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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회] 이 검법을 '태을삼식'이라고 한다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86회]

등록|2016.08.12 15:28 수정|2016.08.12 15:33

관조운은 잠시 방에 누웠다가 일어나 나갔다. 마당을 어슬렁거리는데 요사채에 딸린 부엌에서 기사숙이 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썰고 있는 게 보였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누런 호박이었다. 호박은 어른 한 품은 넉넉히 될 정도의 크기였는데 반은 채로 썰어져 있고, 나머지 반은 반구(半球)의 형태로 기사숙의 무릎 앞에 놓여 있다.

특이한 것은 사숙의 손에 쥔 것이 칼이 아니라 젓가락보다도 가는 대나무발 한 가닥이었다. 가는 발로 호박의 면을 잘라내는데 마치 잘 벼린 칼로 써는 것 같았다. 관조운이 신기해 바라보자 사숙이 쳐다보더니 씨익 웃는다. 그리고는 발을 관조운에게 건넸다. 발을 손에 쥐자 버드나무가지처럼 낭창낭창 휘어졌다. 관조운은 발을 쥐고 각을 뜨듯 조심스레 호박에 갖다 댔지만 표면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번에는 빠르고 세차게 내려쳤지만 표면에 착 감기는 소리만 낫지 흠집도 나지 않았다.

사숙이 발을 다시 건네받고는 호박을 살짝살짝 두드렸다. 마치 고수(鼓手)가 장고 치듯, 색주가 작부 장단 맞추듯, 부엌데기 도마질하듯 두드리는데 수십 년 동안 주방에서 일한 숙수(熟手)의 칼질보다 더 빠르게 호박이 썰려나갔다. 채의 간격 또한 자로 잰 듯 일정했다. 나머지 반도 크기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마치 미리 잘라서 세워놓았다가 순서대로 허물어뜨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커다란 호박 하나가 면발처럼 쌓이자, 사숙은 한 팔 거리에 떨어져 있는 호박에 발을 꽂았다. 발이 세 치 깊이로 호박에 박혔다. 그가 끝단을 쥐고 들어올리자 발의 몸통이 한번 휘청하더니 호박을 들어올렸다. 신기하게도 발은 쇠꼬챙이처럼 단단하게 뻗어있다. 무릎 앞에 호박이 놓이자 사숙은 다시 채를 썰기 시작했다. 큰 호박이 순식간에 한 무더기의 채로 변했다. 이윽고 채를 다 썬 사숙이 일어서서 관조운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들은 사숙의 방으로 들어갔다.

사숙은 종이를 펼치고 글을 썼다.

'너의 무공은 혁련 사질보다 못한 것 같구나.'
'그렇습니다. 저는 사부님과 무보다 문으로 맺은 인연이 더 깊습니다.'

조운이 다른 붓으로 답했다.

'내 너에게 벽(劈)과 서(書), 두 수법을 전하마. 삼일 배워 삼년 동안 익히는(學會三天 練好三年) 것이 무도(武道)의 길인즉 명심하여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해라.'

관조운은 사숙에게 큰 절을 올리며 배움의 예를 갖추었다.

'내 일찍이 젊어서 무술을 익힐 적엔 오로지 기(氣)가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예(藝)는 그것을 장식하는 말에 불과하고, 도(道)는 지나온 자취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마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기(氣)로써 기(技)와 술(術)을 부지런히 연마하면 나머지는 따라 온다고 여겼다. 나의 무(武)는 형식과 기교에 치우쳤고 굳세고 화려함을 추구했다. 하늘을 날며 땅을 박차고 물을 치솟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무술의 완성이고, 가공할 위력으로 상대를 압도하고 만인의 추앙을 받는 것이 무도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무는 현란하되 진실 되지 못했고, 호방하되 알차지 못했으며, 찬사를 받되 공허했다. 실전에선 상대를 기예로 압도했으나 마음으로 제압하지 못했으며, 힘으로 밀어붙이되 마음으로 복종 받지 못했다.

