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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타살, 보안사가 답할 '진짜 의혹' 5가지

[장준하 의문사 조사관이 최초 공개하는 '장준하는 누가 살해했나' ②]

등록|2016.08.12 13:45 수정|2016.08.12 13:45
(지난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 새로운 가설, '중정은 장준하를 살해하지 않았다')

2013년 3월 26일, 그날 저는 서울 용산에 위치한 백범 기념관에 있었습니다. 2012년 8월 1일, 묘 이장을 위해 열었던 장준하 선생 관 안에서 직경 6cm로 둥그렇게 뚫린 선생의 두개골이 확인되었고, 이 두개골의 법의학 감정 결과를 발표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상처럼 이날 백범 기념관은 많은 취재진과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발표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고, 참석한 이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안타까운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대 의대 법의학 명예교수인 이정빈 교수가 단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건만 '마치 바늘 하나만 떨어져도 그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해 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이정빈 교수의 법의학 감정 결과 발표. 이정빈 교수 역시 사안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법의학 지식이 부족한 사람 역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장준하 사인은 '타살', 이정빈 교수 법의학 감정 결론

▲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 사진은 지난 2013년 3월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장준하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 주최로 열린 '장준하선생 유해 정밀감식 결과 국민보고대회' 당시 감식결과를 발표하는 모습. ⓒ 유성호


과연 이날 발표된 장준하 선생의 사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랬습니다. 우리 모두가 '의심하고 있었던 사실 그대로' 였습니다. 이정빈 교수는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상흔에 대한 그동안의 감정 과정을 지나칠 만큼 소상하게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은 최종적 결론을 날카롭게 제시했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함몰은 외부 가격에 의한 것이고, 그 가격 물체는 망치가 아니라 둥그런 형태의 물체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부 가격으로 장준하 선생은 즉사했고 이후 추락해 엉덩이 뼈가 손상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예상했지만 이정빈 교수의 충격적인 결과 발표에 장내는 술렁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이어지는 이정빈 교수의 법의학 감정 결과. 이 교수는 보다 더 분명하게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에서 확인된 상흔이 '왜 추락에 의한 상처가 아닌지' 밝혔습니다.

"두개골과 엉덩이뼈가 추락 때문에 손상됐다면 반드시 어깨뼈나 왼쪽 눈 위 안구 주위뼈도 함께 손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장준하 선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추락보다 외부 가격에 의한 머리뼈 손상 가능성이 큰 증거입니다. 특히 사건 당시 검안에 의하면 장 선생의 몸에 출혈이 거의 없었고, 또 긁힌 상처가 많지 않았다는 점 역시 장 선생이 추락사 하지 않은 것임을 보여준다 할 것입니다."

이 교수의 소견을 보다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만약 장준하 선생이 실족 추락사 했다면, 그래서 이 추락으로 인해 둥그렇게 뚫린 두개골 상흔이 생긴 것이 맞다면 '장준하 선생의 어깨뼈 골절'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왜 그런지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추락에 의해 두개골 상흔이 발생했다면 그 두개골보다 더 빨리 지면에 닿는 신체부위는 오른쪽 어깨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깨가 부딪히고 그 다음에 두개골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준하 선생의 어깨나 등 어디에도 추가 골절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충격적인 감정 결과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습니다. 이처럼 분명한 사실이 왜 국가 차원에서의 재조사가 아닌, 민간의 영역에서 발표를 할 수밖에 없는지 분노하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저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새로운 사실이 제 머릿속에 떠오르며 전율했습니다. 백범 기념관 무대 전면에 대형 스크린으로 투영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상흔을 보며 10년 전 그때, 그러니까 2003년 조사 당시 두 사람이 제게 했던 거짓말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그들이 왜 거짓말을 한 것인지 한꺼번에 깨닫는 전율이었습니다.

중정이 아니라면... 장준하 타살 진짜 범인은?

