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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는 '특이한 사찰'의 사연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의 2차 승전지 독산성과 세마사

등록|2016.08.29 15:10 수정|2016.08.29 15:10

▲ 독산성 성벽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오산시의 풍경. 이 사진은 임진왜란 당시 이 산성에 주둔하면 주변의 일본군 이동 상황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 정만진


독산성(禿山城, 일명 독성산성)은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55에 있다. 성에 가려면 독산성 삼림욕장 주차장부터 찾아야 한다. 삼림욕장 주차장에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져, 왼쪽으로 계속 차를 몰면 독산성에 닿고 오른쪽으로 걸으면 삼림욕장 안으로 들어간다.

독산성 삼림욕장 주차장 끝, 독산성으로 가는 도로 입구 좌우에 사찰 안내 표지석이 있다. 두 돌에는 모두 '大韓佛敎(대한불교) 曹溪宗(조계종) 百濟古刹(백제고찰) 禿山城(독산성) 洗馬寺(세마사)'가 새겨져 있다. 독산성 세마사? 절 이름을 이렇게 표현한 경우는 처음 본다.

'금강산 건봉사'와 '독산성 세마사'의 작명 차이

사찰명은 보통 금강산 건봉사, 가야산 해인사, 팔공산 동화사, 속리산 법주사, 지리산 화엄사, 관악산 연주암 식으로 나타낸다. 앞에 산 이름, 뒤에 절 이름이 나온다. 이렇게 되는 것은 우리나라 사찰이 대체로 산에 있기 때문이다.

경주의 천경림(天鏡林) 흥륜사(興輪寺), 김해의 초선대(招仙臺) 금산사(金仙寺) 같은 이름은 아주 특별한 예외이다. 이 두 사찰은 산이 아니라 평지에 있다. 법흥왕이 최초로 세운 국가 공인 사찰 흥륜사는 신라인들이 신성한 숲으로 여겼던 천경림에 있고, 금산사는 금관가야 2대 국왕 거등왕이 신선과 더불어 가야금과 바둑을 즐기며 놀았다는 초선대에 있다.    

▲ 김해 초선대 금산사(왼쪽)와 경주 천경림 흥륜사의 입구 모습. 보통 우리나라의 사찰은 소재지를 앞에 놓고 절 이름을 뒤에 놓는 식, 예를 들면 **산 **사 식으로 사찰명으로 붙이는데 처음부터 평지에 건설된 초선대 금산사와 천경림 흥륜사는 아주 다른 이름을 보여준다. ⓒ 정만진


독산성 세마사라면 절이 독산성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독산성은 석대산, 향로봉, 독성산 등 여러 이름을 가진 산의 정상부에 있다. 즉 석대산 세마사, 향로봉 세마사, 독성산 세마사 등으로 불러야 일반적인데도 사람들은 이 사찰에 독산성 세마사라는 특이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사찰 이름에 대한 궁금증은 사실 이곳에서 처음 느끼는 것이 아니다. 독산성 산림욕장으로 올라오는 도로는 오산시 독산성로269번길 6의 식당과 독산성로 263의 부동산 사무실 사이로 나 있다. 그 두 지번 사이에는 일주문 같기도 하고 홍살문 같기도 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일단 일주문은 아니다. 일주문이라면 적어도 한자로든 한글로든 '독산성 세마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문에는 '禿山城(독산성) 洗馬臺(세마대) 山門(산문)'이라는 특이한 현판이 붙어 있다. 독산성 세마대로 가는 산길의 어귀라는 뜻이다. 산문이 절을 나타내기도 하고 절의 바깥문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독산성 세마대 산문'을 '독산성 세마대 절' 또는 '독산성 세마대 절 바깥문'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세마사 입구 일주문은 사찰 이름이 없으니 일주문이 아니다

게다가 이 문 인근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이정표에는 세마사라는 이름 자체가 없다. 이정표에는 '독산성 세마대지(址, 터), 대한불교 조계종 보적사'만 안내되어 있다. 세마사라는 이름은 실종되어 버렸다.

▲ 성곽 위에 사찰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광경을 보여주는 독산성 유적 ⓒ 정만진


이래저래 혼란스럽다. 결론을 말하면, 세마사와 보적사는 같은 절이다. 이정표에서 1.4km가량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세마사 또는 보적사는 401년(백제 아신왕 10) 국가에서 처음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후 이곳에 산성이 수축될 때 절이 중창되었다.

이는 1920년에 현존 대웅전을 지을 때 절에 보적사라는 새 이름이 붙여졌다는 사실이 증언해준다. 세마사라는 이름은 1986년 부임한 도광(道光) 주지스님이 산성 안에 있는 세마대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그러나 세마사는 사찰 내부에서 쓰는 비공식적 이름이고 공식 명칭은 보적사이다.