이는 근본을 깨우치지 못한 탓이다. 무(武)란 기(器)와 힘(力)으로 드러나는 바 이를 작용하게 하는 것은 기(氣)이다. 그러나 기(氣)는 신(神)으로부터 나온다. 기(氣)의 생성과 운용이 모두 신(神)의 작용이 아니던가. 따라서 기(氣)의 근본은 신(神)이고, 이 신(神)을 다스리는 것이 예(藝)와 도(道)인 것이다. 즉 예와 도는 (정)신을 이끌고, (정)신은 기의 발현을 이끄는 것인데 나는 이를 거꾸로 받아들인 것이다.

스승 태허진인은 나의 이런 기질을 염려하여 끝내 진경의 진수를 내게 전하지 않았다. 나는 서운한 맘을 품고 내단(內丹)을 연마하였으나 스스로 마경(魔境)에 빠져 딴 세상을 헤매었다는 건 일전에 설한 바다. 마경 속에서 내가 성취한 모든 게 타버렸지만 그 가운데 남은 게 있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이는 바로 벽공(碧功)이다.

나는 환상에 갇혔다. 나의 머릿속에선 온갖 형상과 소리와 냄새와 감촉이 생겨나고 소멸했다. 나는 바깥세계를 볼 겨를이 없었고 내안의 나와 싸우기 바빴다.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십 년이 하루 같았고, 하루가 십년 같은 세월이었다. 그러다가 허산을 만났다. 스님은 내게 상과 형을 취하여 그 뜻을 품고 일념으로 정진하라 하셨다. 이름하여 상형취의(象形取義)라.

스님께서 이르기를 내 안에 진흙으로 빚은 뱀을 형상하라 그랬다. 이 뱀은 공중에 떠 있어 항상 나와 마주한다. 가거나 멈추거나 안거나 눕거나 항상 따라 다니며,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머무를 때도 항상 거기에 있다(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 불가의 참선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 방법). 손에 검이 쥐어져 있고, 그 검으로 뱀을 벤다. 뱀은 검을 따라 춤추며 검을 타고 내린다.

검첨(劍尖: 칼끝)에 달라붙어 혀로 핥기도 하고, 검척(劍脊:검신의 가운데 조금 볼록한 부분)을 둥글게 말기도 한다. 어느덧 뱀은 검과 한 몸이 되고, 검 또한 나와 한 몸이 되어 뒹군다. 뱀은 나의 입으로 들어왔다가 항문으로 빠져나가기도 하고 내 머릿속에서 또아리 틀기도 한다. 때로는 내가 뱀이 되어 내 몸을 벗어났다가 내 몸에 들어가기도 한다. 이럴 때 내 몸은 그저 살과 뼈로 이루어진 형상에 불과하다.

이 단계를 지나면 뱀과 나는 엉키지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어느 날 뱀이 비취옥으로 변했다가, 화염으로 화하기도 한다. 놀라지 말고 베어라. 뱀을 베다보면, 검이 뱀이 되고 뱀이 검이 될 때가 온다. 이날에 이르면 뱀의 몸통은 철장(鐵杖)처럼 단단해지고, 검신(檢身)은 또 뱀처럼 휘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대나무발로 호박을 썰거나 들어올리는 건 바로 이런 이치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마음 속에 념(念)을 일관되게 하는 걸 불교에서 화두라 하고, 나는 이를 벽(碧)이라 일컫는다.

안으로 벽을 따르면 밖으론 서(書)를 취한다. 너는 서생이니 서법을 알 것이다. 무릇 검은 붓과 통하니, 붓을 잡듯 검을 잡으면 그 이치를 깨달을 것이다. 붓(筆)의 놀림은 점(點)과 획(劃) 두 가지로 나타나는 바, 점은 검에서의 찌르기이고 획은 검에서의 베기이다. 점은 허(虛)·직(直)·긴(緊)(허(虛): 비움, 직(直): 똑바름, 긴(緊): 꽉 낌)의 네 가지 운용이 있듯 검에서도 마찬가지다. 네가 비영문에서 검을 익혔으므로 그 풀이는 생략하마. 획은 돈(頓)·제(提)·날(捺)(돈(頓): 머무름, 제(提): 끔, 날(捺): 아래로 힘껏 누름) 의 세 가지 운필이 있는 것 또한 네가 잘 알 것이다.

