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적들', 죽은 그들의 공통점
[인터뷰]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펴낸 신기철 소장
사물을 보는 눈과 역사를 보는 시각은 크게 세 가지 시각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피해자의 시각이고 둘째는 가해자의 시각이다. 셋째는 '중립'이라는 미명을 쓴 겁쟁이 혹은 방관자의 시각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이고 '제주4.3항쟁'이지만 같은 사건을 가해자는 '광주민중반란'과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폭동'으로 표현하고 기록한다.
내가 지난 노무현정부 시절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직장동료'로 만난 신기철은 피해자 입장에서 사물을 보고 역사를 기록한다. 사실 피해자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배고프고 고달프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을 하는 국가에서는 가해자 입장을 대변해 주고 가해자 시각으로 역사, 특히 현대사를 기록하는 일은 너무나 쉽고 수월하다. 정부에서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해줄 뿐 아니라 어엿한 '자리'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기철은 이런 '달콤한'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고 지난 10여 년간 피해자 입장에서 현대사를 조사, 연구했고 기록했다. 그리고 지난 2010년 말 진실화해위원회가 문을 닫은 후 지금까지 5권의 한국현대사에 관한 책을 썼다. 대학교수도 5년에 5권의 책을 쓰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는 요즘 그는 들판에서 5권의 연구서를 쓴 것이다(처음 2권은 거의 '실업자' 상태에서 썼다).
가장 최근에 쓴 책이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거대한 적들 이야기>이다. 역사 전공자인 기자도 이 책의 원고를 밤을 지새워보면서 많이 배웠고, 많이 느꼈고. 많이 가슴 아팠고, 많이 분노했다.
이 책은 이승만 정권기 억울하게 학살당한 열 분에 관한 담담한 이야기다. 이 분들은 민주주의 혁명가, 숙청 군인, 항일운동가, 상식적인 시민들이었다. 왜 이승만은 이런 훌륭한 분들을 학살했을까?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우리현대사의 비극이고 신비한(?) 수수께끼다. 다음은 지난 한 달간 저자 신기철 선생과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 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거대한 적들 이야기>를 펴낸 것을 축하드린다. 지난 2010년 12월 31일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가 이명박 정권에 의해 문을 닫은 후 정부차원의 과거사정리는 막을 내렸다. 그 후 지난 5년여 간 들판에서 과거사정리에 관한 책을 무려 다섯 권이나 썼는데,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줄기차게 개인적 차원에서 과거사정리를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부터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까지 고문, 학살, 실종이라는 국가 범죄의 생생한 사례들이 규명되었는데, 정작 진실은 수십 권의 보고서에 묻혀 봉인되어 버린 느낌이다. 실제 옛 조사기록을 다시 보려고 해도 방법이 없다. 지난 과거사 기구들이 진실을 드러내어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묻었다고나 할까. 다시 끄집어내야하고 기회가 된다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과거사가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의 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덮자고 한 일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하자고 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종료는 새로운 출발이어야 하는데...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가의 책임 회피, 최근 사드(THAAD) 배치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정책을 봐라. 박 정권이 하는 짓을 보면 국민주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거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다르다. 패배주의를 극복했다고 할까? 자기 권리를 정확히 주장하고 있다. 돈 몇 푼에 찌그러지지도 않고 지역의 이익도 넘어 서고 있다. 과거사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은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 국민 주권이 아니겠나? 이를 이해하는 오늘의 시민은 어제의 시민이 아니라고 믿는다. 내 작업이 그 흐름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애국과 반공이란 이름 아래 반인륜 범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 책의 부제가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거대한 적들 이야기"인데, '이승만의 거대한 적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왜 이들(희생자나 피해자들)을 '거대한 적들'이라고 표현했는지?
"최근 고양금정굴사건 희생자를 '김일성 앞잡이', '죽창을 들이 댄' 부역자였고 이들을 총살한 행위는 '학살'이 아니라 '처형'이었다는 한 고양시의원이 있었다. 재판 없이 죽인 것은 맞지만 죽을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라는 발언이었다. 명예훼손 소송이 진행 중이지만 승패를 떠나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1심 재판부는 지난 7월 7일 원고 승소 판결했다) 애국이나 반공이란 이름 아래 집단학살이라는 반인륜 범죄를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돌아보니 한국전쟁 전후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편견은 여전한 것 같다. 그들은 이 책에 소개한 분들을 남로당원이나 사회주의자라고 보는데 나는 이 말이 타당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검토해 봤다. 그 결과 어느 판결문도 그 사실이 입증된 경우는 없다.
열 분에 불과하지만 집단을 지어봤더니 민주주의혁명가, 숙청 군인, 항일운동가, 상식적인 시민들로 나눌 수 있었다. 그랬더니 모두 '이승만의 적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군정에 의존해 친일파를 등용했고, 군내 비리를 통해 정치자금을 확보했다. 친일경찰과 군인들을 동원에 생존권 투쟁에 나선 노동자 농민들을 학살했고, 국군 수복 후에는 패전의 책임을 점령지역 민중들에게 떠넘겼다. 이에 반대한 사람들이 모두 이승만의 적들이었을 텐데, 결국 일반 국민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하더라는 것이다."
- 이승만과 이승만 사후 박정희를 비롯한 오늘 한국의 수구세력들은 100만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의 억울하고 한 많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 알면서도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하고 오히려 은폐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들은 왜 그럴까?