▲ 고 장준하 선생 손자인 장현욱씨가 지난 2013년 3월 30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노제를 지낸 뒤 영정사진을 들고 형무소를 나서고 있는 모습. ⓒ 유성호


2003년 제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담당하는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저는 최종 결론을 '진상규명 불능'으로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건의 실체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내린 '불능'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이 사건을 조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법률적 장치였습니다.

의문사 특별법에 의하면 진상규명이 된 것으로 보는 '인용' 결정은 차후 그 어떤 방식으로도 재조사를 할 수 없습니다. 진상규명이 됐는데 또다시 조사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2003년 당시 일부에서는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을 중정 등 국가권력 기관의 개입에 의한 사건으로 판단하고 진상규명 인용 결정을 내리자"라는 위원들의 의견도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담당 조사관이었던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암살범이 '안두희'로 알려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범 선생의 암살 사건이 해결됐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안두희의 진짜 배후가 누구냐'는 문제는 오늘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중대한 의혹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장준하 선생 의문사 역시 이를 '국가 권력 기관의 개입에 의한 사망'으로 두루뭉술하게 정리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적으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향후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결정적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사건이 정말 해결 불가능한 어려움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조사 시간이 더 필요하고 이를 통해 중정과 보안사 등 당시 권력 기관이 존안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몇 가지 필요 자료만 확보한다면 반드시 이 사건의 완전한 실체를 밝힐 수 있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날, 저는 그동안 막연했던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중정은 장준하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집중했던 중정 관련 의혹이 '사실은 또 다른 연막'이었을지 모른다는 전율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간 무심결에 흘려버린 주요한 두 사람의 거짓말이 그야말로 머리에 번개 맞은 것처럼 되살아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사실을 즉각 세상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지금 공개한다면 이 진실을 은폐하려는 세력에 의해 증거가 폐기되거나 조작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날 확인된 장준하 선생 타살 결론에 따라 국회에서 특별법이 제정되기를 기다리며 지금까지 기다려 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갔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이 민간 차원의 법의학 감정 결과로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이 법안을 반대하는 과반의 새누리당에 의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치며 장준하 선생 사인에 대한 국가 차원의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장준하 선생 사후 40주기를 맞이했던 2015년 마저도 그렇게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맞이하는 장준하 선생의 2016년 8월 17일 41주기 추모 기일. 정치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기대감을 주고 있습니다. 1988년 이후 28년 만에 다시 맞이한 여소야대 국회에서 '야당이 마음만 먹는다면' 장준하 선생을 비롯한 과거 의문사로 목숨을 잃은 분들의 진실을 밝힐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는 호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우리만의 욕심이었나요? 1979년 10.26 사태로 끝났다고 믿은 박정희 권력은 여전히 그의 딸을 통해 오늘까지도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끼는 지금입니다. 그 속에서 장준하 선생의 사인 규명은 여전히 고난의 한 가운데에 방치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타살 증거가 발견됐음에도 "더 이상의 무슨 재조사가 필요하냐"는 뻔뻔한 저항에 특별법 제정은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그동안 밝혀오지 않은 새로운 이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공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론내렸습니다. 특별법 제정후 국가 차원의 재조사가 이뤄진다면 그때 조사관에게 밝히려 했던 사실을 지금 밝혀 '왜 재조사가 필요한지 새로운 논쟁을 시작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서 밝히는 그날의 진실, 우리가 그동안 확신했던 중정이 아니라 이 사건 가해 기관으로 새로운 조사가 필요한 폭압기구, 바로 1975년 당시 국군 보안사령부를 향하는 이 사건 새로운 증거에 대한 주장입니다. 왜 그럴까요. 시간은 다시 2003년 의문사위 조사 그때로 돌아갑니다.

전율 속에 떠오른 두 사람의 거짓말

▲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둘러싼 두 사람의 거짓말. ⓒ 오마이뉴스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조사하면서 저는 두 사람의 거짓말과 마주하게 됩니다. 물론 처음엔 그들이 거짓말하는 줄 몰랐습니다. 가장 먼저 거짓말을 한 사람은 이 사건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해온 김용환씨였습니다. 그는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직후 현장에서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사라진 그가 다시 사건현장으로 돌아온 시각은 당일 밤 12시를 전후한 시각. 사라지고 약 8시간 후였습니다.

