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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고통 느끼면, 삽겹살 대신 샐러드 먹어야 할까

[식탁이 낯설어질 때 1-②] 윤리적 채식주의 논쟁 1라운드

등록|2016.09.10 16:53 수정|2016.09.10 16:53
[1-①] '채식인'과 '채식주의자'는 다르다

일러두기
1편에서 밝힌 바와 같이 1부는 국내 학술지 <철학탐구>(중앙대 중앙철학연구소)에서 수년간 벌어졌던 유명한 채식주의 논쟁을 해설할 예정입니다. 이번 연재에서 주로 인용한 저작은 동물해방론자이자 실천적 채식주의자인 피터 싱어 교수님(프린스턴대)의 <동물 해방>과 맹주만 교수님(중앙대)의 <피터 싱어와 윤리적 채식주의>입니다. 맹 교수님은 중앙대 철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하시고 칸트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으신 후 현재 중앙대 철학과 교수로 계십니다. 맹 교수님은  ① 피터 싱어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정리하고 ② 그 주장의 이론적 토대가 견고하지 못 하다는 비판을 시도하셨고, 이후 ③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등의 저자이신 최훈 교수(강원대)님이 맹 교수님의 피터 싱어 해석과 비판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수년간 흥미진진한 논쟁이 지속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논쟁을 발굴한 뒤 채식주의에 관한 중요한 논점들이 반영돼 있다고 판단해, 이미 공표된 이 연구결과들을 저널리즘의 언어로 번역, 해설, 논평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독자들께서 꼭 알아두셔야 할 점은 저의 해석이 이분들의 원래 의도와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해석은 해석자의 몫이므로 불가피하게 작은 오해라도 피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이 글에서 소개드린 연구자들께서 다른 의견을 보내주시면 후속 지면에 적극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본 연재가 유익한 연구 성과들을 대중들에게 소개하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 채식주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논점] 피터 싱어의 윤리적 채식주의는 정말 근거가 탄탄한가?

▲ 피터 싱어 석좌교수(프린스턴대). ⓒ 안희경


"한 존재가 고통을 느낄 경우 그 고통을 고려하기를 거부하는 도덕적 정당화란 있을 수 없다" (Singer, Peter, 1990:8)


채식은 비록 음식 문화의 주변부에 머물렀어도 나름 오랜 전통을 갖는다. 하지만 도덕적인 이유에서 모든 육식 문화를 거부하고 채식을 실천하는 '동물 해방 운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70년대다. 특히 동물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도덕적인 존재라고 선언한 피터 싱어(1946~)의 <동물 해방>은 동물 해방 운동의 바이블이 됐다.(필자)

싱어는 자신의 의도를 "도덕적 지평의 확장을 그리고 평등이라는 기본적인 도덕적 원칙의 확대 혹은 재해석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밝힌다(Singer, Peter, 1974:165).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평등하며 동물도 도덕적 존재로 고려해야 한다는 발상은 인간만이 도덕적 존재라는 통념을 문제 삼고, 육식과 동물실험을 착취와 차별로 간주하고 채식을 요구하는 당시 동물해방론자와 윤리적 채식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필자)

따라서 싱어는 동물 윤리의 선구자다(또한 자신도 채식을 하는 실천적 채식주의자다). 심지어 여기서 '착취와 차별'은 동물해방론자 등에게 흑인이나 여성에 대한 '착취와 차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필자)  인종차별, 여성차별과 '종차별'이 비슷한 맥락이라는 발상에 초점을 맞춘 서평은, 중앙대 교지 <중앙문화>의 글이 더 훌륭하니 관심이 있다면 참조하기 바란다(관련 기사: 인간만 평등하면 되나요?).

이 글은 피터 싱어의 주장을 떠받치는 보다 근본적인 토대에 집중한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그 토대에 대한 맹 교수의 해석과 비판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설하고 논평하는 일에 집중한다.(필자) 맹 교수는 자신의 의도를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옹호하며, 그것이 함의하게 되는 육식의 포기 및 윤리적 채식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싱어의 이론적 토대 자체가 견고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이려는 시도"라고 밝히고 있다(맹주만, 2007:235).

돼지가 고통을 느끼면, 삼겹살 대신 샐러드를 먹어야 할까?

피터 싱어의 윤리적 채식주의에 대한 맹 교수의 비판에 대해서 다루려면, 독자들은 우선 피터 싱어의 윤리적 채식주의 자체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피터 싱어는 동물도 도덕적 존재이며 동물의 이익도 평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으로 우선 '감응력(sentience)'이라는 걸 제시하는데(Singer, Peter, 1990:1), 이는 "고통을 느끼거나 즐거움 또는 행복을 경험하는 능력"을 말한다(Singer, Peter, 1974:172).

