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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모태 바이칼을 찾아

민족의 시원 바이칼을 향한 대장정

등록|2016.09.05 14:54 수정|2016.09.05 14:54

한겨레 바이칼 평화대장정 여행단 (바이칼 알혼 섬에서, 2016. 08.21)바이칼 알혼 섬에서 여행 마지막 날 찍은 단체 사진 ⓒ 김병하


3박 4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끝내고, 이르쿠츠크의 바이칼 비즈니스센터 호텔에서 1박하였다. 모처럼 호텔에서 샤워를 하고 나니 몸이 개운하여, 숙면을 하였다. 이튿날 호텔에서 서구식 뷔페로 여유있게 아침 식사를 제대로 하였다. 짐을 꾸려 버스에 탑승해 오전 동안에는 이르쿠츠크 시내관광을 하였다.

러시아의 파리로 일컬어지는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호의 서쪽 앙가라강과 이르쿠트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하는 인구 60만 정도의 아름다운 도시다. 이곳은 동시베리아의 행정‧경제‧교육‧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바이칼 호에서 유일하게 흘러나오는 앙가라강이 시가를 가로지르고 있어, 도시의 분위기와 경관에 호감이 간다.

이르쿠츠크가 러시아의 파리로 불리게 된 데에는 1825년 12월에 청년 귀족장교들이 일으킨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영향이 크다. 훗날 볼세비키 혁명에도 영향을 미친 데카브리스트들의 혁명은 이르쿠츠크와는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원래 이르쿠츠크는 카자흐인들 중심의 소상공인들이 도시의 근간을 이루었으나, 이곳에 서구의 귀족문화를 전수해준 사람들은 혁명에 실패하고 유배되어 온 데카브리스트들이었다. 그들은 나폴레옹 침략전쟁 이후 자유와 근대문명이 만개한 유럽과 절대군주 지배하의 조국 러시아를 비교하면서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혁명에 실패한 데카브리스트들과 그들 부인들의 헌신적 사랑과 봉사에 얽힌 애절한 이야기는 훗날 시베리아 유배문학에 다양한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여기에 착안하여 김보근(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은 이번 여행 자료에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꽃핀 사랑-러시아 혁명가 데카브리스트와 그들의 아내'라는 글을 올려놓았다. 이 글의 서두에 "데카브리스트들은 민중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가진 19세기 초반 러시아 혁명가들입니다. 하지만 이 혁명에 얽힌 진짜 주인공은 그들의 부인들입니다. 그들의 민중에 대한 사랑보다 더 뜨거운 남편사랑을 보여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라 적고 있다.

데카브리스트들의 행동과 사상은 후에 러시아문학과 사상운동은 물론 각종 개혁운동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19세기 말 김옥균 등에 의한 구한말 개화지식인들의 갑신정변이 왜 3일천하로 막을 내린 채로 그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정변을 일으켰다는 한계를 흔히 지적하지만, 우리에게 역사의 추동 세력은 항상 보수 쪽이었고, 그 전통은 지금도 큰 틀에서 변함이 없다.

러시아에서는 데카브리스트 운동에 크게 감동을 받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이 나왔고,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부활>에도 데카브리스트의 사상이 배어 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문학이나 사상사를 통해 한말 개화운동의 줄기 있는 영향을 찾기가 어렵다. 그 결과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의 참혹한 실패 여파로 마침내 일제 36년의 식민통치를 겪게 되고, 그 식민통치 이후 이어진 남북분단은 7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해방둥이인 나는 바로 분단시대의 1세대에 해당된다.