하지만 김용환씨는 자신이 사라지고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돌아온 사실을 부인합니다. 자신은 어디로 사라진 적도 없으며 따라서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돌아온 사실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장 선생이 사망한 후 파출소로 내려가 있으라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이동 지서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내내 있다가 이후 포천 경찰서로 이동한 후 다음날 아침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에게 조사 받은 후 무혐의로 귀가한 게 이후 자신의 모든 행적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주장에는 결정적인 허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주장과 달리 그는 분명 사건 당일 밤 12시경 사건 현장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 장소 그 시각에 그를 본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재론 여지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먼저 그가 사건 현장에 있었다고 확인해 준 사람은 이 사건을 담당했던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였습니다.

그는 위원회 출석 요구를 받은 후 왜 자기를 부르나 의아했다고 합니다. 장준하 선생이 실족 추락사했다는 사실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며 이를 목격한 사람도 자신이 조사했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당시 김용환씨를 처음 만난 곳은 어디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서돈양 검사는 분명하게 기억한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8월 17일에서 18일로 넘어가는 밤 12시경 현장에 도착한 후 사체를 검안했습니다. 이후 추락했다는 사고 계곡을 둘러보고자 산을 올라가는데 어느 경찰이 목격자라며 한 남자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건 경위를 좀 묻다가 그곳에서 계속 묻기도 뭐해서 경찰에게 내일 아침 의정부지청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한 사실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서 검사의 진술 그리고 이러한 검사의 지시에 따라 사건 현장에서 김용환씨를 경찰서로 데려간 사실이 있다는 당시 포천경찰서 경찰 김삼용의 진술까지 우리는 사건 당일 어디론가 사라진 김용환씨가 다시 그날 밤 12시경 사건 현장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의문은 따로 있었습니다. 왜 김용환씨는 이처럼 단순한 사실에 대해서도 끝까지 부인하는 것일까. 자신이 그 시각에 사건 현장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왜 이처럼 절박하게 부인하는 것인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착각하는 것 아닐까 싶었는데 그 역시도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그가 이 사실을 부인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인정할 경우, 이 사라진 시간동안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사라진 김용환씨가 그 시간동안 무엇을 했는지 알려주는 중정의  '중요 상황보고' 문서 한 장. 그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유족에게 사고 알린 괴전화의 주인공, 그는 바로...

장준하 선생의 유족이 처음 남편과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사건 당일 낮 3시경 집으로 걸려온 한 통의 괴전화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한 중년의 남자가 전화를 걸어와 "지금 장 선생이 산에서 크게 다쳤으니 많은 사람들이 포천 약사봉으로 와야 한다"라는 말을 전한 후 급박하게 전화를 끊은 일이었습니다.

이후 장 선생의 유족들은 이 전화를 걸어온 '괴 남자'가 이 사건의 중대한 비밀을 풀 열쇠를 가졌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남자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993년 3월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이 남자를 추적했으나 끝내 실패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괴 전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게된 것은 2기 의문사위 조사가 막바지에 이르던 2004년 초였습니다. 국정원으로부터 입수한 중정의 '중요상황 보고' 문서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피던 중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문서 한 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로 그 남자의 실체, '목격자' 김용환씨였습니다.

'장준하는 8. 17 08:30 호림산악회(서울운동장 앞 소재) 회원 일행 41명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소재 운악산으로 출발 등반 도중, 동일 14:40분경 동 운악산 약사봉 계곡에서 실족으로 추락, 뇌진탕으로 사망하였음. 시체는 검사 지휘를 받기 위해 사고 현장에 보존중이며 현지 경찰 3명이 현장을 경비 중에 있는데, 동 일행인 김용환(동대문구 이문동 거주)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장준하 부인 및 가족 등이 20:30경 현장에 도착하였음.'