"지난 2002년 '위령사업 촉구결의안'이 고양시의회에서 다루어질 때였다. 결국 부결되고 말았는데, 그때 의회 입구에 이런 내용의 벽보가 붙어 있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국가유공자가 설 자리는 없습니다.' 놀라운 이야기 아닌가? 민간인학살 사실을 인정하면 국가 존립이 흔들린다는 인식이다. 국가범죄에 대한 공범의식인 것이다. 이런 공범의식은 세월호 사건 진상규명에도, 사드 반대 성주 집회에도 나타난다. 진짜 외부인들 말이다.
나는 이를 가해자의 범죄은폐 심리라고 본다.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는 불리한 순간마다 반공과 애국을 주장하며 은폐해 왔다. 반인륜 범죄행위에 대한 공범의식으로 포장된 추악한 부정비리의 진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무관심 같다. 너무나 보편화되어서 참상의 느낌이 없는 것이다. 무한경쟁에서 이겨 살아남는 것만을 최고로 여기는 사회는 생명의 가치를 폄하하는 문화를 갖게 된다는 연구가 있다. 범죄를 용인하는 사회. 우리 사회가 그 지경까지 간 것은 아니길 바란다."
김창룡조차 '엉뚱한 사람들도 많이 죽었다'
-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그들은 누구였나? 이들은 한국전쟁기 이승만 정권 아래서 어떤 삶을 살았나?
"100만 명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 우리 주변 누구나 이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만큼 피해자들은 우리의 가까운 이웃들, 쉽게 만날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분들은 사회의식 수준에 있어서 평균보다 조금 앞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연령층은 주로 20대 후반에서 30대에 몰려 있었을 것이고.
해방 후 친일파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일제도 시도하지 않았던 남북을 분단시키고, 쌀값은 오를 뿐 아니라 구경도 못하게 되고, 경찰의 감시 아래 투표하는 부정이 저질러지고, 사병들의 밥값까지 빼돌리는 부정부패한 장교들이 오히려 청렴하고 실력 있는 장교를 숙청하는 현실을 이런 분들이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 저항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을 것 같다. 이것이 1950년 5월 총선거 결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2대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맞은 이승만 세력은 이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던 것으로 본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건 국군수복 후 부역혐의자 학살이다. 희생자들 상당수는 정치적 반대자도 아니었다. 김창룡조차 그해 11월 말 시인하는 인터뷰를 한다. '엉뚱한 사람들도 많이 죽었다'고. 이게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묻지 마' 범죄의 원형이다."
- 국방부에서 펴낸 <한국전쟁사>는 한국전쟁 직전 국군의 수가 9만8천 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국군 중 약 5%의 군인들이 남로당 관련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군복을 벗어야 했거나 총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하나?
"민간인학살 사건에 있어서 군인들의 신분은 대개 가해자 측으로 여기지만 여기에는 숙청당한 피해자도 많다. 또 군인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피학살 민간인의 가족이기도 하다. 친일파 고급장교들을 제외한다면 병사 대부분은 민중의 아들딸이었다.
나는 숙군의 과정을 미군정과 이승만세력의 친위쿠데타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숙군은 반란을 낳았고 반란은 다시 숙군을 낳았다. 악순환이었지만 그래도 어느 것이 먼저였냐고 따지자면 숙군이 먼저라고 답하겠다. 자질 없던 친일 고급장교들은 창군 당시부터 사병들의 밥값까지 빼돌려 사익을 취했다. 저항이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하극상이라며 처단했는데 이것이 숙군의 시작이었다고 본다.
가장 대표적인 반란이자 숙군의 사례인 여수 14연대 반란을 보자. 남로당의 봉기 음모를 상식처럼 여기지만 진실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14연대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9월 말 연행 당했다. 군내 반란조직인 <혁명의용군> 주모자라는 이유였다.
그런데 <혁명의용군>의 실체는 증명된 바 없으니 이 사실을 목격한 14연대 병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구 6연대 사건도 전 연대장 최남근 소령의 석방을 주장하며 봉기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14연대도 오동기 소령의 석방을 주장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아직 역사학계에서 주목하지 못하고 있지만 연대장의 연행은 14연대원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국방부는 숙청당한 군인은 모두 4375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장교 242명, 사병 4133명이다. 여순반란 참여 군인 1000~2000명이나 강표월북사건처럼 월북한 군인 300여 명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니 숙군에 얽혀 사라진 군인들이 8천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 책에서 이승만 정권은 남로당 관련혐의자에 대해 모진 고문을 하고 재판 후에 무죄 판결난 군인조차 석방하지 않고 학살했다고 했는데, 왜 이승만은 무죄 판결난 이들조차 석방하지 않고 학살했다고 생각하나?
"1948년 12월 7일 해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반란조직인 <해상의용군>에 가입했다던 대위 이항수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이항수 대위를 석방하지 않고 마산형무소에 가두었다가 1950년 7월 5일 마산 앞바다 무인도에서 학살했다. 일제 식민지 정권조차 이런 사례가 있었나?
