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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비만 21억, '리빙랩'이 뭐기에 이러지?

그라민은행도 혁신학교도 알고 보면 '리빙랩'에서 시작

등록|2016.07.26 10:21 수정|2016.07.26 10:21

▲ 서울시의 리빙랩 사회혁신 실험 ⓒ 서울혁신파크 리빙랩


'리빙랩(Living Lab)'이 사회 문제 해결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주목 받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있는 에너지기술들 10개를 뽑아 리빙랩 방식으로 해법을 찾겠다며 26일까지 공모를 진행한다. 사업비가 무려 21억 원이다.

서울시도 지난 13일부터 '내가 바꾸는 서울, 100일의 실험'이란 제목으로 각종 도시 문제의 혁신적 해법을 찾는 리빙랩 실험 공모를 진행하고 있다. 총 지원비가 2억 5000만 원으로 역시 적지 않다(http://innovationpark.kr/livinglab 참고).

그밖에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전통 한옥마을인 북촌에서는 IoT(사물인터넷)로 지역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른바 '북촌 리빙랩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고, 대전 유성구 갑천 '물고기다리'의 하천범람 피해를 리빙랩 방식으로 풀어낸 '건너유 프로젝트'도 벌써 제법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리빙랩은 여전히 낯설다. 리빙랩은 무엇이며, 최근 왜 사회혁신(Social Innovation) 분야의 대세로 떠오르게 됐을까.

리빙랩은 '생활 실험실'

'리빙랩'은 어렵지 않다. 우리말로는 '생활 실험실' 정도가 어울린다.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곳곳을 실험실로 삼아 다양한 사회 문제의 해법을 찾아보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삶의 현장이 실험실이니 당연하게도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모두가 실험의 참여자이자 설계자이고, 해법을 찾아내야 하는 주체다. 최근엔 ICT(정보통신기술)와 IoT(사물인터넷)를 비롯한 다양한 과학기술이 더해지면서 리빙랩의 가능성과 잠재력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송위진 박사는 리빙랩의 특징을 ▲사용자 주도형 혁신 ▲개방형 혁신 ▲생활세계에서의 혁신 ▲미래를 구성해가는 '실험적 학습' 공간 등의 네 가지로 꼽았다(송위진, 2012).

여기서 사용자란 국가 정책이나 과학기술, 또는 제품의 최종 사용자로서 시민을 가리킨다. 송 박사는 시민이 "혁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지식을 함께 창조하는(co-creation) 주체"라는 점을 강조한다. 지금까지는 '관찰의 대상'에 그쳤던 시민의 자리가 리빙랩에서는 '함께 창조하는 주체'로 바뀐 것이다.

최근 세종시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서 만난 성지은 박사는 한 발 더 나아가 "리빙랩 실험의 주요 행위자인 Public(정부·지자체)-Private(민간기업·개발자)-People(시민·지역사회) 간의 Partnership(협력)이 핵심 역량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리빙랩 실험이 성공하려면 "공공과 민간, 시민과 지역사회 등이 목표를 공유하면서 실험의 설계에서 해법 도출에 이르는 모든 프로세스에서 '협력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성 박사의 설명이다.

'그라민 은행'과 '혁신학교'도 리빙랩에서 출발

리빙랩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사실 삶의 현장을 '열린 실험실'로 삼아 혁신적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는 늘 있어왔다.

지금은 전 세계로 퍼진 '마이크로 크레딧' 제도도 1970년대 방글라데시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열린 실험'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온 무하마드 유누스 교수가 마땅히 내세울 담보조차 없던 가난한 주민 42명에게 27달러를 빌려준 것이 실험의 출발이었다.

당시 유누스 교수는 '가난한 이들에게 담보 없이 적은 자본금을 빌려준다면 이들도 자립을 할 수 있을 것'이란 혁신적 발상을 떠올렸고, 이를 실험으로 옮겼다. 그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터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마을은행'이라는 뜻의 '그라민은행'을 설립해 가난을 조건으로 최대 150달러를 빌려주는 사상 유례없는 실험을 이어갔다. 1976년의 일이니 벌써 40년 전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자면 아쉬운 대목도 있으나, 리빙랩 실험이라 부르기엔 부족함이 없다.

▲ 경기도 광주 남한산초등학교 전경 ⓒ 선대식


가까운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혁신학교'가 그것이다. 혁신학교는 학생 수가 줄어 폐교를 앞두고 있던 경기도 광주 남한산초등학교의 실험에서 시작되었다. 2000년, 학생 수가 겨우 26명이던 이 학교에 새로 부임 온 정연탁 교장은 '작은 학교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으로 학생들의 발길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실험해보기로 마음먹고 교사와 학부모들 그리고 지역주민들을 설득해 '새로운 학교 만들기'에 나섰다.

먼저 학교 운영 체계를 밑바닥부터 뜯어 고쳤다. 교육청의 지시보다 교사의 결정을 더 존중했고, 교사들은 오로지 학생만을 생각하며 교육과정을 새로 짰다. 수업시간을 80분으로 늘려 교사도 학생도 충분히 토론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쉬는시간도 30분으로 늘렸다. 학생 스스로 짜임새 있게 시간을 활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시험을 없앤 것은 물론, 매일 다양한 방과후 특기적성수업을 진행하고, 목공예, 연극 등 새로운 배움의 기회도 제공했다. 오늘날 전국으로 퍼져나간 대안적 공립학교의 출발이자, 학교라는 삶의 현장에서 벌인 또 하나의 리빙랩 실험이었다.