사고가 발생한 당일 밤 9시, '중요 상황 보고' 문서를 통해 중정부장에게 보고된 이 문서에서 적시한 것처럼 유족에게 연락을 취한 사람, 바로 김용환씨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우리는 또 한 명의 새로운 거짓말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사건 현장에 인접한 보안부대의 부대장이었습니다. 한편 우리가 그를 주목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건 당일 밤 12시경, 군복을 입은 상당한 직급의 군인도 그 현장에 있었다는 관계자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건 현장 인근에 부대를 찾아보니 보안부대가 있어 조사팀은 1975년 당시 이 부대에서 근무했던 부대장을 찾아 출석을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출석한 사람이 이 부대 한아무개 부대장. 우리는 그에게 '사건 당일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현장을 방문한 사실이 있는지'를 추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대 현장을 간 사실이 없다고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민간인이 사망한 일에 왜 군인이 가겠냐"면서 딱 잡아뗐습니다. 1기에 이어 2기 위원회에서 각각 한 번씩 출석했지만 그는 늘 이렇게 부인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사건 현장에 갔습니다. 강력하게 부인하는 그의 눈을 보며 오히려 저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찾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건 당시 이 사람의 운전병으로 복무하던 현역 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확인한 결과, 우리가 의심한 그것은 모두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운전병은 "사건 당일 부대장을 모시고 사고 현장을 간 사실이 있다"라고 털어 놨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상세한 진술. 저는 곧바로 문제의 보안부대장에게 다시 출석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 번째 위원회에 출석한 보안부대장, 태도는 이전과 많이 달랐습니다. 당당하게 부인하던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던진 한마디에 그는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사실은 사건 당일 현장을 방문했다"라면서 그간 해온 거짓을 실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왜 거짓말 했냐"며 다시 다그치자 그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편할 것 같아 그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알았어야 했습니다. 사실은 바로 이 거짓말은, 사실 하나의 연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말입니다. 즉, 목격자를 자처하던 김용환씨와 문제의 보안 부대장 거짓말은 각각 독립돼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연결된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저는 당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요.

사라진 목격자가 간 곳은 보안부대?

현장에서 갑자기 사라진 김용환씨는 거듭 파출소에 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분명 파출소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확인한 것처럼 사라진 김용환씨는 이후 어디에선가 전화를 이용해 장준하 선생의 집으로 사고 사실을 알렸습니다. 중정의 존안 문서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괴전화를 건 것은 분명 김용환씨가 맞는데 도대체 그는 어디에서 이 전화를 한 것일까? 1975년 당시 사건이 발생한 약사봉 인근 지역은 매우 가난한 마을 중 한 곳이었습니다. 전화 보급률이 좋지 않았던 당시 마을에 전화가 있던 곳은 확인 결과, 단 한 집에 불과했습니다. 바로 마을 이장 집에 설치된 행정 전화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마을 이장에게 확인해 보니 그는 사건이 발생한 당일 누구에게도 전화를 빌려준 적이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에게도 전화를 빌려준 적이 없기 때문에 틀림없는 사실"이라며 이장은 못을 박듯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의문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도대체 김용환씨는 어디에서 이 전화를 했다는 것인가? 괴전화의 주인공은 분명 김용환씨가 맞는데, 사건 현장 주변 어디에도 없는 전화를 이용할 수 있었던 곳은 어디냐는 강력한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지 못한 전화가 사실은 현장 주변에 한 곳 더 있었습니다. 사건 당일 밤, 사고 현장을 방문하고도 "그런 사실이 없다"며 두 번이나 거짓말했던 보안부대가 바로 그곳입니다. 그렇게 판단하자 자연스럽게 풀린 의문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디론가 사라졌던 김용환씨가 '어떻게 밤 12시에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나'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 12시, 사라졌던 김용환씨가 사건 현장에 돌아온 것은 분명한데 그는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다시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가 사체 검안을 위해 도착한 시각에 정확히 맞추고 나타나 검사를 만났다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각, 차량을 이용해 사건 현장을 방문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문제의 보안부대장'이었던 것입니다.

