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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요청으로 10년 만에 다시 나온 책

[서평] 최은희가 쓴 <그림책을 읽자 아이들을 읽자>

등록|2016.09.02 16:35 수정|2016.09.02 16:35
뉴스에서 제자들 때리는 선생이나 급식비 떼먹고 학생들에게 형편없는 식사 내놓는 학교 기사를 보면 꼭 못난 제 식구 소식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저런 인간들만 교직에 있는 건 아닌데, 학교도 꽤 괜찮은데 하고 혼자 위로하지만 충분치 않다. 교육정책에 실망하고 이상한 교육자에게 분노를 느낄 때 꺼내보고 싶은 책이 있다. 바로 교사이자 아동문학 연구가인 최은희가 쓴 <그림책을 읽자 아이들을 읽자>다. 책을 펼치면 자녀를 이 반에 보내고 싶을 만한 선생님 이야기가 반짝거린다.

십 년 전에 나온 책이 독자의 요청으로 다시 새 옷을 입고 출간될 정도이니 글은 참 질박하고 좋다. 부채처럼 가볍게 훑어보면 지금은 성인이 되었을 아이들 사진이 책장 곳곳에 박혀있다. 하나도 안 꾸미고, 입던 잠바, 신던 실내화 그대로이다. 떡진 앞머리는 가식이 없고 때 묻은 운동화는 정겹다. 학교의 민낯이 가을볕에 그을린 꼬맹이처럼 건강하다.

네 개의 장, 총 열일곱 편으로 된 이야기는 독립되어 있어 어떤 순서로 읽어도 무방하다. 각 글에는 아이들의 사연과 함께 읽은 그림책이 등장한다. 선생님은 낮은 의자에 앉아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춘다. 아이들은 잘 닦인 마룻바닥 위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그림책을 보고 듣는다. 만일 그 날에 속상한 일이 있거나 특별히 칭찬받을 친구가 있으면 선생님은 아이를 무릎에 앉힌다. 무릎 자리다. 애교 많은 몇몇은 엄마품처럼 따뜻한 선생님께 안긴다. 복닥복닥 온기 나누는 그 반에서는 어떤 대화가 오가는 것일까?

▲ 독자의 요청으로 1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책 ⓒ 이준수


'너와 나, 존재의 소중함'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첫 번째 사연을 함께 보자. 어느 해 유월의 1학년 교실, 헝클어진 단발머리 여자애가 전학 온다. 부모님 두 분이 밤늦게까지 장사를 하셔 손길이 미치지 못해 옷차림도 꾀죄죄하고 읽기, 쓰기, 셈이 느린 고운이다. 장난꾸러기 용훈이가 괴롭혀도 맥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는 여린 소녀는 좀처럼 학급에 적응하지 못한다.

선생님은 한글을 읽는데 서투른 아이들을 남겨 놓고, 사탕을 쥐여줘가며 나머지 공부를 시킨다. 그림책도 보여주고, 받아쓰기도 시킨다. 더딘 변화에 답답할 무렵 고운이는 개미 만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글을 읽기 시작한다. 그 순간의 기쁨도 잠시 자존감 낮은 8살 꼬마는 여전히 어둡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은 권정생 글, 정승각 그림의 <강아지똥>을 읽어준다. 그날 무릎 자리는 고은이 차지였다.

"난 더러운 똥인데,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 수 없을 텐데...."
"강아지똥은 온몸이 비에 맞아 자디잘게 부서졌어요. 부서진 채 땅 속으로 스며 들어가 민들레 뿌리로 모여들었어요. 줄기를 타고 올라가 꽃봉오리를 맺었어요."

선생님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었다. 그 후 아이들에게 책 읽은 느낌을 글로 쓰게 하였는데 고은이는 이렇게 썼다.

'강아지 똥은 냄새가 나도 민들래 꽃을 피었다. 나도 받아쓰기는 못하지만 나도 쓸모가 있다. 우리 친구들도'

고운이는 별을 세 개나 받고 그걸로 부족해서 반 최고 상인 '선생님이 업고 교실 두 바퀴 돌기'까지 누린다. 이후 그녀는 작은 목소리지만 틀리지 않고 책을 읽고, 정성스레 일기를 쓴다. <강아지똥>으로 아이를 얻은 셈이었다.