나로서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국가가 아니라 조직폭력배들의 집단도 이렇게 하진 않을 것 같다. 조직을 유지하는 기본 원칙이 있을 텐데 그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한다면 이게 무슨 조직이겠나? 숙군을 정치쿠데타로 본다 하더라도 자신들에게 무해한 사람까지 죽이는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를 숙군으로도 보는 것조차 합리적인 설명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로당원 200명을 넘겼다는 박정희"
- 책은 <해상의용군>은 1946년 11월부터 1948년 8월까지 활동했고 <해상인민군>은 1948년 8월부터 11월까지 활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병조장 이항표가 의심을 받기 시작한 때가 1948년 5월이고 체포당한 때는 3개월 후인 8월이니 <해상의용군>은 이항표의 체포 전 조직이고 <해상인민군>은 체포 후 만들어진 조직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한 사람을 통해 두 가지 반란조직이 그것도 체포 후에 만들어진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지?
"국가보안법이나 국방경비법의 처벌대상은 이적조직, 반란조직의 실체를 전제로 한다. 이것이 없으면 처벌하지 못한다. 이적 조직이 있고 이에 가입해야 하고 가입 사실이 문서나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범죄의 세 가지 구성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국가보안법상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관련 단체라고 낙인찍으면 무조건 처벌 대상이 된다. 정당도 해산당할 정도니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결사의 자유는 대한민국엔 없는 거나 다름없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한 1948년 5월은 대한민국 출범 전이었다. 그러니 물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도 없을 때였다. 반국가단체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군내 반란단체들을 만들어야 처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반란조직은 좌익 여부와 관련 없다는 것이다.
앞 오동기 소령의 <혁명의용군>, 해군의 <해상의용군>, <해상인민군>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름에서만 조작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다. 반란의 전제로 삼고 있는 이 조직들은 유령 조직으로 보인다. 반란을 도모했다는 사실도 증명되지 않으며 가입 사실을 증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직 '군기문란조직'이란 군법회의의 선언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들 <해상의용군> <해상인민군>은 전형적인 가공 조직이라고 본다. 이항표는 남로당원 200명을 넘겼다는 박정희처럼 두루마기 문서에 해군 내 숙청대상자 명단을 넘겼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형적인 프락치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백선엽의 거짓말
- 이상규 소령은 해군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는 해병대 창설 제안자 중 한 사람임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회고록에서 지워졌다. 왜 이상규 소령에 대한 기록이 해군의 역사와 그의 동료들의 회고록에서 지워졌다고 생각하는지?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사>, 중앙정보부 <북한대남공작사>, <부산신문> 등 1970년대 이전 자료들에서는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해군에서는 이상규 소령을 해군 진압책임자로 임명하고 7척의 배를 지휘한 사실과 해병대 창설 제안 보고서 제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상관이었을 신현준, 부하였을 공정식은 이 사실들을 기록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치 자신들이 했던 일로 주장하고 있다.
나는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던 1950년 9월 15일 이 작전에 참여했다는 국군 17연대장 백인엽의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는 9월 24일 전투 없이 인천에 내렸을 뿐이다. 이 외에도 당시 군인들이 전공을 높이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는 경우를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역사가들이 이러한 거짓을 알면서도 묵인한다는 것이다.
해군 뿐 아니라 육군도 숙청당한 군인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더 나아가 그들을 모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장도영은 15연대장 최남근 소령에 대해서는 여수 14연대 반군을 지도하기까지 했다는 주장까지 한다.
개인감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무척 비겁한 주장으로 보인다. 이상규 소령의 경우도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신씨나 공씨 등의 회고록을 보면 일제 군인출신들이 민간인 출신들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보인다. 반면 항해 자격증까지 갖고 있었던 이 소령은 '배도 모르는 자들이 해군이라고?'했을 수 있었겠다."
- 한국전쟁기 이념공세의 가장 큰 희생자들은 이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루하루를 그저 꾸준히 살아갔던 일반 농민이나 민중이 대다수였다. 어떻게 이런 죄 없는 일반 농민이나 민중이 이승만 정권의 최대 희생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일반 민중의 피해가 컸던 것은 특권층 중심의 정치 철학이나 정책에 있었다고 본다. 경제관료들이 주장하는 낙수이론 같은 거였겠다. 국민을 주권자로 본 것이 아니라 '개돼지'로 보았던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집권을 위협하는 비협조 세력으로 보았던 것이었다.
전쟁 전 국민보도연맹원이 34만 명, 형무소 재소자가 5만 명이었다. 이들 대부분 1950년 7월 학살당했다. 그런데 불과 2개월 만에 다시 55만 명의 처단대상이 생겼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로선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가설이 이승만 세력을 '점령자'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전투사나 혁명사를 보면 상당수의 희생이 따른 전투 후 점령했을 경우 보복학살이 벌어지는 사례를 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의 경우는 이런 상식과 전혀 맞지 않는다. 후퇴할 때나 점령할 때나 격렬한 전투 피해가 보고된 사례는 없다. 보복학살이 아니라 고도로 의도된 학살이었다. 이는 보복이라는 상식과 다르게 뒤집어서 봐야 한다.
민간인학살사건과 이승만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쟁점의 핵심은 첫 출발이 언제로 보느냐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발발일인 6월 25일을 기점으로 본다면 민간인학살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적어도 1948년, 더 나아가 1945년까지 앞당겨야 한다. 가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승만의 점령은 미군정의 주둔과 같이 시작된다. 두 세력은 신생 정권의 안정을 위해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하다가 전쟁을 맞게 된다. 물러나면서 국민들을 학살하고 떠난다. 적에게 협력할까 봐. 이는 그동안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점령자였음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공화국 대통령이 자기 국민을 보호한다는 생각이었다면 이런 짓, 국민보도연맹사건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수복 후에도 마찬가지다. 수복 후 부역의심자들의 명부를 작성하고 연행하여 학살했다. 이런 행위는 침략자들이 저지르는 방식과 같았으니 이승만 정부는 수복한 것이 아니라 재점령했던 것이다. 위 가설은 비약이라든가 반미주의라든가 하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이 외에 달리 100만 학살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었다."