싱어에게 감응력이 있고 없고는 도덕과 도덕이 아닌 것의 경계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며, 동물의 이익도 인간처럼 평등하게 고려하라는 대원칙을 적용하기 전에 필요한 필수적 조건이다(맹주만, 2007:236~237). 물론, 싱어의 주장이 개와 돼지도 감응력이 있다고 인간처럼 SNS에 글도 쓸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식의 결론까지 이끌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필자)

▲ 돼지가 고통스러워 한다면 삼겹살을 그만 먹어야 할까? ⓒ pixabay


개와 돼지가 과연 SNS에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할지 쓸 수는 있을지도 중요하지만, 이들에게 도덕적 지위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가치판단이라면 어떤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은 당위판단이므로 구분된다. 다시 말해, 가치판단이 즉시 당위판단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필자) 싱어도 고려의 평등과 대우의 평등을 구분한다(Singer, Peter, 1990:2).

다만 잡아먹고자 해를 가하면 둘 다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명백하니 육식만큼은 그만두고 채식을 해야 한다고 싱어는 주장하는 것 같다. 또한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고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통념들을 공격하며 인간과 동물은 근본적 차이가 아닌 정도의 차이들만 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짧은 지면에서 이 논리들을 전부 소개할 수는 없다.(필자)

하지만 싱어가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은 다룰 필요가 있다.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 한다면 감응력을 도덕적 고려의 필수조건으로 제시하는 싱어의 논변도 무너지기 때문이다.(필자) 싱어는 고통이란 의식의 상태이므로 상대의 의식에 직접 접근할 수는 없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징후들로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Singer, Peter, 1990:10).

행동, 신경체계의 특징, 고통이 갖는 진화론적 유용성 등. 동물도 사람처럼 고통을 느낀다고 추론할 수 있는 몸짓이 나타나고, 인간이 고통을 느낄 만한 상황에서 유사한 신경학적 반응이 나타나고, 둘 다 고통이 있는 편이 생존율을 높여주는 유용성을 갖는 진화 과정을 겪어왔다는 식이다.(Singer, Peter, 1990:10~12, 235~236) 하지만 생각해보자.

각각의 동물의 감응력은 양적, 질적 차이가 있지 않을까? 인간끼리도 서로의 고통을 잘 이해하지 못 하기 십상인데 서로 다른 종끼리 감응력을 보편적인 도덕 기준으로 삼는 게 가능할까?(필자) 싱어는 이 차이는 정도의 문제일 뿐 다른 기준을 통해 생명에 대해 고려해야 할 근거는 아니라고 본다. 이어서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문제를 풀지 예를 든다(피터 싱어, 1997; 아래 맹주만, 2007:239~243에서 재인용).

'자의식과 의식이 모두 있는 생명(인격체)' '의식만 있는 생명' '의식도 없는 생명'을 나누고 각각의 감응력을 고려해, 육식으로 사람이 얻는 즐거움이 동물과 그 가족이 겪는 고통보다 클 때만 허용하자는 것이다. 우선 자의식과 의식을 모두 갖춘 게 명백하면 먹어서는 안 되고, 자의식에 결함이 있거나 자의식을 갖췄는지 의심스러워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사람 중 아기나 식물인간처럼 자의식에 결함이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잡아 먹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동물도 잡아먹어야 할 아무런 명분이 없는데 왜 잡아먹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이 저지르는 대부분의 동물 살생을 비판하는 '의심의 이득의 원칙'이라는 강력한 논리도 하나 덧붙인다. 자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다면 괜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적용만 되면 육지 동물은 물론이고 어류와 갑각류까지 먹는 게 정당화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 심지어 싱어는 자의식도 이성도 없는 동물조차 (다소 정당성이 약화되긴 하지만), '대체 가능성 논변'을 통해 먹어서 안 된다고 주장한다. 대체 가능성 논변이란, 한 동물에 가하는 손해는 다른 동물이 얻는 이익에 의해 균형을 이룰 수 있을 때(대체 가능할 때)만 허용될 수 있다는 논리다.

동물이 즐겁게 살다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고, 그 가족들의 고통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그의 죽음이 없었다면 생존할 수 없었던 다른 동물의 삶에 의해 대체 가능할 때만 허용된다는 식이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다. 결국 싱어는 무조건적 채식주의자는 아니며 강경한 채식주의자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에게 공장식 축산은 마땅히 혁파되어야 하며 동물의 어마어마한 고통을 줘 얻은 고기는 사치이자 기호 식품에 불과하다.

하지만, 왜 감응력을 도덕의 기준으로 봐야 할까?