바이칼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정 마지막 날 밤에 저녁 식사 후 열차 레스토랑에서 김보근 소장이 '바이칼과 한민족-신화시대부터 통일시대까지'라는 주제로 인문학 강의를 해주어 바이칼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때맞춰 도움을 주었다. 바아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2500만년의 나이) 호수이자 수심이 가장 깊은(약 1700m) 담수호로 세계 민물의 약 20%를 차지한다. 세계 식수의 약 80%를 담고 있어, 더 이상 유입되는 물 없이(약 330개의 강물이 이곳으로 계속 흘러 듬) 현재 상태만으로도 인류 전체가 40년을 먹을 수 있는 양의 수자원을 보유한 바다 같은 호수다. 호수와 그 주변에 2600여 종의 생물이 살고 있고, 그중 1200 종의 동물과 600종의 식물이 이곳 바아칼에서만 사는 희귀종이란다.

이처럼 바이칼은 자연의 신비가 살아 숨 쉬는 성소(聖所)다. 그리고 바이칼은 지상에서 가장 맑은 물들이 하나로 모여 이룬 '물의 천국'이다. 김종록(2002)은 "남미의 아마존 강 유역의 정글이 지구의 허파라면, 이곳 바이칼과 시베리아 타이가 숲은 북반구의 허파이며 나아가 북방문화의 자궁이다. 바이칼은 수많은 북방민족들의 신화가 탄생하는 대지의 오아시스이기도 하다."고 평한다. 하여 바이칼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숙연해지는 생명의 시원이자 자연의 신비 그 자체다.

바이칼 호수를 찾는 대장정은 우리에게 민족의 시원을 찾는 길이라니 가슴이 설렌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 나는 '진화론과 아시아'(한겨레 2016.08.13)라는 특집기사에서 과학적 지식은 늘 뒤집힐(천동설이 지동설로 뒤집히듯) 가능성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과학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제 인류학자들은 아시아가 인류 진화의 핵심이 되는 전혀 새로운 시나리오를 조심스레 제기하고 있다. 2011년 미국과 조지아 연구팀은 드라시니 화석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들은 논문 말미에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가 아닌 아시아에서 탄생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중략)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호모에렉투스 가운데 일부는 아시아에 퍼져나가고 일부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이들은 아시아에서 베이징인과 자바인이 됐고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이 됐으며, 아프리카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됐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시 유라시아로 퍼져 나갔다. 그게 우리다. 초기에 아시아에 온 작은 인류는 곧바로 사라지지 않고 아시아 곳곳에 퍼져 나갔는데, 일부는 꽤 오래 살아남아 5만 년 전까지 흔적을 남겼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아시아가 더 이상 인류 진화의 변방이 아니라는 게다. 그 근거의 일부를 우리는 바이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김보근 소장의 보고를  들어 보자.

"최근 많은 이들은 우리 민족이 바이칼 호수 주변에서 출발해 한반도에 다다랐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이칼 호수와 몽골주변에 흩어져 살던 일족이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시베리아를 거쳐 마침내 동쪽 끝에 이른 뒤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와서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것입니다...(중략) 시베리아와 한반도는 신석기시대 이래 빗살모늬 토기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학계에서는 신라 왕족의 금관에 있는 山이나 出자형의 장식이 바이칼 호수 원주민인 부리야트족과 에벤키족 무당의 관모뿐만 아니라, 그들 신화와 바로 연결됨을 지적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바이칼 호수 주변에 살고 있는 부리야트족은 생김새부터 우리와 아주 흡사합니다. 부리야트족 아이들은 우리와 같이 엉덩이에 푸른 반점이 있습니다."

이런 지적은 민족의 시원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고찰에 주목할 만한 시사를 준다. 특히 육당 최남선은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1928)에서 한민족과 바이칼 부리야트족의 '천신주재'(天神主宰)를 중심으로 한 신화적 동질성을 거론하면서 우리 민족의 북방문화적 독자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사관과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을 깨기 위한 육당 나름의 주체적 사관이었다. 불함문화의 '불함'이란, 광명, 하늘, 하늘신(天神)을 뜻하는 고어로서, 육당은 조선민족의 기원을 '불함문화'로 명명하고 있다. 육당은 중국과 인도문화의 본질을 남방계 문화로 보는 반면에, 불함문화는 북방계 문화로 보았다. 그 명백한 표상이 조선 역사상의 단군과 부루이며, 그 가르침이 풍류도(風流道)에 반영되었다는 게다.