"피해자가 싸우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해 주지 못한다"
-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느낀 점이 많을 텐데. 특별히 지난 반세기가 넘는 동안 왜 우리 정부와 사회는 그 억울한 학살 희생자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는지?
"해방과 전쟁 세대들의 자연 수명이 다 해 간다. 가해자의 은폐 시도는 거의 성공했다. 그리고 이에 비해 피해 집단은 아직까지도 가해 애착 현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무기력한 피해자가 고문자에게 애착이 생기는 현상 말이다. 제3자는 저 피해가 나에게도 옮길까 봐 지켜보는데 그치고 있고. 방관자 현상이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자들은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에 편승한 기회주의 세력인지도 모른다. 이들도 민중을 개돼지로 여기기는 마찬가지일 수 있다.
피해자들에겐 너무나 가혹한 주장일 수 있는데, 이를 해결하는 방안은 가장 먼저 피해자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문제다. 천안함 사건의 경우 나는 의혹을 떨칠 수 없는데, 돈이나 특혜 같은 방법에 의해 피해자 집단의 의지가 사라지면 진실규명 싸움은 멈추게 되지 않나? 피해자가 싸우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해 주지 못한다. 피해자가 싸워야 그 다음으로 정의로운 시민들이 가세할 것이고, 여론이 형성되고 그래서 가해자가 처벌되고. 그렇게 사회정의가 세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해 집단 대부분은 보수정당을 지지해 왔다"
- 법치국가에서는 고문에 의해 얻은 증거는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거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야만적인 고문에 의한 '자백'으로 '빨갱이'로 몰리고 억울하게 생명을 잃거나 몸과 마음이 망가진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해 왜 지금까지도 정부는 이 분들의 명예를 회복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회복시켜 주지 않는 것일까?
"위헌 또는 불법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흔한 논리가 한국사회를 지배한다. 사법부가 말하는 법적 안정성 논리,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그러니 그냥 넘어가자는 공감대가 있다. 게다가 놀라운 건 피해 집단조차 여기에 동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나는 2011년 단심재판에 의한 처벌이 위헌이라는 헌법위원회의 1952년 9월 9일 결정을 헌법재판소 도서관에서 발견한 이래 줄기차게 알려왔다. 내가 보기엔 현재 한국사회 법조계의 인권의식은 사실 1952년 선배들만도 못하다.
그리고 지금은 짐작이 어려우실지 모르겠지만 피해 집단 대부분은 보수정당을 지지해 왔다. 가장 강하게 국가의 무오류성을 받아들여 왔던 분들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랬던 분들이 20년에 걸친 진실규명 활동을 통해 정치 성향을 바꾼 것이다. 어쩌면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한 것이고.
한편, 가해 집단이 자신들의 범죄를 고백하긴 어려울 것이다. 청와대 권력형 비리나 법조 비리, 기업인의 패륜과 부정부패를 보자. 처벌되지 않고 반복된다. 무려 70여 년을 민주화 세력들까지 흡수하거나 무력화 시키면서 변함없이 공고한 성벽을 유지해 왔다.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결국 희생자의 명예회복은 피해 집단 스스로의 단결력에서 나올 수밖에 없어 보인다."
- 이번 저서를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다음 구상하고 있는 집필 분야나 계획을 소개해 줄 수 있는지?
"나한테는 피해자 편향이 있는 것 같다. 진실화해위원회 근무할 때와 달리 지금은 객관성을 유지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 면담의 깊이가 내면으로 더해 갈수록 객관적 태도의 필요성을 잘 알겠더라. 슬픈 이야기인 만큼 나로서도 더 힘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피해 사실에 대한 정리 없이 가해자의 범죄를 논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방식이라고 본다. 축적된 자료를 활용한 인권침해범죄자 열전이나 반민족행위자 사전 같은 것이 꼭 필요하겠지만 피해조사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한다. 위안부 할머님들의 명예를 논하는 거야 지극히 당연하지만 상대적으로 그 사이 일제가 저질렀던 잔혹한 범죄를 규명하는 일도 함께 되었으면 한다.
고양시만 봐도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매년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상여 행렬을 광화문에서 열었지만 정작 일제시기 피해를 조사하거나 항일운동가들을 지원한다든가 하는 데는 소홀히 했다. 할머니들을 이용해 주목받기 위한 정치쇼에 불과해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조금 내성이 생긴 것 같다. 다음은 가혹행위에 대해 정리해 볼까 한다. 서구 심리학자나 언론인들이 이에 대해 실험적 시도를 하던데, 나는 일단 사례부터 모아보려고 한다. '한국전쟁과 인권'이라는 큰 틀 아래에서 정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 신기철은 5.16쿠데타를 피해 무작정 상경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독재는 물론 권위를 매우 싫어했으니 아나키스트라는 별명이 있다. 1985년 이래 기계금속노동자로 인천과 구로, 영등포 등에서 노동운동에 참여했으며, 1997년 이후 고양지역 시민운동에서 금정굴 민간인학살 사건을 만났다. 이를 인연으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했다. 두 조직 활동기간을 합쳐 무려 6년 동안 국가범죄, 전쟁범죄를 다뤘다. 지금은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에서 인권평화연구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새로 나타난 사건은 물론 이미 진실규명된 사례들을 인권의 관점에서 심층 재구성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진실 역시 놓칠 수 없는 관심사이다. 저서로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전쟁범죄>, <멈춘시간1950> 등이 있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을 하는 국가에서는 가해자 입장을 대변해 주고 가해자 시각으로 역사, 특히 현대사를 기록하는 일은 너무나 쉽고 수월하다. 정부에서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해줄 뿐 아니라 어엿한 '자리'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기철은 이런 '달콤한'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고 지난 10여 년간 피해자 입장에서 현대사를 조사, 연구했고 기록했다. 그리고 지난 2010년 말 진실화해위원회가 문을 닫은 후 지금까지 5권의 한국현대사에 관한 책을 썼다. 대학교수도 5년에 5권의 책을 쓰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는 요즘 그는 들판에서 5권의 연구서를 쓴 것이다(처음 2권은 거의 '실업자' 상태에서 썼다).
