숫자로 계산할 수 없다. 4만5000명의 목숨이 40만 명의 목숨보다 덜 중요한 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 국가는, 대체 무슨 근거로 4만5000명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기로 결정한 것일까. ⓒ 파라마운트 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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