▲ 독산성 둘레 약 5km 산책로를 한 바퀴 도는 데에는 2시간 30분가량 걸린다. ⓒ 정만진


보적사(寶積寺)라는 이름에는 전설이 깔려 있다. 춘궁기를 맞아 어느 노부부에게는 먹을 것이 쌀 한 되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노부부는 이 쌀을 식량으로 삼지 않고 부처님께 공양했다. 절에 다녀온 노부부는 화들짝 놀랐다. 곳간에 쌀이 가득 쌓여(積) 있는 것이었다. 부처(寶)의 은혜에 감동한 노부부는 그 이후 더욱 열심히 부처를 섬기고 공양했다. 놀라운 기적을 숭상한 사람들은 절을 보적사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사적 140호인 세마대에는 실화가 깃들어 있다. 1592년(선조 25) 7월 임진왜란 당시 이곳 독산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는 권율이었다. 금산 이치에서 적을 대파한 권율은 북진하여 이곳 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치대첩에 대해서는 <당신이 잘 모르는 임진왜란 속 또다른 대첩> 참조) 그런데 독산성의 최대 약점은 먹을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식수가 부족했던 독산성, 권율 장군 지혜를 발휘하여

산이 민둥산인 것을 본 적장은 조선군이 곧 식수난에 헤매게 되리라 간파했다. 적장은 말에 물 한 통을 실어 산성 안으로 들여보냈다. 항복하라는 뜻이었다. 권율은 정상부에 말을 세워두고 말등에 쌀을 줄줄 부었다. 말을 씻을 만큼 물이 풍부하다는 과시였다.

이를 멀리선 본 적장은 권율 장군의 지혜에 속고 말았다. 적장은 장기간 성을 포위하고 있더라도 실효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 군사를 물려 퇴각해버렸다. 그 이후 독산성 정상부에는 세마대(洗馬臺)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여졌다. 말(馬)을 씻은(洗) 곳(臺)이라는 뜻이었다.

▲ 독산성 성곽 유적 아래에 '사적 140호'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사찰 건물들은 모두 이 성곽 위에 있다. ⓒ 정만진


권율 군은 그 이후 계속 독산성에 머물러서는 일본군을 격퇴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한강 북쪽 행주토성(土城)으로 진을 옮겼다. 권율은 삼국 시대에 처음 축조된 이곳 행주토성에서 김시민의 진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흔히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일컬어지는 행주대첩의 위업을 일군다. 석성(石城)도 아닌, 높이도 불과 126.4m에 불과한 산에 쌓인 옛날 토성에서 우리나라 반만 년 역사 최대 전쟁인 임진왜란의 3대대첩에 손꼽히는 승리를 거두었으니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행주대첩에 대해서는 <삼국 시대 토성에서 이뤄낸 '임진왜란 3대대첩'> 참조)   

따라서 행주산성에 대해 자세히 학습한 적이 없는 답사자는 실제로 현장을 찾았을 때 진정으로 놀라게 된다. 임진왜란 3대 대첩지인 행주산성이 삼국 시대 흙성에 불과하다는 사실 앞에서 속절없이 경악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허술한 성에서 불과 2300명의 관군, 의병, 승병, 아낙네들이 3만여 일본 정규군을 이길 수 있었단 말인가! 행주산성이라면 으레 험준한 산에 자리잡고 있는 대단한 석성으로 알았는데…….

보적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곳에 당도하기 전까지는 당연히 일주문이나 천왕문을 지나서 사찰 경내로 들어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절에 도착해보면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다. 사찰과 속세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없는 것이다.

▲ 독산성 성문에는 '해탈의 문'이라는 불교 현판이 걸려 있다. ⓒ 정만진


보적사는 성문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성문 아래를 지나지 않고는 부처를 만날 수 없다. 이는 사찰 자체가 속세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뜻이다. 그 세속은 전쟁이다. 임진왜란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던 독산성 안에 지어진 법당인 만큼 일주문이며 천왕문을 세울 틈도 있을 리 없었다.

산신각 세울 높은 곳에 세마대가 건립된 내력

보적사가 보여주는 또 다른 특이점은, 법당보다 더 높은 곳에 산신각을 두는 보통의 사찰들과 아주 다른 건물 배치 방식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보적사 대웅전 바로 뒤가 산 정상이지만 그곳에는 산신각이 아니라 세마정이 있다. 세마정은 불교와 무관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세마정은 이곳이 세마대 터라는 사실을 기려 1957년에 지어진 정자이다. 세마정 바로 아래는 넓고 평평한 대지이다. 이 대지에는 임진왜란 당시 병기 창고가 있었고, 병사들의 조련장이기도 했다. 세마대는 곧 군사 훈련을 지휘하는 본부였던 것이다.

▲ 세마대는 보덕사 대웅전 뒤에 있다. '공사 안내'판에는 2016년 3월 28일부터 6월 25일까지 '독산성과 세마대지 세마대 보수 정비 공사'를 한다고 했는데 8월 15일에도 공사는 끝나지 않았다. 사진에 멀리 푸른 천으로 덮혀 있는 지붕이 세마대이다. 세마대 옆에는 산 정상부인데도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어 지금도 활 쏘는 연습장 기능을 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에 과녁이 보인다. ⓒ 정만진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사이인 1594년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나흘 동안 지역 백성들이 힘을 모아 무너진 성을 다시 튼튼하게 쌓았다. 이 소문이 번지자 이웃 고을 백성들도 고장의 성을 가다듬는 일에 자진 참여, 금지산성과 월계산성이 재차 수축되었고, 멀리 여주 파사산성까지 재정비되었다.

독산성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2년에도 변응성(邊應星)의 지휘 아래 다시 수축되었다. 또 1796년(정조 20)에 재차 고쳐 쌓았다. 이때 약사전이 건축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사람들은 약사전에 가기 위해서는 동문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 전란이 휩쓸고 지나간 곳에서는 부처를 만나는 일도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세마사는 오늘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 6월 25일이면 끝나야 할 보수 공사가 대략 두 달 뒤인데도 아직 끝나지 않아 8월 15일에 방문했을 때에는 세마대를 볼 수 없었다. 푸른 천막으로 덮혀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주차장에 게시되어 있는 세마대 사진을 재촬영한 것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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