가장 최근에 쓴 책이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거대한 적들 이야기>이다. 역사 전공자인 기자도 이 책의 원고를 밤을 지새워보면서 많이 배웠고, 많이 느꼈고. 많이 가슴 아팠고, 많이 분노했다.
이 책은 이승만 정권기 억울하게 학살당한 열 분에 관한 담담한 이야기다. 이 분들은 민주주의 혁명가, 숙청 군인, 항일운동가, 상식적인 시민들이었다. 왜 이승만은 이런 훌륭한 분들을 학살했을까?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우리현대사의 비극이고 신비한(?) 수수께끼다. 다음은 지난 한 달간 저자 신기철 선생과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 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신기철 ⓒ 신기철
-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거대한 적들 이야기>를 펴낸 것을 축하드린다. 지난 2010년 12월 31일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가 이명박 정권에 의해 문을 닫은 후 정부차원의 과거사정리는 막을 내렸다. 그 후 지난 5년여 간 들판에서 과거사정리에 관한 책을 무려 다섯 권이나 썼는데,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줄기차게 개인적 차원에서 과거사정리를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부터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까지 고문, 학살, 실종이라는 국가 범죄의 생생한 사례들이 규명되었는데, 정작 진실은 수십 권의 보고서에 묻혀 봉인되어 버린 느낌이다. 실제 옛 조사기록을 다시 보려고 해도 방법이 없다. 지난 과거사 기구들이 진실을 드러내어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묻었다고나 할까. 다시 끄집어내야하고 기회가 된다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과거사가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의 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덮자고 한 일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하자고 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종료는 새로운 출발이어야 하는데...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가의 책임 회피, 최근 사드(THAAD) 배치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정책을 봐라. 박 정권이 하는 짓을 보면 국민주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거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다르다. 패배주의를 극복했다고 할까? 자기 권리를 정확히 주장하고 있다. 돈 몇 푼에 찌그러지지도 않고 지역의 이익도 넘어 서고 있다. 과거사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은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 국민 주권이 아니겠나? 이를 이해하는 오늘의 시민은 어제의 시민이 아니라고 믿는다. 내 작업이 그 흐름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애국과 반공이란 이름 아래 반인륜 범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 책의 부제가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거대한 적들 이야기"인데, '이승만의 거대한 적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왜 이들(희생자나 피해자들)을 '거대한 적들'이라고 표현했는지?
"최근 고양금정굴사건 희생자를 '김일성 앞잡이', '죽창을 들이 댄' 부역자였고 이들을 총살한 행위는 '학살'이 아니라 '처형'이었다는 한 고양시의원이 있었다. 재판 없이 죽인 것은 맞지만 죽을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라는 발언이었다. 명예훼손 소송이 진행 중이지만 승패를 떠나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1심 재판부는 지난 7월 7일 원고 승소 판결했다) 애국이나 반공이란 이름 아래 집단학살이라는 반인륜 범죄를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돌아보니 한국전쟁 전후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편견은 여전한 것 같다. 그들은 이 책에 소개한 분들을 남로당원이나 사회주의자라고 보는데 나는 이 말이 타당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검토해 봤다. 그 결과 어느 판결문도 그 사실이 입증된 경우는 없다.
열 분에 불과하지만 집단을 지어봤더니 민주주의혁명가, 숙청 군인, 항일운동가, 상식적인 시민들로 나눌 수 있었다. 그랬더니 모두 '이승만의 적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군정에 의존해 친일파를 등용했고, 군내 비리를 통해 정치자금을 확보했다. 친일경찰과 군인들을 동원에 생존권 투쟁에 나선 노동자 농민들을 학살했고, 국군 수복 후에는 패전의 책임을 점령지역 민중들에게 떠넘겼다. 이에 반대한 사람들이 모두 이승만의 적들이었을 텐데, 결국 일반 국민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하더라는 것이다."
- 이승만과 이승만 사후 박정희를 비롯한 오늘 한국의 수구세력들은 100만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의 억울하고 한 많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 알면서도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하고 오히려 은폐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들은 왜 그럴까?
"지난 2002년 '위령사업 촉구결의안'이 고양시의회에서 다루어질 때였다. 결국 부결되고 말았는데, 그때 의회 입구에 이런 내용의 벽보가 붙어 있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국가유공자가 설 자리는 없습니다.' 놀라운 이야기 아닌가? 민간인학살 사실을 인정하면 국가 존립이 흔들린다는 인식이다. 국가범죄에 대한 공범의식인 것이다. 이런 공범의식은 세월호 사건 진상규명에도, 사드 반대 성주 집회에도 나타난다. 진짜 외부인들 말이다.