검에 있어서 획은 점보다 운용이 어렵다. 획을 그을 때는 돈이 이분(二分), 제는 오분(五分), 날은 구분(九分)의 힘으로 검날을 조절해야 한다. 획 역시 늑(勒)·날(捺)·별(撇)·노(努)(늑(勒): 왼쪽에서 오른쪽의 가로획, 날(捺):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의 사선, 별(撇):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의 사선, 노(努): 위에서 아래로의 세로획)로 구분되는 바 하나하나의 동작이 붓의 움직임과 다를 바 없다.

마음 심(心)자를 써라. 심 자는 세 개의 점과 한 번의 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 번의 점을 허, 직, 긴으로 써라. 한 번의 획에 돈, 제, 날이 담기도록 하라. 심 자가 깊이 새겨지면 질수록 네가 휘두르는 검신에서 뱀이 춤출 것이다. 개의치 말고 써나가라. 점(點)에 뱀이 또아리 틀고, 획(劃)에 뱀이 꿈틀댈 때까지. 그러다가 비취색 뱀이 나타나고 또 그 뱀이 불로 화할 때까지 써라. 칼날 위의 뱀이 순해져 몸통을 싸고돌다 마침내 뱀이 칼이 될 때 너는 허공이 아닌 사물에 심 자를 새길 수 있다.

나무에 쓸 수도 있고 좁쌀에 쓸 수도 있고, 바위에 쓸 수도 있다. 크기, 재질, 경도에 관계없이 글자를 새겨 넣을 수 있다. 심지어 흐르는 물에도 새길 수 있다. 이런 경지를 서도(書道)에서는 삼분의 힘으로 (종이를 뚫고) 나무에 닿는다(入木三分)고 하였다.'

'오로지 마음 심 자만 새기면 서를 완성하는 것이옵니까.'

'아니다. 심 자 다음에는 태(太) 자가 있고, 태 자 다음에는 을(乙) 자가 있다. 이를 태을삼식(太乙三式)이라 한다. 각각의 묘리(妙理)가 다르므로 네가 차근차근 다시 설파(說破)하마. 항상 태을을 마음에 새기고 있거라(心太乙). 그 어떤 물성(物性)에도 너의 심성(心性)을 새길 수 있다면 너는 다른 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너와 마주하는 검은 좁쌀이거나 바위에 불과하게 된다. 아주 작거나 움직이지 못하거나.'

사숙은 벽장에서 길죽한 물건을 꺼냈다. 겹겹이 싸인 천을 풀어헤치자 길이가 두 자 정도 되는 검이 나타났다. 단검이라기엔 길고 장검이라기엔 짧았다.

'검배에 요운검(耀雲劍)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검을 뽑자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시르릉하는 소리를 내며 검날이 햇살에 기지개를 켠다. 새하얀 빛이 반짝 스치더니 푸르스름한 여운이 퍼져왔다. 내가 강호에 이름 석자를 들이밀 때 지녔던 검이다. 다행히 사형께서 잘 챙겨주셔서 아직 건재하다. 이제 너에게 이 검을 내린다. 부디 의로운 일에 뽑기 바란다.'

조운이 한 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춰 검을 받았다.

관조운은 수행승처럼 좌정하고는 깊은 호흡과 함께 마음 속에 뱀의 형상을 만들고 허공에 마음 심자를 그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조운이 방문을 여니 마당엔 달빛이 가득 고여 있다. 조운은 요운검을 들고 마당으로 갔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 마음 심(心) 자를 그렸다. 한 점에 온 마음을 담고 한 획에 온 몸을 던졌다. 쉬익 쉭, 마음의 소리가 허공에 퍼져나갔다. 이때 조운이 허공에 그리는 마음을 바라보는 두 개의 눈이 있었으니, 요사채 들창에 팔을 괸 낭자와 나한전 기둥에 몸을 숨긴 노인이었다.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동시에 흘렀다.
덧붙이는 글 월, 수, 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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