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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배치', 고려에도 비슷한 일 있었다

몽골, 고려 때 경상도에 침략기지 '정동행성' 설치

등록|2016.07.20 14:18 수정|2016.07.20 14:18
미국은 북핵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해줄 목적으로 사드, 즉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를 배치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의도가 중국 및 러시아 견제에 있다는 점은 온 세상이 다 안다. 이 점은 미국이 사드의 상위 개념인 MD를 동유럽에 배치한 의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루마니아에 배치된 미국의 MD는 지난 5월 가동에 들어갔다. 폴란드에 배치되는 MD는 2018년부터 가동될 예정이다. 두 나라에 MD 배치를 추진할 당시, 미국은 이란의 핵 위협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란의 핵공격으로부터 동유럽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러시아 코앞의 루마니아·폴란드에 MD를 배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의도가 러시아 견제에 있다는 점은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다. 

따라서 루마니아와 폴란드는 미국의 러시아 견제를 위해 자국 땅을 내주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미국을 위해 돈까지 들이고 있다. 일례로, 폴란드는 MD 배치를 위해 50억 유로(약 5조 8천억 원)의 예산까지 배정했다. 없는 나라가 있는 나라의 세계 전략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다.

없는 나라가 있는 나라를 위해 땅뿐 아니라 돈까지 지출한 사례는 우리 역사에도 있었다. 남의 나라 군사 시스템을 국내에 유치하느라 돈·토지는 물론이고 인력까지 허비한 사례였다. 거기다가 낭패 혹은 망신까지 당했으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 사례였다.

일본 침략 위한 기지 설치 요청한 몽골

▲ 고려와 몽골의 전쟁. 서울시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13세기 초중반에 고려인들이 세계 최강 몽골(원나라)과 기나긴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은근슬쩍 몽골 편에 가세해 이익을 취한 집단이 있다. 제24대 고려 주상인 원종으로 대표되는 고려 왕실이 바로 그들이다. 고려 왕실은 몽골과의 전쟁 이전부터 무신정권의 억압을 받았다. 그러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그 틈을 타 몽골 편에 가세했던 것이다.

고려 왕실이 힘을 실어준 덕에 몽골은 고려 무신정권을 파멸시키고 고려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 대가로 고려 왕실은 과거의 권력을 되찾게 되었다. 몽골 덕분에 권력을 되찾았으니, 고려 왕실은 겉으로라도 '뼛속까지 친몽골'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려 왕실이 친몽골 정책의 일환으로 벌인 사업이 몽골 침략기지의 국내 유치였다. 몽골은 자국의 세계패권을 거부하는 일본을 혼내주고 싶었다. 전 세계는 물론이고 고려까지 몽골 앞에 고개를 숙인 마당에, 일본만큼은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이점이 일본을 당당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을 제압할 목적으로 몽골은 정동행성이란 침략 기지를 고려에 설치하고자 했다. 고려 땅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이를 발판으로 일본을 위협 내지 침공하고자 했던 것이다. 1274년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를 국내에 유치한 사람이 바로 원종 임금이다.

조선 후기 안정복이 지은 한국 고대사 서적인 <동사강목>에 따르면, 몽골은 정동행성을 설치할 장소까지 구체적으로 지정해주었다. 고려 남해안의 합포현, 즉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에 설치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몽골의 세계전략을 위한 침략 기지를 어디에 설치하는 게 가장 적절한지는 고려보다는 몽골이 더 잘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려가 아니라 몽골이 직접 장소를 정했던 것이다.