▲ 채식. ⓒ pixabay


싱어의 주장에 대한 맹 교수의 핵심적인 지적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필자) 우선 맹 교수는 1) 감응력 말고도 생물권과 생태계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속성들이 있음을 지적하며(어쨌든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다-필자 주), 왜 사람들이 굳이 싱어처럼 감응력을 도덕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 따져 묻는다.(맹주만, 2007:244))

이어서 바로 2) 육식 금지와 채식주의 사이에 간극이 있다고 지적한다. 싱어 뿐 아니라 고통 개념에 의존해 동물도 도덕적 지위가 인정된다고 주장하는 몇몇 학자들에게는, 인간 뿐 아니라 육식 금지의 대상인 동물이 도덕적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채식주의의 대상인 식물은 생물학적 의미 이상을 못 갖는다. 이러한 불일치는 독립적 기준을 갖고 식물에 대해 공정하게 고려하고 평가하지 않았다는 방증은 아니냐는 지적이다.(맹주만, 2007:245)

필자의 사견임을 전제로 하되, 문맥을 고려해보면 맹 교수가 1)을 지적한 후 곧바로 2)를 지적한 것은 이유가 있는 것 같다.(필자) 왜냐하면 맹 교수도 이미 싱어가 식물은 동물과 달리 중앙 집중적으로 조직된 신경 체계를 갖지 않아 고통을 시사하는 행위를 발견할 수 없어서(피터 싱어, 1997:97)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맹주만, 2007:244) 그런데도 왜 자꾸 식물에게도 공정했느냐고 묻는 걸까.

감응력 말고도 도덕적 기준이 될만한 독립적 기준이 없는지 성실하게 찾아볼 수 있을 텐데도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고통 중심 윤리학이 내장한 편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필자) 맹 교수의 실제 의도가 무엇이든 그는 이어서 3) 싱어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혼동한 건 아닌지 문제 삼는다.(맹주만, 2007:246)

앞서 설명했듯 싱어는 인간과 동물의 신경 체계가 유사하고, 둘 다 진화생물학적으로 고통을 가지는 편이 유용하다는 근거들을 들며, 인간과 동물은 모두 감응력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진화생물학적 유용성을 따지는 싱어식 논리대로라면 식물도 고통과 비슷한 어떤 속성 X를 느낀다고 보는 것도 "논리적으로(는) 타당"하다는 것이다(실제로 식물이 X를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와는 무관하다 -필자 주).

그런데 고통과 X가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려면 단순히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동물은 고통을 느낀다' '식물은 X를 느낀다'와 같은 사실판단만으로는 부족하고, 이것들이 어떤 독립적이고 본래적인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는 걸 보여주어야 하며, 특히 싱어의 경우 고통과 X를 별개로 보아야 할 합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게 맹 교수의 지적이다.(맹주만, 2007:246~247) 필자의 사견으로는, 이것은 재밌는 지적이다.

왜냐하면 맹 교수가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과학적 사실과 무관한 논리적 가정까지 도입해 싱어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은, 과학과 윤리학의 관계를 확실히 하는 의의도 있다. 아주 직설적으로 물어보자. 과연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이, 곧바로 보편적인 가치 기준이 될 수 있을까?(필자)

4) 맹 교수는 "인간은 고통 이상의 존재이며, 특히 인간의 윤리는 그 이상의 토대 위에서 정초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즐거움은 덜하더라도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더 큰 고통을 허용하기도"하는데, "이렇게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고통을 다른 가치들과 분리시켜서 독립적인 가치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맹주만, 2007:249) 정리하면 고통도 때때로 가치를 갖지만 그것만으로 도덕적 기준을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필자)

[생각해보기] 인간은 동물의 고통에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 소가 고통스러워 한다면 소고기를 그만 먹어야 할까? ⓒ pixabay


지금까지 동물해방론의 선구자 피터 싱어의 윤리적 채식주의를 해설했고, 또 싱어에 대한 맹 교수의 비판을 해설해봤다. 그러나 누누이 강조 드리듯 독자들께서는 이것이 곧 싱어나 맹 교수의 실제 의도와 100% 일치한다고 단정하지는 말아주시기를 바란다. 또한, 두 분의 주장이 당장 어떤 확정적인 답을 줬다고 결론을 내리기보다 앞으로 논쟁을 좀 더 지구력 있게 지켜보시길 권한다. 사실 두 분의 입장이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다.(필자)

맹 교수도 싱어의 "사소한 즐거움을 위해 과도한 고통을 가하거나 감수하는 것마저 정당화하기는 어렵다"는 생각만큼은 상식과 일치한다고 본다. 따라서 "동물의 복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때도 있다"고 본다. 다만, 보편적인 도덕의 기준을 싱어의 고통의 윤리처럼 감응력으로 내세우는 것만큼은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맹주만, 2007:249).

맹 교수는 인간은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통해서만 동물의 고통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고통이 고통인 줄 알려면 우선 인간의 삶에 대한 인지적, 가치적 이해가 충분히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맹주만, 2007:249). 그럼 인간은 어느 정도 인간 중심적일 수밖에 없을까? 다음 연재에서, 맹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했던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의 저자 최훈 교수(강원대)의 이야기도 살펴보자.(필자)

참고문헌

맹주만, '피터 싱어와 윤리적 채식주의' <철학탐구> 22, 중앙대 중앙철학연구소, 2007. 
피터 싱어, <실천 윤리학>, 황경식 ·심성동 옮김, 철학과현실사, 1997.
Singer Peter, Animal Liberation, new revised edition, New York: Avon Books, 1990.
Singer Peter, "All Animals Are Equal.", in Philosphic Exchage 1, summer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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