나는 이를 가해자의 범죄은폐 심리라고 본다.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는 불리한 순간마다 반공과 애국을 주장하며 은폐해 왔다. 반인륜 범죄행위에 대한 공범의식으로 포장된 추악한 부정비리의 진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무관심 같다. 너무나 보편화되어서 참상의 느낌이 없는 것이다. 무한경쟁에서 이겨 살아남는 것만을 최고로 여기는 사회는 생명의 가치를 폄하하는 문화를 갖게 된다는 연구가 있다. 범죄를 용인하는 사회. 우리 사회가 그 지경까지 간 것은 아니길 바란다."
김창룡조차 '엉뚱한 사람들도 많이 죽었다'
-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그들은 누구였나? 이들은 한국전쟁기 이승만 정권 아래서 어떤 삶을 살았나?
"100만 명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 우리 주변 누구나 이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만큼 피해자들은 우리의 가까운 이웃들, 쉽게 만날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분들은 사회의식 수준에 있어서 평균보다 조금 앞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연령층은 주로 20대 후반에서 30대에 몰려 있었을 것이고.
해방 후 친일파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일제도 시도하지 않았던 남북을 분단시키고, 쌀값은 오를 뿐 아니라 구경도 못하게 되고, 경찰의 감시 아래 투표하는 부정이 저질러지고, 사병들의 밥값까지 빼돌리는 부정부패한 장교들이 오히려 청렴하고 실력 있는 장교를 숙청하는 현실을 이런 분들이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 저항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을 것 같다. 이것이 1950년 5월 총선거 결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2대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맞은 이승만 세력은 이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던 것으로 본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건 국군수복 후 부역혐의자 학살이다. 희생자들 상당수는 정치적 반대자도 아니었다. 김창룡조차 그해 11월 말 시인하는 인터뷰를 한다. '엉뚱한 사람들도 많이 죽었다'고. 이게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묻지 마' 범죄의 원형이다."
- 국방부에서 펴낸 <한국전쟁사>는 한국전쟁 직전 국군의 수가 9만8천 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국군 중 약 5%의 군인들이 남로당 관련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군복을 벗어야 했거나 총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하나?
"민간인학살 사건에 있어서 군인들의 신분은 대개 가해자 측으로 여기지만 여기에는 숙청당한 피해자도 많다. 또 군인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피학살 민간인의 가족이기도 하다. 친일파 고급장교들을 제외한다면 병사 대부분은 민중의 아들딸이었다.
나는 숙군의 과정을 미군정과 이승만세력의 친위쿠데타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숙군은 반란을 낳았고 반란은 다시 숙군을 낳았다. 악순환이었지만 그래도 어느 것이 먼저였냐고 따지자면 숙군이 먼저라고 답하겠다. 자질 없던 친일 고급장교들은 창군 당시부터 사병들의 밥값까지 빼돌려 사익을 취했다. 저항이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하극상이라며 처단했는데 이것이 숙군의 시작이었다고 본다.
가장 대표적인 반란이자 숙군의 사례인 여수 14연대 반란을 보자. 남로당의 봉기 음모를 상식처럼 여기지만 진실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14연대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9월 말 연행 당했다. 군내 반란조직인 <혁명의용군> 주모자라는 이유였다.
그런데 <혁명의용군>의 실체는 증명된 바 없으니 이 사실을 목격한 14연대 병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구 6연대 사건도 전 연대장 최남근 소령의 석방을 주장하며 봉기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14연대도 오동기 소령의 석방을 주장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아직 역사학계에서 주목하지 못하고 있지만 연대장의 연행은 14연대원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국방부는 숙청당한 군인은 모두 4375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장교 242명, 사병 4133명이다. 여순반란 참여 군인 1000~2000명이나 강표월북사건처럼 월북한 군인 300여 명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니 숙군에 얽혀 사라진 군인들이 8천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 책에서 이승만 정권은 남로당 관련혐의자에 대해 모진 고문을 하고 재판 후에 무죄 판결난 군인조차 석방하지 않고 학살했다고 했는데, 왜 이승만은 무죄 판결난 이들조차 석방하지 않고 학살했다고 생각하나?
"1948년 12월 7일 해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반란조직인 <해상의용군>에 가입했다던 대위 이항수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이항수 대위를 석방하지 않고 마산형무소에 가두었다가 1950년 7월 5일 마산 앞바다 무인도에서 학살했다. 일제 식민지 정권조차 이런 사례가 있었나?
나로서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국가가 아니라 조직폭력배들의 집단도 이렇게 하진 않을 것 같다. 조직을 유지하는 기본 원칙이 있을 텐데 그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한다면 이게 무슨 조직이겠나? 숙군을 정치쿠데타로 본다 하더라도 자신들에게 무해한 사람까지 죽이는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를 숙군으로도 보는 것조차 합리적인 설명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로당원 200명을 넘겼다는 박정희"
- 책은 <해상의용군>은 1946년 11월부터 1948년 8월까지 활동했고 <해상인민군>은 1948년 8월부터 11월까지 활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병조장 이항표가 의심을 받기 시작한 때가 1948년 5월이고 체포당한 때는 3개월 후인 8월이니 <해상의용군>은 이항표의 체포 전 조직이고 <해상인민군>은 체포 후 만들어진 조직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한 사람을 통해 두 가지 반란조직이 그것도 체포 후에 만들어진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지?
