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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시대, 성직자가 감옥가는 건 당연"

고 박형규 목사가 세상과 작별하던 날

등록|2016.08.23 11:01 수정|2016.08.23 11:01

▲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인 고 박형규 목사의 장례예배가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엄수됐다. ⓒ 지유석


"불의한 시대에 성직자가 감옥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난 18일 타계한 고 박형규 목사가 생전에 남겼던 말입니다. 고 박 목사는 1974년 유신 시절 대표적인 시국사건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징역 15년을 선고 받은 일을 포함해 모두 여섯 차례 옥고를 치렀습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박 목사가 시무하던 서울제일교회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폭력배를 동원해 예배를 방해하고 목회자에게 협박을 가하는, 현대 교회사에서 보기 드문 만행을 자행했습니다. 제일교회에 투입된 깡패 가운데엔 서진 룸사롱 사건에 가담한 자가 섞여 있었다고 하니, 그 탄압의 정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박 목사는 말 그대로 온몸으로 독재 정권과 맞섰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위세를 떨치던 1981년엔 제66회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맡아 싸움의 선봉에 서기도 했습니다.

박 목사가 이렇게 불의한 정권과 맞서게 된 계기는 4.19혁명이라고 합니다. 박 목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마포, 공덕동은 가난한 동네였다. 집이 없어서 굴속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살던 동네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인이 청와대 근처 궁정동에 갔다가 나오면서 봤다고 말해주는데, 총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뛰어다니고 있는 거였다.

그때가 4․19 사건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갔는데, 피 흘려 다친 사람이 모이고, 사람들이 숨 가쁘게 뛰어다니던 모습을 보았다. 그때 큰 충격을 받았어. 목사가 돼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너무 무관심했구나 생각했다.

난 죽어가는 학생들 뒤를 따라가면서 많이 울었다. 피 흘리시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그날부터 내 설교가 과격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 이승만 장로는 사람 죽이는 악마라고 이야기하며 다녔다. 주변에서는 나를 보면서 미쳤다고 했지만, 그게 아니라 제대로 돌아온 거였다."

▲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인 고 박형규 목사의 장례예배가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기장 총회장으로 엄수됐다. ⓒ 지유석


▲ 고 박형규 목사의 장례예배가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엄수된 가운데, 고 박 목사의 친동생인 박희원 권사가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 지유석


▲ 고 박형규 목사의 장례예배가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엄수된 가운데, 고 박 목사의 장남인 박종렬 목사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 박종렬 목사도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빈민목회활동을 해왔다. ⓒ 지유석


▲ 고 박형규 목사의 장례예배가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엄수된 가운데, 유가족 중 한 명이 흐느끼고 있다. ⓒ 지유석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는 박 목사의 장례예배가 치러졌습니다. 이날 예배엔 기독교계 인사는 물론 손학규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이재오 전 의원, 신홍범 두레출판사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이철 민청학련운동 계승사업회 회장 등 정치·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박 목사와 인연이 깊습니다. 박 목사는 손학규 전 상임고문의 주례를 맡은 바 있었고, 신홍범 대표는 박 목사의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를 정리해줬습니다. 특히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었던 이철 대표는 조사를 낭독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열린 고 박형규 목사의 장례예배에서 이철 민청학련운동 계승사업회 회장이 조사를 낭독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지유석


▲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열린 고 박형규 목사 장례예배에 손학규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참석했다. ⓒ 지유석


장례 예배 분위기는 숙연했습니다. 예배의 숙연함은 비단 한 원로목사의 부고에서 비롯되지 많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시국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합니다. 무엇보다 고인이 몸을 던져 맞서 싸웠던 독재의 망령이 곳곳을 배회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또 어떤가요? 교회는, 그리고 목회자는 약자의 아픔을 보듬기보다 세속 권력자의 심기 챙기기에 더 급급합니다.

올해 3월 열렸던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나온 대통령 찬양 발언들은 듣기가 민망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요? 장례 예배에서 설교를 맡은 김상근 목사는 한국교회의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 고 박형규 목사의 장례예배가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엄수된 가운데, 이재오 전 의원이 고 박 목사의 시신이 담긴 관에 헌화 후 기도하고 있다. ⓒ 지유석


▲ 고 박형규 목사의 장례예배가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엄수된 가운데, 조화순 목사(맨 오른쪽)가 헌화하고 있다. 조 목사는 노동운동의 대모로 잘 알려져 있다. ⓒ 지유석


"저를 비롯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박 목사님 앞에, 그가 사랑한 교회 앞에, 그가 아낀 민중 앞에 참회하고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상황인지라 실로 엄혹했던 1970, 1980년대 감옥을 집 드나들 듯 했었고, 보안사가 동원한 폭력배들에게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던 박 목사의 영정 앞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인 고 박형규 목사의 장례예배가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엄수됐다. ⓒ 지유석


▲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인 고 박형규 목사의 장례예배가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엄수됐다. ⓒ 지유석


이제 박 목사는 먼저 떠나신 사모님 곁에서 영원한 잠에 들었습니다. 부디 독재도 없고, 탄압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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