즉,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후 유일한 사고 목격자인 김용환씨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라진 김용환씨는 이후 유족에게 전화해 장준하 선생의 사고 소식을 알립니다. 조속한 사건 처리를 위해서는 유족이 현장에 와야 하고, 그렇게 해야 사체 인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전화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바로 그 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곳, 바로 사건 현장 근처 국군 보안사령부 소속의 보안부대. 그러나 보안부대는 우연히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 모든 일은 미리 계획된 것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장준하 선생을 시해한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랬습니다. 이 사건 전반부에는 사실 '의문의 엑스트라'가 두 명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명의 엑스트라는 이 사건 초반에 뜬금없이 나타나 여러 의혹과 의문을 줬습니다. 하지만 중정을 의심하는데 집중해있던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이들의 역할을 애써 무시하는 경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의문사위 조사 당시 조사팀은 이 두 명의 엑스트라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알았습니다. 그들은 엑스트라가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엑스트라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이 사건에 있어 숨겨진 주연이었다는 사실, 그들이 바로 '이 사건의 비밀을 푸는 열쇠'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간과한 '군인 두 명', 그들은 엑스트라가 아니었다?

▲ 지난 2015년 8월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 장준하공원에서 열린 고 장준한 선생 40주기 추모식에서 차남 호성씨(왼쪽)와 손자 현욱씨가 묘를 찾아 묵념을 하고 있다. ⓒ 이희훈


김용환씨는 사건 당일 장준하 선생의 산행 사실을 알고 뒤늦게 쫒아 올라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다가 장준하 선생을 만난 곳을 설명하면서 비로소 두 명의 군인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1975년 8월 20일 장준하 선생의 빈소에서 경위를 묻는 문익환 목사 등에게 그는 "이등병 계급장을 단 시골 출신의 군인 두 명과 같이 있던 장준하 선생을 만나게 됐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것이 알고 싶다> 방영 후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자체적으로 행한 장준하 선생 의문사 조사 때에도 "장준하 선생을 찾기 위해 올라가던 중 산 입구에서 조금 더 산으로 들어간 그곳에서 군인 두 사람과 함께 있던 선생님을 만났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사고 당일 군인 두 명과 함께 있었던 장준하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낯선 두 명의 군인에 대해 김용환씨가 처음 만났다는 경위와 장소가 계속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어떨 때는 약사봉 계곡 중턱의 어느 숲속이라고 하고, 또 어느 때는 물이 흐르는 개울가 어디쯤이라며 말을 바꿨습니다.

또 어느 때는 물가에 서서 군인들과 커피를 마시는 장준하 선생을 만났다고 하고, 또 어느 때는 군인이 처 놓은 텐트 안에서 나오는 장 선생을 만났다고도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하나의 사실을 두고 앞뒤가 극단적으로 다른 여러 목격 진술을 하는지 저는 답답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명치 않은 김용환씨의 진술을 두고 아까운 조사 시간을 너무도 많이 허비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그 군인을 만난 곳이 산인지 개울인지, 또 만났다는 군인이 이등병 계급장을 단 두 명의 시골 출신 군인이라는 주장에 대해 구체적 사실을 확인하려 했지만 불분명한 그의 주장에 결국 조사를 마무리하게 된 것입니다. 중정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쏠리는 상황에서 의미없는 군인 이야기를 확인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면서 간과해 버린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군인 두 명이 어쩌면 '이 사건의 시작이며 결말이었을지 모른다는' 깨달음이 충격처럼 다가온 것은 바로 백범 기념관에서 개최된 '법의학 감정 발표'를 지켜보면서였습니다. 우리가 무시한 바로 그 두 명의 엑스트라가 '사실은' 이 사건의 열쇠라는 강력한 의혹입니다.