"국가보안법이나 국방경비법의 처벌대상은 이적조직, 반란조직의 실체를 전제로 한다. 이것이 없으면 처벌하지 못한다. 이적 조직이 있고 이에 가입해야 하고 가입 사실이 문서나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범죄의 세 가지 구성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국가보안법상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관련 단체라고 낙인찍으면 무조건 처벌 대상이 된다. 정당도 해산당할 정도니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결사의 자유는 대한민국엔 없는 거나 다름없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한 1948년 5월은 대한민국 출범 전이었다. 그러니 물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도 없을 때였다. 반국가단체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군내 반란단체들을 만들어야 처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반란조직은 좌익 여부와 관련 없다는 것이다.
앞 오동기 소령의 <혁명의용군>, 해군의 <해상의용군>, <해상인민군>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름에서만 조작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다. 반란의 전제로 삼고 있는 이 조직들은 유령 조직으로 보인다. 반란을 도모했다는 사실도 증명되지 않으며 가입 사실을 증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직 '군기문란조직'이란 군법회의의 선언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들 <해상의용군> <해상인민군>은 전형적인 가공 조직이라고 본다. 이항표는 남로당원 200명을 넘겼다는 박정희처럼 두루마기 문서에 해군 내 숙청대상자 명단을 넘겼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형적인 프락치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백선엽의 거짓말
- 이상규 소령은 해군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는 해병대 창설 제안자 중 한 사람임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회고록에서 지워졌다. 왜 이상규 소령에 대한 기록이 해군의 역사와 그의 동료들의 회고록에서 지워졌다고 생각하는지?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사>, 중앙정보부 <북한대남공작사>, <부산신문> 등 1970년대 이전 자료들에서는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해군에서는 이상규 소령을 해군 진압책임자로 임명하고 7척의 배를 지휘한 사실과 해병대 창설 제안 보고서 제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상관이었을 신현준, 부하였을 공정식은 이 사실들을 기록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치 자신들이 했던 일로 주장하고 있다.
나는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던 1950년 9월 15일 이 작전에 참여했다는 국군 17연대장 백인엽의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는 9월 24일 전투 없이 인천에 내렸을 뿐이다. 이 외에도 당시 군인들이 전공을 높이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는 경우를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역사가들이 이러한 거짓을 알면서도 묵인한다는 것이다.
해군 뿐 아니라 육군도 숙청당한 군인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더 나아가 그들을 모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장도영은 15연대장 최남근 소령에 대해서는 여수 14연대 반군을 지도하기까지 했다는 주장까지 한다.
개인감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무척 비겁한 주장으로 보인다. 이상규 소령의 경우도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신씨나 공씨 등의 회고록을 보면 일제 군인출신들이 민간인 출신들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보인다. 반면 항해 자격증까지 갖고 있었던 이 소령은 '배도 모르는 자들이 해군이라고?'했을 수 있었겠다."
- 한국전쟁기 이념공세의 가장 큰 희생자들은 이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루하루를 그저 꾸준히 살아갔던 일반 농민이나 민중이 대다수였다. 어떻게 이런 죄 없는 일반 농민이나 민중이 이승만 정권의 최대 희생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일반 민중의 피해가 컸던 것은 특권층 중심의 정치 철학이나 정책에 있었다고 본다. 경제관료들이 주장하는 낙수이론 같은 거였겠다. 국민을 주권자로 본 것이 아니라 '개돼지'로 보았던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집권을 위협하는 비협조 세력으로 보았던 것이었다.
전쟁 전 국민보도연맹원이 34만 명, 형무소 재소자가 5만 명이었다. 이들 대부분 1950년 7월 학살당했다. 그런데 불과 2개월 만에 다시 55만 명의 처단대상이 생겼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로선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가설이 이승만 세력을 '점령자'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전투사나 혁명사를 보면 상당수의 희생이 따른 전투 후 점령했을 경우 보복학살이 벌어지는 사례를 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의 경우는 이런 상식과 전혀 맞지 않는다. 후퇴할 때나 점령할 때나 격렬한 전투 피해가 보고된 사례는 없다. 보복학살이 아니라 고도로 의도된 학살이었다. 이는 보복이라는 상식과 다르게 뒤집어서 봐야 한다.
민간인학살사건과 이승만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쟁점의 핵심은 첫 출발이 언제로 보느냐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발발일인 6월 25일을 기점으로 본다면 민간인학살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적어도 1948년, 더 나아가 1945년까지 앞당겨야 한다. 가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승만의 점령은 미군정의 주둔과 같이 시작된다. 두 세력은 신생 정권의 안정을 위해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하다가 전쟁을 맞게 된다. 물러나면서 국민들을 학살하고 떠난다. 적에게 협력할까 봐. 이는 그동안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점령자였음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공화국 대통령이 자기 국민을 보호한다는 생각이었다면 이런 짓, 국민보도연맹사건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수복 후에도 마찬가지다. 수복 후 부역의심자들의 명부를 작성하고 연행하여 학살했다. 이런 행위는 침략자들이 저지르는 방식과 같았으니 이승만 정부는 수복한 것이 아니라 재점령했던 것이다. 위 가설은 비약이라든가 반미주의라든가 하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이 외에 달리 100만 학살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었다."
