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의 애인 앨리스 현이 미제 스파이?
[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 30] 앨리스 현의 옛 집터에서
▲ 사진 속 우측 첫번째 2층 슬라브건물이 앨리스 현의 옥인동 집터이다. ⓒ 유영호
종로구 옥인동 일대는 그야말로 우리 현대사 속에서 '애국과 매국', '좌익과 우익'이 혼재된 채 그 주요인물들이 켜켜이 살다 간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 나는 해방 전후 이곳에 살다 북으로 망명하여 죽어간 비운의 여성, 앨리스 현의 집터에 서있다. 그녀는 박헌영이 자신의 '첫 애인'이라고 칭한 쉽지 않은 인물이다. 현재 그의 집은 흔적 조차 찾을 수 없다. 다만 '종로구 옥인동 92번지'라는 지번만으로 그의 집터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아버지 현순 목사는 관립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으며, 독립협회에 나가는 등 전형적인 개화파였다. 이러한 경력으로 그는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이민자들을 위한 통역자로 그들을 따라갔다. 그때 임신 중인 아내도 함께 가서 하와이 도착 두 달 만에 출산을 하는데 첫 애가 바로 앨리스 현이다. 그 뒤 1907년 돌아와 국내에서 교육을 받았으니 요즘 말로 아마 원정출산쯤 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 1921년 겨울 상하이의 한국유학생 모임인 화동학생연합회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① 앨리스 현, ② 주세죽, ③ 박헌영, ④ 피터 현 ⓒ 돌베개 제공
세상과의 만남이 이렇게 시작된 앨리스 현은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봄 제1회 이화고녀 졸업생이 되었으며, 이화여대에 입학한 뒤 1920년 중국 상해로 떠났다. 그에 앞서 3.1운동 직전에 상해로 간 현순 목사는 임시정부 수립에 깊이 관여하고, 또 3.1운동의 내용과 임시정부수립 소식을 미주에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활발한 대외활동으로 앨리스 현은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던 여러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박헌영, 여운형 등 사회주의자도 있었다.
동생 데이비드 현조차 상해 시절 박헌영과 여운형 모두 자기 누나에게 구애를 했다고 전한다. 특히 박헌영에 대해 "자신의 이상형이었으며, 모든 한국인들의 영웅"이라며 "박헌영이 자신의 매형이 되어주길 마음 속 깊이 희망했다"고 고백했다(출처 : <사진으로 보는 애국지사 현순 목사의 대한 독립운동>, 데이비드 현, 2002, 한국독립역사협회). 하지만 앨리스 현은 1922년 정준과 결혼을 하였고, 박헌영은 그 뒤 주세죽을 만나 1924년 결혼하였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국내 시댁으로 들어왔고, 이듬해 딸을 낳았지만 가정불화로 갓 태어난 아이를 두고 결국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3년 뒤 남편과 아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지만 이미 다시 합치기는 어려운 상황까지 갔고 결국 그는 이혼하고 하와이행 배에 올랐다. 하지만 그때 그의 몸에는 또 다른 생명체가 자라고 있었다.
미군 장교로 조국에 돌아 온 앨리스 현
▲ 앨리스 현과 그의 아들 웰링턴 정 ⓒ 돌베개 제공
이후 앨리스 현은 동생 피터 현과 함께 뉴욕으로 건너가 대학을 다녔으며, 1935년 하와이로 돌아온 남매는 미국 공산당 하와이지부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10년 가까이 보낸 앨리스 현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1943년 9월 미 육군부 정보부서에 결합하게 된다. 마흔 살이 막 넘은 때였다.
한편 동생 피터 현도 이듬해 입대하여 위스콘신주 캠프 맥코이에서 한국인 포로를 감시하는 일을 맡았다. 남매는 모두 일본어 관련 정보 업무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 다 한글은 물론 영어, 일어, 중국어까지 모두 능통했기 때문이다.
이후 전쟁이 끝난 1945년 10월 앨리스 현은 도쿄로 파견되어 맥아더사령부에 결합하였다. 두 달 뒤인 12월 다시 한국에 배속되어 주한 미24군 정보참모부 민간통신검열단(CCIG-K)에서 근무하게 된다. 하지만 앨리스 현은 국내에 들어와 이미 상해에서 알고 지냈던 박헌영, 여운형 등과 접촉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에서 온 그녀의 친구들"을 CCIG-K에 다수 고용함으로써 그곳 정보 업무를 파괴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어 미국으로 추방당한다(정병준, '현 앨리스 이야기', 역사비평 2012년 여름 호).
미국으로 돌아간 앨리스 현은 LA로 근거지를 옮겨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그곳의 또 다른공산주의 활동가 이사민과 함께 1949년 4월 북으로 망명신청을 하였다. 앨리스 현과 함께 망명 신청을 한 이사민은 태평양전쟁 시기 미 전략첩보국(OSS) 소속 공작 전문가였다.
▲ 앨리스 현의 아들 웰링턴 정이 의사가 되기 위해 체코로 떠나기 전 촬영한 가족 사진. ① 현순목사, ② 앨리스 현, ③ 웰링턴 정 ⓒ 돌베개 제공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지난 1995년 기사화한 내용에 따르면, 이들의 망명 신청에 대하여 체코 정부는 망명 동기가 모호하고 북한이 부모의 고향이라 밝혔지만 그것이 거짓임이 판명되자 그들을 의심하였다. 북한 내무성 안전국도 결국 이들의 망명 신청을 거부하였다.
이때부터 이사민·앨리스 현과 박헌영이 관련되기 시작한다고 서울신문은 보도했다. 당시 외무상이었던 박헌영이 내무성의 결정을 뒤집고 그들에게 입국사증을 발급해주었다는 것. 또 그들이 입국했을 때 직접 환영 행사까지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 후 이사민은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조사연구부 부부장으로 일했으며, 앨리스 현은 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서 일하는 등 그야말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서울신문은 '내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북한 이들이 짧은 기간에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 역시 박헌영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들의 입국 과정부터 의심을 갖고 있었던 내무성 안전국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코로 가던 도중 체포되고 만다. 모스크바 공항에서 이들의 소지품을 조사한 결과 여러 국가기밀자료가 나온 것.
이들의 '북한망명 이후 체포까지'의 이런 이야기에 대하여 정병준 교수는 반론을 제기한다(정병준, '현앨리스 이야기', 역사비평 2012년 여름호). 그에 의하면 앨리스 현과 이사민은 북에서 박헌영을 숙청하기 위한 죄목으로 '미제스파이'임을 꾸미기 위하여 이들의 이력이 이용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앨리스 현과 이사민이 박헌영 재판에 증인으로 등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생사가 명확히 공개되지 않았음을 든다(앨리스 현의 죽음에 대해서는 현재 남쪽에서는 누구도 모르는 상태다). 뿐만 아니라 1952년 초 주일미군 CIC가 체포한 북한공작원 김규호의 증언에 의하면, 이사민은 1952년까지 조국전선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은 진보적 재미한인 즉,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으로서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그녀에게 유일하게 남은 아들 역시 1963년 체코에서 자살함으로써 모자의 비극적인삶은 종결되고 말았다. 이처럼 비극적으로 사라져 버린 그녀의 삶, 명확히 밝혀지지 못한 그녀의 죽음 그리고 하나뿐인 자식조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비극적인 현실은 결국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세계 전쟁이 끝나고도 이데올로기로 분단된 현실이 그들의 삶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해방 전후의 여인, 앨리스 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참으로 슬펐다. 그녀가 과연 '미제스파이'였는지 아닌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전문연구자들의 몫이며, 훗날 통일이 되어야 명확히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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