그래서 다시 복기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확신했던 중정의 의혹보다 더 크고 분명한 새로운 의혹은 이제 '보안사'가 답해야 할 일입니다. 이 사건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한 군인들의 그림자, 처음과 끝에서 등장하는 이들도 군인이었고 그들이 결정적인 순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우리는 물어봐야 할 것이 많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보안사가 답해야 할 분명한 의혹'에 대해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 보겠습니다.

사건 시작부터 끝까지 '보안사의 짙은 의혹'

밝힌 것처럼 시작은 김용환씨가 만났다는 장준하 선생과 함께 있었던 두 명의 군인입니다. 사건 당일 현장에 있었다는 이등병 계급의 군인 두 명과 장준하 선생이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는 김용환씨의 처음 주장. 하지만 일요일 대낮에 이등병 두 명이, 더구나 이들이 그 당시 귀한 텐트를 가지고 계곡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느냐는 의문도 강하게 제기됩니다.

여하간 이렇게 군인 두 명과 함께 있었던 장준하 선생은 얼마 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그리고 사라진 목격자 김용환씨는 이후 장준하 선생의 집으로 전화해 이 사실을 알린 것으로 중정 기록에 의해 확인됩니다. 그리고 이 전화를 한 곳은 이장 집을 제외하고 단 한군데, 바로 인근 보안부대밖에 없습니다.

한편 사라졌던 김용환씨가 밤 12시경 사건 현장으로 복귀하여 사건 수습 중인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를 만납니다. 그리고 김용환씨는 서 검사에게 자신의 실족 목격을 증언했고 같은 시각, 보안부대장 역시 사건 현장에 밤 12시경 도착한 사실이 운전병에 의해 새롭게 확인됩니다.

이처럼 사라졌던 김용환씨와 보안부대장이 같은 시각인 밤 12시에 사고 현장에 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전화 사용 등을 위해 보안부대에 있던 김용환씨가 사건 수습을 위해 서돈양 검사가 현장 방문을 한다는 정보를 듣고 보안부대장과 같이 현장으로 돌아왔다는 의심, 저는 이 부분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일이 더 있습니다. 사건 당일 현장에 와 놓고도 두 번이나 이 사실을 숨겼던 보안부대장에게 "그렇다면 당시 이 사고 현장에서 한 일은 뭐냐"고 묻자 여기에 대해 그가 또 되풀이한 거짓말입니다. 그는 처음에 "숨진 장준하씨를 본 후 그냥 부대로 복귀한 것이 전부"라고 답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그게 말이 되냐"며 저는 집요하게 파고 들었습니다. "보안부대장이 사건 현장을 방문한 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것 같냐"라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오래 버티다가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사실은 자기가 한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털어놓은 그날 밤의 진실, 보안부대장은 현장을 다녀온 후 자신이 보고 확인한 사실에 대해 직접 문서를 작성한 후 이를 보안부대 통신병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통신병이 이 문서를 영문 텔레타이프로 작성, 이후 보안사령부와 직통으로 연결된 모종의 보안부대 시스템을 통해 당시 보안사령관 진종채에게 직보했다는 실토였습니다.

문서 분량은 'A4 반 장 분량의 영문 텔레타이프'. 과연 이 말은 또 어디까지 사실일까요?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이 문서를 입수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보안사령부의 후신인 오늘날의 기무사령부에 즉각 공문을 발송하게 됩니다. 1975년 8월 18일 새벽 2시에서 4시경 OOO부대 보안부대장이 진종채 보안사령관에게 직보한 텔레타이프 문서를 제출해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우리는 기대가 컸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실 의문사위는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조사하면서 기간동안 단 한 장의 문서도 기무사령부로부터 제출받지 못했습니다. 국정원은 그래도 중정 존안 문서를 상당 부분 협조해 줬습니다. 다만 우리가 필요한 문서에 대해 끝내 '모르쇠'해 논란이 됐지만, 기무사의 경우는 완전 달랐습니다.

