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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이 돌아가셨습니다"... 남편 보고픈 아내의 꾀

[어느 해방둥이 기자의 삶과 꿈] 제Ⅰ부 초록색 견장 (7)

등록|2016.09.08 14:50 수정|2016.09.09 15:13
제1화

장인 부고장

추석을 일주일쯤 앞둔 어느 가을날이었다. 나는 잠복초소 보수작업 감독을 하다가 소대원들을 10분간 휴식케 한 다음 그늘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경북 안동군 와룡면 출신의 임 상병이 내 곁에 다가와 편지를 불쑥 내밀었다. 그는 고향 와룡마을에서 이발소를 하다가 뒤늦게 입대한 소대원으로 서른이 넘었고, 자녀를 둘이나 두고 있었다.

그는 소대 내 최고령자로 소대원들은 그를 임 상병 대신에 '임 영감'으로 불렀다. 그는 입대 전 주특기를 살려 소대원의 이발을 도맡았다. 대부분 이발사가 그러하듯 그도 걸쭉한 입심, 특히 음담패설을 무척 잘해서 삭막한 내무반에 이따금 웃음꽃을 선사했다.

"웬 편지야?"
"꺼내 보이소."

편지봉투 안에는 인쇄물이 들어 있었다. 펼쳐보니 뜻밖에도 부고장이었다. 돌아가신 이가 임씨가 아니었다.

"돌아가신 분이 누군가?"
"장인어른입니더."
"그래?"

"이런 경우 중대장님에게 상신하면 곧 바로 청원휴가가 될 깁니더."
"나도 그건 알고 있어."

나는 중대 행정반으로 가기 전에 그 부고를 다시 펴봤다. 우선 장인 부고를 관보가 아닌 부고장으로 인쇄된 게 의심쩍었다. 그 무렵 시골에서는 대체로 한지에 붓으로 부고장을 썼다. 또한 추석을 일주일 정도 앞둔 것도 뭔가 꺼림칙했다. 하지만 부고 문안은 흠이 없었다. 나는 다시 봉투를 유심히 살폈다.

▲ 1970년 겨울 심학산 아래 부대에서 근무할 때 소대원들과 함께 (앞열 왼쪽서 두번째 기자, 세째열 왼쪽 첫번째 임영규 상병) ⓒ 박도


양반의 고장

편지봉투에는 '1969. 9. 18. 안동 와룡' 우체국 소인도 뚜렷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 부고장이 가짜라는 결정적인 단서를 잡았다. 곧장 작업 중인 임 상병을 부르려다가 참았다. 그날 오후 일과를 모두 다 끝내고 내무반으로 돌아온 임 상병을 내 방으로 조용히 불렀다.

"임 상병, 정말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나?"
"그런가 봅니더. 그 함자가 정말 제 장인어른 맞습니더."

"그럼 좋다. 근데 안동은 양반 고장이지?"
"그라믄요. 양반 고장 하믄 조선 팔도에서 우리 안동만한 곳은 없을 깁니더."

"그런데 그런 양반 고장에서는 사람이 죽기도 전에도 부고장을 보내나?"
"어데요. 그런 법은 없지요."

"그런데, 임 상병 처갓집이 그랬는데."
"네에!? 그럴 리가!"

"자, 여기를 보라고. 이 부고장에 장인 돌아가신 날은 9월 20일이요, 발인 날은 9월 22일로 돼 있지."
"맞네요."

"그런데, 이 봉투 우표 위에 안동 와룡우체국 소인 날짜는 9월 18일이잖아.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이 부고장을 우체국에서 부친 게 아냐?"
"네에!?"

"군대에 오면 '마누라 빼놓고는 다 죽인다'고 하더니…."
"…."

임 상병은 그제야 고개를 팍 숙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더라

"아이가 몇 살인가?"
"큰놈은 아들인데 세 살이고, 첫 휴가 가서 만든 둘째는 가시난데 아직 얼굴도 못 봤십니더. 마누라 편지에 이제 막 기어 다닌다고 합디더. 아마 마누라가 추석을 앞두고 그랬나 봅니더."

"그렇게 남편이 보고 싶으면 여기로 면회 오라고 하지 그랬어. 여기로 온다면 내 이틀 정도는 특박을 시켜 줄 테다."
"우리 안동군 와룡면은 반촌이라서 여자들이 남편 군부대로 면회 가는 일은 없습니더. 그라고 마누라가 암만 오고 잡아도 시부모에 시할매까지 있는데, 우째 신랑 면회 간다고 남사스럽게 나설 겁니껴?"

나는 그 자리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 편지 봉투와 부고장에 불을 붙였다.

"임 상병, 이 부고장 일은 없었던 일로 하겠다. 앞으로 소대원들의 머리 부지런히 깎아주고 성실히 근무하면 내 포상 휴가 상신이 내려올 때 임 상병을 선착으로 보내주겠다."
"소대장님! 정말 잘못 했습니더. 용서해 주이소."

"걱정 말어. 이미 부고장 태워버렸잖아."
"고맙습니다. 소대장님, 나중에 제대한 후 지 고향으로 꼭 한번 놀러 오이소. 안동군 와룡면사무소 앞에 와서 이발하는 임영규라 카면 다 알 거라얘." 

"알았다. 그만 가 봐."
"공격! 돌아가겠습니더."

그날 밤, 내무반에서 킬킬거리는 소리가 내 방까지 들렸다.