이처럼 리빙랩은 혁신적 발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려는 노력과 더불어 늘 시도돼왔던 방식이다. 다만, 시대가 변하는 만큼 실험실의 규모와 평범한 다수의 역할이 달라져 왔을 뿐이다. 

리빙랩이 최근 한국에서 대세로 떠오른 이유

그렇다면 최근 한국에서 리빙랩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위해서는 보다 엄격한 학문적 개념으로서 리빙랩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 과학창조한국대전 ⓒ 김시연


성지은, 송위진 박사는 미국과 유럽에서 리빙랩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한 때를 1990년대로 본다. 이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IT에 대한 투자가 확대되고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생활환경·인프라 등이 대폭 개선되었고 실생활과 IT를 결합한 새로운 기술 개발이 시도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성지은·송위진 외, 2014). IT기술의 발달과 인프라의 확대가 건물 안에 갇혀 있던 실험실을 자연스럽게 삶의 공간으로 이끌어냈다는 분석이다.

성지은 박사는 최근 리빙랩이 관심을 끄는 이유도 과학기술계의 변화에서 찾았다. 성 박사는 "지금까지 과학기술계의 연구개발 목표는 경제성장과 산업경쟁력 강화였지만, 경제가 성장해도 시민의 일상이 바뀌긴 커녕 양극화와 불평등은 날로 심해졌다"며, "과학기술계의 미션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사회문제 해결형 연구개발'이 진행되면서 리빙랩 방식이 주목을 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대한민국엔 없는 과학기술이 없지만, 현장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송위진 박사의 말은 과학기술계의 또 다른 인식변화를 보여준다. 송 박사는 "이 무수한 기술들이 현장에 뿌리를 내리려면 최종 사용자와 함께 기획하고 실행하고 평가하는 프로세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이러한 인식변화가 자연스럽게 리빙랩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와 시장의 실패 늘수록 리빙랩의 역할 커질 것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접근과 시민의 더 큰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혁신(Social Innovation)'은 본래부터 '열린 실험'을 추구하는 리빙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영역일지 모른다. 다시 말해, 국가와 시장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난제가 늘어날수록 시민의 혁신적 발상과 협력에 기대려는 흐름은 커질 수밖에 없고, 이런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리빙랩이라는 '열린 실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 실험 참여자들이 IP 카메라와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모습.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천영환 전 팀장. 참가자들 뒤로 '물고기다리'가 보인다. ⓒ 천영환


그런 점에서 한국의 리빙랩 실험 1호이자 여전히 가장 성공적 사례로 꼽히는 대전 '건너유 프로젝트'는 여러모로 곱씹어 볼 만하다. 최근 서울에서 만난 실험의 기획자 천영환 전 사회적자본지원센터 사업지원팀장은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행정에만 의지하지 않고 시민의 자발성과 집단지성을 활용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실험을 추진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또한 "오픈소스 운동으로 누구나 ICT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기술을 가진 개인 간 호혜적 네트워크가 사회 발전의 새로운 모멘텀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그는 '물고기 다리'의 잦은 범람이라는 지역 문제를 발굴하는 것에서부터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혁신적 해법을 도출해내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이러한 기대와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모두가 디자인하는 시대>를 쓴 세계적 석학이자 사회혁신 디자인 권위자인 에치오 만치니 교수는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 <모두가 디자인하는 시대>(에치오 만치니 씀) ⓒ 한그래픽스

"전통적 경제 모델의 틀을 깨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해결 방안들은 다양한 사회 주체가 지닌 동기와 기대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새롭고 복잡한 이런 모델들은 공익 대 사익, 지역 대 세계, 소비자 대 생산자, 필요 대 소망 같은 관습적인 이분법을 넘어서는 모델을 제시한다."

그의 주장은 소비자와 생산자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다양한 사회 주체들의 동기와 기대가 어우러지는 '생활 실험실'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고 있다. 표현이야 어떻든 '사회혁신'이 걸어가야 할 길은 처음부터 '리빙랩'이라는 길과 가장 닮아있는 셈이다. 그러니 뭐라 부르든 '생활 실험실'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건 반가운 일에 틀림없다. 앞으로 우리 모두가 리빙랩을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끝으로 당부 한 마디. 한국의 리빙랩은 이제 막 걸음마를 떼려 하고 있다. 그러니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 한국의 리빙랩이 뿌리를 내리려면 아직 더 많은 삶의 현장에 '생활 실험실'이 꾸려지고, 더 많은 시민의 혁신적 발상이 빛을 발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많이 실패해야 한다. 모처럼 싹을 틔우기 시작한 리빙랩이라는 새로운 사회혁신 실험이 섣부른 기대와 조바심으로 금세 시들어버리지 않길 바란다. 그런 뜻에서 리빙랩은 기다리고 참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 삶의 현장이 늘 그렇듯이 말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자료
- 송위진. 2012. "Living Lab: 사용자 주도의 개방형 혁신모델"-'STEPI Issues&Policy 2012' 제59호.
- 성지은 외. 2016. "국내 리빙랩의 현황과 과제"-'STEPI Insight' vol.184.
- 성지은ㆍ송위진 외. 2014. "사용자 주도형 혁신모델로서 리빙랩 사례 분석과 적용 가능성 탐색"- '기술혁신학회지' 제17권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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