기무사는 그야말로 '단 한 장의 문서'도 의문사위에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문사위 조사가 끝난 후 국정원 직원은 개인적으로 섭섭하다는 말을 우리에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의문사위에 자료 제출을 했는데 국정원과 기무사를 똑같은 수준으로 비판하는 것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푸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기무사 직원이 국정원 직원에게 했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습니다. 기무사 직원이 국정원 직원에게 "의문사위가 달란다고 정보기관이 존안 자료를 내주는 게 무슨 정보 기관이냐? 우리는 단 한 장의 문서도 주지 않고 버텼다"라며 조롱했다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기무사는 장준하 선생 의문사와 관련해 요청한 문서에 대해 단 한 장도 주지 않고 버틴 것이 사실입니다. 왜 없느냐고 하니 '없으니 없다'는 식의 막무가내 답변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사를 통해 확인한 이 보안부대장의 영문 텔레타이프 한 장에 대해서는 확신했습니다. 적어도 이 문서에 대해서는 절대 피해갈 수 없는 확실한 증거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역시나 였습니다. '존안 자료 없음' 그 여섯 글자가 전부였습니다. 과연 그 자료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요? 처음엔 "민간인 사망 사고에 왜 군인이 가냐?"며 사건 개입을 부인하던 그가 마침내 진실을 토로하며 밝힌 진종채 보안사령관에게 전달한 이 문서. 저는 이 문서가 지금도 분명 '기무사령부 문서고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대통령과 보안사령관, 47분간 독대 밀담 밝혀져야

▲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부전선의 한 포병부대 및 최전방 초소를 시찰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그런데 이처럼 장준하 선생 의문사 과정에서 확인되는 '보안사 개입 의혹'의 화룡정점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1975년 8월 18일, 그러니까 보안부대장이 진종채 보안사령관에게 직통으로 영문 텔레타이프 문서를 보낸 바로 그날 오후의 일입니다.

한 명의 남자가 조용히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갑니다. 그는 박정희 유신 독재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권력 기관의 수장이었습니다. 시간은 8월 18일 오후 4시 35분경. 1975년 '청와대 의전일지'에 기록된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간 장소가 매우 특이했습니다. 정상적인 업무였다면 이해할 수 없는 청와대 서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마주한 그 사람, 바로 진종채 보안사령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약 47분간의 독대. 과연 이 시간동안 진종채 보안사령관은 대통령 박정희에게 무엇을 보고했을까요? 분명하게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바로 다음날, 관련 부대장으로부터 새벽녘 영문 텔레타이프로 보고를 받은 진종채 보안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과 만나 이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과연 이 말을 믿을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더 특이한 점은 보안사령관이 대통령과 단독 면담한 일은 1975년 들어 이 날이 처음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날, 이처럼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제 글을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국가 차원에서 재조사해야 한다"는 주장과 "이미 충분히 조사했고, 그래서 더 해봐야 소용없다"는 주장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들어야 할 말이 더 있고, 보안사에게 묻고 싶은 의혹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두 명의 군인은 누구인지,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가 유족에게 전화를 건 장소는 어디인지, 또 밤 12시에 사건 현장에 복귀한 목격자 김용환과 같은 시각 현장에 나타난 보안부대장의 동행 의혹 및 이후 보안사령관에게 부대장이 보냈다는 직보 텔레타이프 행방과 그 내용은 무엇인지 우리는 보안사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청와대 서재에서 있었던 '그날의 밀담'입니다. 장준하 선생 사망 다음날, 보안사령관 진종채와 박정희 대통령 사이에서 있었던 그 특별한 독대 밀담은 '반드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의혹'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41년 전 그날, 장준하 선생이 변사체로 발견된 의문을 풀 수 있는 또 하나의 열쇠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동안 묻힌 국가 차원의 재조사 노력과 앞으로 이어가야할 일들은 무엇인지, 그 해답은 3편에서 밝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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