"임 영감님, 좋다가 말았습니다. 근데 어째 군대는 그렇게 늦게 왔습니까?"
"호적도 고쳐 보고, 이리저리 피해도 안 되니까 가로 늦게 안 왔나."

"쇼를 하려면 좀 잘하지 그랬습니까?"
"마누라도 우표 위에 찍힌 날짜까지는 생각 못했을 기라. 나도 그게 탈 날 줄은 몰랐는데…."

"근데 소대장님은 어째 알았을까요?"
"귀신 곡할 노릇이다. 야, 소대장이 말이야 '안동 양반 동네는 초상도 안 났는데도 부고장 보내느냐'는 그 말에는 가시개질(가위질, 곧 이발사)하는 사람 치고 말 못하는 사람 없다카지마는 마, 내 더 이상 할 말이 없더라."

임 상병의 그 말에 내무반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제2화

부인의 면회

석식 후 중대 연병장에서 야간 근무자 군장검사를 하려고 집합을 시키고 있는데 위병소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 소대 조 이병 부인이 생후 6개월이 된 아들을 업고 면회를 왔다고 했다. 조 이병은 첫 아들을 낳은 지 한 달 만에 입영통지서를 받고 입대했다는 말을 들은 바 있었다. 

나는 조 이병을 그날 야간근무자 명단에서 빼고 대신 잔류병에서 그 자리를 보충한 후 그들 부부를 소대 전용 면회장으로 쓰고 있는 이장 댁으로 보냈다. 그는 부인의 면회 덕분에 하룻밤 특박(특별외박)이었다.

전방 말단 소총소대의 병사들에겐 외출 외박이 거의 없었다. 같은 의무복무지만 전후방의 근무 여건은 천양지차였다. 전방 말단소총소대 병사들에게는 오직 일 년에 한 차례 있는 정기휴가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한창 성욕이 왕성한 젊은 나이에 쏟을 대상이 없어 그들은 입으로 모두 발산했다. 약삭 빠른 녀석들은 '절간에서도 새우젓 얻어 먹는다'는 속담처럼, 여자가 매우 귀한 전방에서도 수완 좋게 해결하는 몇몇 소대원들도 있었다. 간혹 부대 언저리를 배회하는 아가씨들이 있었다. 그러다 보면 같은 소대 내무반에서 같은 여성과 잠자리를 가진 일까지 생기는 웃지 못 할 일들도 벌어진곤 했다.

조 이병 부인은 한창 신혼시절, 남편이 갑작스레 입대하자 얼마나 그리웠으면 이 전방까지 찾아왔을까? 멀리서 바라보니 조 이병 부인은 부끄러움 탓인지 계속 고개를 푹 숙인 채 위병소 대기실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 이병이 A급 새 옷으로 갈아입고 위병소로 나가자 연병장에 모인 녀석들이 휘파람을 불면서 부러움에 찬 표정으로 한 마디씩 뱉었다.

"조 이병은 좋겠네."
"밤새도록 근무해라."

▲ 세기의 스타 마를린 몬로가 한국의 전방을 찾아서 위문공연을 하고 있다(1954. 2. 17.). ⓒ NARA


음담패설 허풍

소대원 중 몇 녀석들은 정기적으로 면회 오는 아가씨가 있었다. 그들은 약혼자 또는 여자친구 등으로 염복이 있는 녀석은 따로 있었다. 나는 남자의 생김새나 능력과 그의 염복은 비례하지 않음은 그때 체험적인 통계로 알게 되었다.

파월 귀국자인 2분대 황 하사는 주말마다 면회인데 때때로 만나는 이가 달라졌다. 그는 월남에서 근무할 때 펜팔로 사귄 아가씨들이라고 했다. 그는 그 즈음도 틈만 나면 여러 아가씨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는 같은 남자로 참 볼품이 없는데도 여자의 눈은 다른 모양이었다.

세상은 참 고르지 못하다. 주말마다 여자친구가 면회를 오는 소대원이 있는가 하면, 편지 한 장 받지도, 보내지도 못하는 소대원도 많으니 말이다. 이 전방 부대까지 여자친구나 부모님이 면회를 오는 경우는 근무도 빼주고 희망할 경우 외박도 허용했다. 단, 소대 전용 면회소인 민간 집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였다.

간혹 부모님들이 면회 오는 경우는 소대원들의 간식이 푸짐했다. 어머니들은 아들 부대로 면회 올 때는 인절미를 한 바구니씩 머리에 이거나 통닭도 삶아 왔기 때문이다.

전방 군인들의 주된 화제 메뉴는 여자 얘기, 그 다음이 휴가나 전역 얘기다. 그들은 입으로 스트레스를 다 쏟는다. 서로 과거를 잘 모르니까 입담이 셀 수밖에. 특히 파월 귀국자들은 국제적으로 놀았다.

그들 허풍을 듣노라면, 월남 가서 전투는 하지 않고 사이공 뒷골목만 누볐나 싶을 정도였다. 자고로 군인들의 허풍은 어찌나 센지, 그래서 생겨난 말이 '집에다 금송아지 안 매놓은 놈 어디 있나'였다.

무료한 시간의 그들의 음담패설 허풍은 단연 압권이었다. 그들의 허풍에 배가 아프도록 웃을 때도 어김이 없이 국방부 시계침은 돌아갔다.

(*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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