여기 '불함'이라는 말이 바이칼 알혼 섬에 있는 '불한'(Burhan/Burkhan) 바위와 어원상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하다. 원래 '불한' 바위는 아시아에서 신성한 지역의 하나로 샤먼의 제사장으로 천신(天神)을 모시는 신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알혼 섬의 원주민인 브리야트족들은 후에 불교에 영향을 받아 '불한'을 '붓다'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했단다. 소설가 김종록은 <바이칼, 우리 문화 원류를 찾아서>(2002)에서 이렇게 말한다.

'알혼의 꽃, 바이칼 정기의 핵인 불한(불칸)바위를 찾아간다. 불한의 '불'은 '밝음', '해'의 의미가 있고'한'은 '칸'이기도 한데 몽골의 징기스칸이나 신라의 마립간처럼 왕을 뜻한다. 따라서 불한(불칸)이란 밝은 신 곧 천신(天神)이며 바이칼의 영이다. 이 불한에서 밝은 임금, 곧 단군이 나왔음이고 육당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의 원류가 되는 것이다.'

불한 바위는 바이칼 샤먼의 정령이 깃든 곳이자 신기(神氣)가 넘치는 신성한 바위다. 나는 불한 바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양팔을 벌리고 한껏 심호흡을 하면서 신령한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이렇게 혼자서 언덕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내려오니 집사람이 혼자서 뭘 하고 이제 오느냐고 해서, 속으로 좀 겸연쩍었다. 왜냐하면 그 상황을 내가 굳이 말로 설명하기가 난처했기 때문이다.

알혼 섬에서 내려다 본 바이칼 호수맑은 날 알혼 섬 언저리에서 찍은 바이칼 호수 의 전경 ⓒ 김병하


이쯤에서 바이칼 여정을 정리해 봐야겠다. 우리 일행은 이르쿠츠크에서 버스로 다섯 시간 이상 초원을 달려 해질 무렵에야 겨우 바이칼 남쪽 어귀에 도착해 호수 속의 섬(湖中島)인 알혼 섬으로 가는 바지선에 올랐다. 알혼 섬에 내려 다시 현지의 봉고차를 타고 비포장 모레 길을 한참 달리다 보니 다시 서녘에 아름다운 황혼이 붉은 기운을 뿜는다. 해질녘 초원의 모래 길을 혼자서 걸어가는 서양 청년이 차를 세워 달라고 손을 들었지만, 우리 일행이 탄 차들은 그냥 모래 길을 질주하면서 뿌연 먼지만 뿜어냈다. 곧 날이 어두워질 텐데 젊은 나그네의 갈 길이 걱정된다.

일행은 알혼 섬에 있는 유일한 호텔인 바이칼 뷰(Baikal View)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이라지만 초원 속의 대형 펜션과 같은 분위기다. 호수 속 섬 초원의 신선한 공기가 온몸에 스며들자 저절로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의 쾌적함이 몸과 맘을 이리도 가볍게 해주는 걸 체감하면서, 내 몸 밖의 온생명이 내 몸에 활력을 주는 효험이 참 신통하게 느껴졌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 중에 BK 투어 사장이 옆자리에 동석하여, 바이칼 투어 개발과정과 그간의 어려움을 들을 수 있었다.