"피해자가 싸우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해 주지 못한다"
-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느낀 점이 많을 텐데. 특별히 지난 반세기가 넘는 동안 왜 우리 정부와 사회는 그 억울한 학살 희생자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는지?
"해방과 전쟁 세대들의 자연 수명이 다 해 간다. 가해자의 은폐 시도는 거의 성공했다. 그리고 이에 비해 피해 집단은 아직까지도 가해 애착 현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무기력한 피해자가 고문자에게 애착이 생기는 현상 말이다. 제3자는 저 피해가 나에게도 옮길까 봐 지켜보는데 그치고 있고. 방관자 현상이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자들은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에 편승한 기회주의 세력인지도 모른다. 이들도 민중을 개돼지로 여기기는 마찬가지일 수 있다.
피해자들에겐 너무나 가혹한 주장일 수 있는데, 이를 해결하는 방안은 가장 먼저 피해자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문제다. 천안함 사건의 경우 나는 의혹을 떨칠 수 없는데, 돈이나 특혜 같은 방법에 의해 피해자 집단의 의지가 사라지면 진실규명 싸움은 멈추게 되지 않나? 피해자가 싸우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해 주지 못한다. 피해자가 싸워야 그 다음으로 정의로운 시민들이 가세할 것이고, 여론이 형성되고 그래서 가해자가 처벌되고. 그렇게 사회정의가 세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해 집단 대부분은 보수정당을 지지해 왔다"
- 법치국가에서는 고문에 의해 얻은 증거는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거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야만적인 고문에 의한 '자백'으로 '빨갱이'로 몰리고 억울하게 생명을 잃거나 몸과 마음이 망가진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해 왜 지금까지도 정부는 이 분들의 명예를 회복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회복시켜 주지 않는 것일까?
"위헌 또는 불법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흔한 논리가 한국사회를 지배한다. 사법부가 말하는 법적 안정성 논리,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그러니 그냥 넘어가자는 공감대가 있다. 게다가 놀라운 건 피해 집단조차 여기에 동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나는 2011년 단심재판에 의한 처벌이 위헌이라는 헌법위원회의 1952년 9월 9일 결정을 헌법재판소 도서관에서 발견한 이래 줄기차게 알려왔다. 내가 보기엔 현재 한국사회 법조계의 인권의식은 사실 1952년 선배들만도 못하다.
그리고 지금은 짐작이 어려우실지 모르겠지만 피해 집단 대부분은 보수정당을 지지해 왔다. 가장 강하게 국가의 무오류성을 받아들여 왔던 분들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랬던 분들이 20년에 걸친 진실규명 활동을 통해 정치 성향을 바꾼 것이다. 어쩌면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한 것이고.
한편, 가해 집단이 자신들의 범죄를 고백하긴 어려울 것이다. 청와대 권력형 비리나 법조 비리, 기업인의 패륜과 부정부패를 보자. 처벌되지 않고 반복된다. 무려 70여 년을 민주화 세력들까지 흡수하거나 무력화 시키면서 변함없이 공고한 성벽을 유지해 왔다.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결국 희생자의 명예회복은 피해 집단 스스로의 단결력에서 나올 수밖에 없어 보인다."
- 이번 저서를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다음 구상하고 있는 집필 분야나 계획을 소개해 줄 수 있는지?
"나한테는 피해자 편향이 있는 것 같다. 진실화해위원회 근무할 때와 달리 지금은 객관성을 유지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 면담의 깊이가 내면으로 더해 갈수록 객관적 태도의 필요성을 잘 알겠더라. 슬픈 이야기인 만큼 나로서도 더 힘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피해 사실에 대한 정리 없이 가해자의 범죄를 논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방식이라고 본다. 축적된 자료를 활용한 인권침해범죄자 열전이나 반민족행위자 사전 같은 것이 꼭 필요하겠지만 피해조사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한다. 위안부 할머님들의 명예를 논하는 거야 지극히 당연하지만 상대적으로 그 사이 일제가 저질렀던 잔혹한 범죄를 규명하는 일도 함께 되었으면 한다.
고양시만 봐도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매년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상여 행렬을 광화문에서 열었지만 정작 일제시기 피해를 조사하거나 항일운동가들을 지원한다든가 하는 데는 소홀히 했다. 할머니들을 이용해 주목받기 위한 정치쇼에 불과해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조금 내성이 생긴 것 같다. 다음은 가혹행위에 대해 정리해 볼까 한다. 서구 심리학자나 언론인들이 이에 대해 실험적 시도를 하던데, 나는 일단 사례부터 모아보려고 한다. '한국전쟁과 인권'이라는 큰 틀 아래에서 정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 신기철은 5.16쿠데타를 피해 무작정 상경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독재는 물론 권위를 매우 싫어했으니 아나키스트라는 별명이 있다. 1985년 이래 기계금속노동자로 인천과 구로, 영등포 등에서 노동운동에 참여했으며, 1997년 이후 고양지역 시민운동에서 금정굴 민간인학살 사건을 만났다. 이를 인연으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했다. 두 조직 활동기간을 합쳐 무려 6년 동안 국가범죄, 전쟁범죄를 다뤘다. 지금은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에서 인권평화연구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새로 나타난 사건은 물론 이미 진실규명된 사례들을 인권의 관점에서 심층 재구성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진실 역시 놓칠 수 없는 관심사이다. 저서로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전쟁범죄>, <멈춘시간195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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