<동사강목> 제11권에 따르면, 몽골은 경남 마산을 기지로 정한 상태에서 사신을 보내 협력을 요청했다. 이에 대한 원문 표현은 "원나라가 합포현을 정동행성으로 정하고 사신을 보내"이다. 말이 협력 요청이지, 사실은 강요나 다름없었다. <동사강목>에서는 그때부터 몽골이 고려 정부를 '독려'했다고 했다. 이랬으니 고려 정부로서는 사전에 백성들을 이해시키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경상도 마산에 설치된 몽골 침략기지

몽골 침략기지가 경상도 마산에 설치됐으니, 일차 피해는 이곳 사람들이 입을 수밖에 없었다. 현지에 주둔할 몽골군의 뒤치다꺼리는 물론이고 그들의 행패 또한 현지인들이 감당해야 했다. '전자파 피해'와 생업 손실 못지않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산 사람들만 피해를 본 게 아니었다. 전체 고려인들이 공동 피해자가 되었다. <고려사> '원종 세가' 편에 따르면, 합포현에 집결시킬 몽골 군함을 건조하는 데 필요한 목재는 전라도에서 공출됐다. 이뿐 아니다. 전국 각지에서 기술자나 단순 노동자로 동원된 사람들이 무려 3만 명 이상이었다. 이렇게 온 고려가 몽골 침략기지 건설에 동원된 결과로 총 900척의 선박이 건조되었다.

▲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묘사한 <몽고습래회사>란 그림. 1293년에 일본 화가가 그린 작품이다.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잠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루마니아와 폴란드가 미국의 MD를 도입하기로 결정하자, 러시아는 이 나라들을 상대로 장래에 핵 공격을 가할 수도 있다는 식의 위협을 가했다. 루마니아·폴란드인들의 입장에서, 이 말은 결코 흘려버릴 말이 아니다.

러시아가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경우, 루마니아·폴란드는 러시아의 1차 타격 대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자국과 가장 가까운 미국 MD 기지를 먼저 제압한 다음에 미국과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루마니아·폴란드는 미국을 위해 좋은 일을 해놓고도 결국에는 미국 때문에 많은 것을 손해 보는 나라가 될 것이다.

몽골 위해 최선 다한 고려가 얻은 것은...

▲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때 목숨을 잃은 일본인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고모다하마 신사. 대마도(쓰시마)에 있다. ⓒ 김종성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고려도 겪었다. 경상도 마산에 몽골 침략기지를 만들어준 고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몽골과 한편이 되어 일본 침공에까지 나섰다. 몽골을 위해 기지도 내주고 기술자도 모아주고 전함도 만들어주는 것도 모자라, 몽골을 위한 전쟁에까지 참여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풀서비스'였다. '뼛속까지 친몽골'처럼 보이자면 그런 서비스로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건만, 고려가 얻은 것은 없었다. 여몽연합군의 제1차 일본 침공은 1274년에 있었고, 제2차는 1281년에 있었다. 이 전쟁은 여몽연합군의 패배로 끝났다. 이것은 고려한테도 패전이었다. 몽골이 입어야 할 패전의 아픔을 고려까지 떠안게 된 것이다.

고려가 입은 상처는 이뿐이 아니다.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됨은 물론이고, 두고두고 일본인들의 원성까지 사야 했다. 그로부터 1세기가 채 안 되는 14세기 중반부터 고려가 왜구 즉 대마도·일본인 해적들의 집중 침략을 받은 원인 중 하나는 고려가 몽골을 도와 일본을 침략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참고로, 대마도와 일본을 구분한 것은 당시에는 대마도가 독립 정권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가 입은 상처 중에 가장 큰 것은 무엇보다 백성들의 희생이었다. 정동행성 기지를 마산에 설치하느라 투입된 비용, 목재를 벌채·운반하느라 투입된 비용, 몽골 선박을 만들어주느라 투입된 비용 등등은 결국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거기다가 전쟁에 동원된 고려 병사들의 일부는 해외에서 목숨까지 잃어야 했다.

이처럼 고려는 세계 최강 몽골의 대외정책에 이용되어 몽골 군사기지를 자국에 설치하고 침략까지 도왔다가, 결국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엄청난 손실만 떠안았다. 더욱 더 황당한 것은 몽골이 일본 침략을 목적으로 설치한 정동행성이 나중에는 몽골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구로 돌변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려의 정동행성 유치는 고려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이고 가장 어리석은 외교적 실패 사례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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