음력 보름이 어저께 지나고 동쪽 하늘에 둥근 달이 훤하게 떠오르자 알혼의 초원 정경이 달빛 아래 한결 아늑해 보였다. 한겨레 김 소장의 즉흥 제의에 따라 우리 일행은 별빛보기 트레킹에 나섰다. 언덕길을 따라 밝은 달빛 아래 알혼의 초원을 걸어가니, 자랄 때 달빛 아래 고향 낙동강 변에서 놀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첫 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 구절이 절로 나온다. 초원 언덕에서 보드카 잔을 돌려가면서 일행의 '별빛보기' 분위기가 한층 고조된다. 내려오면서 보니 벌써 길옆 풀밭에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주선(酒仙)들이 있었다. 그렇게 달빛과 별빛과 보드카에 취한 채로 바이칼 알혼의 여름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니 역시나 맑고 쾌적한 날씨다. 오늘은 종일 알혼 섬 일대를 돌아보는 날이다. 맨 먼저 알혼 섬박물관에 들러 박물관장의 섬 역사와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알혼 섬은 바이칼 호수 안에 있는 약 30개의 섬 중 가장 큰 섬으로 햇빛이 풍부한 섬이란다. 신생대를 거쳐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섬에 살기 시작했는데, 원주민 브리야트 족은 20세기까지 유목생활을 해오다가 목축 중심으로 정착하였으며, 21세기에 와서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삶에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단다.

지금 원주민들의 삶은 과거 유목생활을 하던 때보담 더 행복할까? 유발 하라리 교수는 <사피엔스>(2015)라는 저서에서 인류는 농업시대보다 유목생활을 하던 때가 훨씬 자유로웠고 삶의 여가를 향유했단다. 물질적 풍요와 편익이 결코 인간 삶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걸 우리는 뒤늦게 그것도 조금씩 깨닫고 있다.

종일 알혼 섬을 돌면서 비포장 길을 달리는 봉고를 타고 격한 흔들림에 시달리는 것보다 트레킹하면서 걷는 게 훨씬 좋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 코스로 우리는 불한(불칸) 바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자유롭게 거닐었다. 샤먼들이 천신제를 지냈다는 솟대와 형형색색의 깃발 앞에 서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이곳에서 몇 번인가 팔을 벌려 두 손을 모으는 자세로 불한 바위를 향해 절을 했다. 그리고 샤먼들이 천신제를 올린 그 자리에서 샤먼의 정령을 체감하고자 가슴 깊이 심호흡을 했다. 샤먼의 신기(神氣)가 내 몸속 핏줄에 애초에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내 영혼의 시원을 찾아, 그것을 한반도 동남쪽 어디에선가 내 남은 삶에 체현(體現)하고 싶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내 본래면목을 깨치고 싶다.

엄격히 말하면, '나'라는 존재의 생존 나이는 겨우 72세가 아니라, 지구에 생명이 존재한 40억 년의 장구한 세월을 거쳐 꾸준히 공들여 진화해 온 끝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게다. 우리 인간이 직립 보행하고 인지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200만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삶의 변화를 겪으면서 방랑하는 유목생활에서 한 곳에 정착하여 농업중심의 삶으로 이행하게 된 건 불과 3만 년에서 2만 5천 년 전부터다. 농업중심에서 산업시대로 접어든 것은 길어도 500년, 우리나라의 경우 반세기에 불과하다. 엄청난 압축발전이다. 이런 대전환의 갈림 길에서 내 영혼의 본향을 찾아 '대장정'의 길을 나선 게다.

바이칼 호 알혼 섬에서의 마지막 날 밤 우리 일행은 양고기 바비큐를 안주 삼아 보드카와 맥주를 권하면서 여흥을 나누었다. 이렇게 바이칼 알혼 섬의 밤은 다시 깊어갔다. 이튿날 아침 나는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불한 바위를 바라보면서 마지막으로 맘 먹고 알혼의 초원을 산책했다. 해 뜰 무렵의 신선한 공기와 따스한 빛살이 다시금 내 몸속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손녀랑 집사람이랑 함께한 7박 8일 간의 바이칼 여정은 이제 귀로에 접어든다. 뭐든 시작하면 끝이 있다. 우리에게 그 끝은 대개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번 여행은 내게 너무 짧았다.

바이칼의 손녀(지현 초5) 여행 일지, 밑에 불한 바위 사진이 보임손녀 지현이가 작성한 바이칼 여행 일지 중에서 발췌한 것임 ⓒ 김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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