▲ 세상에 쓸모 없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강아지똥 ⓒ 길벗어린이


마흔 명이 넘는 1학년 교실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화장실 가도 되냐고, 가위질해달라고, 짝꿍이 밀었다고 얼마나 선생님을 불러 댈 것인가? 그 혼잡함의 틈바구니에서 어찌 이리도 아름다운 시선을 유지할 수 있는지 놀랍다. 두 번째 사연 '반성문을 쓰는 시간'도 만만치 않다. 이번엔 만날 아침에 늦게 오는 족발집 아들 용훈이가 등장한다. 지각한 용훈이의 18번 핑계는 엄마였다.

"엄마가 늦게 일어나서, 엄마가 밥 먹고 가라고 해서, 엄마가, 엄마가..."

고생하는 엄마를 팔지 말라고 다그치는 담임과 용훈이의 관계는 극도로 나빠진다. 도를 넘어서는 용훈이의 장난기와 산만함에 견디다 못한 교사는 학부모에게 SOS를 요청한다. 자식 놈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면서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용훈이네 사정은 심각했다. 엄마 핑계 대는 용훈이를 다그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간 톤을 높여 꾸중한 기억이 떠올라 미안해진 저자는 그림책 <지각대장 존>을 꺼내 든다. 주인공 존 패트릭 노먼 맥 헤너시는 등굣길에 온갖 사건을 겪으며 지각을 밥 먹듯 한다. 안타깝게도 존의 담임은 위로는커녕 무지막지한 벌만 준다. 어찌어찌하여 존은 지각하지 않고, 담임 선생님은 고릴라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된다. 저자는 일부러 못된 선생님이 등장하고 마침내는 골탕 먹는 장면으로 끝나는 그림책을 선택하여 자발적으로 반성문을 쓴다.

<지각대장 존>을 읽고 용훈이가 더 이상 지각을 않거나 숙제, 준비물을 잘 챙겨 오는 모범생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대신 선생님은 아이들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 주려 하였고, '어째서?'가 아니고 '왜?'라는 물음을 던지며 진지하게 기다려 준다. 저자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숨김없이 고백하며 글을 맺는다.

'나는 다시는 아이들 말을 의심하거나 내 눈높이로 아이들 마음을 재지 않겠습니다.'

▲ 함부로 아이들의 말을 흘려 듣지 않기 위해 읽었다는 <지각대장 존> ⓒ 비룡소


위에 소개한 두 이야기 말고 나머지 열다섯 편의 사연들도 저마다 반성과 감탄, 고민이 녹아있다. 뭐든 자기 뜻대로 하는 지훈이, 외톨이 민영이, 새침데기 수정이, 곧잘 투닥거리는 혜원이와 동욱이... 여느 교실, 가정에 존재하는 평범한 얼굴이다. 자꾸 만져서 맨들 맨들 해진 돌멩이처럼 한 명 한 명 사랑스럽다. 저자 최은희 선생님이 바라보는 교실의 풍경이 그려진다.

사소한 일상을 놓치지 않고 담아낸 문장은 진정성이 느껴진다. 아이들에게 마음의 무릎을 내어 주는 선생으로 늙고 싶다는 저자의 말을 끝으로 책을 덮었을 때 나는 엄마가 쑤어 준 닭죽 생각이 났다. 곰솥에서 푸지게 퍼낸 뜨거운 닭죽처럼 한 사연, 두 사연 귀한 기록들을 삼키다 보면 어느새 깊은 맛에 반하여 323쪽짜리 책을 뚝딱 비워내게 된다.

꼭 교사가 아니어도 괜찮다. 자녀를 좀 더 알고 싶거나, 아이들 세계의 속살을 경험하고 싶은 독자라면 충분히 시간 낼 가치가 있다. 더불어 그림책 읽어 주는 방법이나 연관 그림책, 아이와 나눌 생각거리들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으니 실용서로 접근해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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