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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 최고 선택은 '산마을 살이'

서예가인 내가 인도네시아 산마을로 간 이유

등록|2016.09.08 20:28 수정|2016.09.08 20:28

▲ 붓이 있는 풍경. ⓒ 손인식


나는 서예가다. 셀 수 없이 많은 털로 하나가 된 붓으로 나를 세우고, 순백 화선지로 나를 펼치는 서예가다. 모든 색을 포용한 검은 색 먹으로 내 깊이를 찾고, 물샐틈없이 단단한 조직을 가진 벼루의 무게로 늘 나를 저울질하는 서예가다.

나는 오늘도 붓을 들고 뭔가를 쓴다. 뭔가를 쓰는 것은 내가 그것이 되는 일이다. 간절히 그 뜻을 새기는 일이다. 오늘은 어떤 단어나 문장이, 그리고 누구의 뜻이 나로 인해 다시 새겨질 것인가. 그로 인해 내 이름도 다시 쓰인다. 그리고 세상에 작품 하나가 태어난다.

살락산아침 햇살에 깨어나는 살락산(Gunung Salak) 해발 2,211m 높이의 참 능선이 고운 산이다. ⓒ 손인식


내가 산을 쓰기로 한 것은, 산이 나에게 산을 쓰게 한 것은 산마을에 집을 짓고 이주하면서부터다. 자카르타에서 남쪽으로 60km 지점 보고르의 산마을, 터를 선택한 것도 산 때문이었다. 산도 나를 기다렸나 보다. 산마을에 나를 내려놓고 좌정을 하자 산은 바로 그만치서 나를 주시했다. 나긋하게 능선을 펼친 산, 높고 거대한 무언으로 나를 넌지시 바라본다.

산마을 아침 아직 안개속에 잠든 보고르의 내가 사는 산마을 ⓒ 손인식


나의 산마을 생활은 늘 염원하고 계획하던 것이니 언젠가, 또 어디선가 이룰 일이었다. 나는 경제논리가 가장 선두에 서는 겉이 번지르르한 도시가 늘 불편했다. 서울에서 활동을 할 때도, 2003년 이후 자카르타에서 활동을 할 때도 나와 도시는 어울리지 않은 구석이 더 많았다.

작품으로 행동하는 것이 가장 편했고, 말 보다는 시나 산문으로 나를 밝히는 것이 좋았다. 세상의 지위와 가까울 수 없었던 반면, 근근도생 조촐한 생활은 늘 나와 가까이 있었다. 내 작품이 역사성이나 보편성보다는 독자성이 강하기를 바란 이유도 산을 좋아한 데 있었을 것이다. 몇 사람의 안목자가 고개를 끄덕여주면 더 바랄 것이 없었던 것도 산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壽山寧地(수산영지) / 장구한 산 평안한 땅. 창작단상 ⇒ 그 얼마를 살아/ 저기 우뚝한 산이 되고 이 땅 아늑한 산마을 되었으랴/ 한낱 육질(六秩)을 살아내고/ 어찌 산을 덕을 샐 것이며/ 고작 거쳐온 주갑(周甲) 세월로/ 대대로 살아온 산마을 사람의/ 정 헤아리랴/ 이 땅,/ 산의 크기로 산의 높이로/ 나를 품어주었네// 거쳐 온 시간 모두/ 남은 날의 희망이어라/ 아! 장구한 산, 복의 땅! ⓒ 손인식


  
공짜의 소중함

산마을 살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고새면 산과 마주하는 일이다. 눈만 들면 숲과 속삭이는 것이 일상이다. 산과 숲이 작품 속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다. 인도네시아 산과 산마을 풍광은 나를 더 강하게 지배한다.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사계절의 아름다움과 그 깊은 맛을 아는 한국인이기에, 열대 나라의 게으른 녹색이 내뿜는 한 결을 그냥 무심코 스치지 않게 된다. 열대나라의 도시에서 그 복잡함과 미묘한 후끈함에 시달려 보았기에, 지천인 공짜 공기의 신선함에 무한 감사한다.

대도시 매연과 먼지 속에서 살아보았기에, 산마을 팔색조 바람 맛이 더없이 좋다. 24시간 에어컨을 켜고 꼬박 10년을 살아보았기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고 살 수 있음이 그야말로 행복이다.

山自閑暇(산자한가)/ 산은 스스로 한가하고 창작단상 ⇒ 산은 스스로 한가해/ 수 천 수만의 변화를/ 무변으로 드러내는/ 산은 늘 한가해 ⓒ 손인식


산이 내 작품의 주제가 된 것에 대해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환갑을 넘긴 나이다. 몸을 움츠리게 하는 추위가 낭만으로만 추억되지 않고, 번들거리는 땀으로 욕망을 분출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나이에 다다른 것이다. 감각적인 봄이 없고, 늦가을 서릿발의 알싸함 없이 잔잔한 기온에서 평안을 느끼는 것, 이 어찌 나이 탓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이 나이쯤 되어 산과 숲으로 나를 써보니 그저 열 가지가 마땅하고 백 가지에 정이 가는 것이다.   
  

산 지고 물 안고 창작단상 ⇒ 산 오래 바라보면 산이 되지/ 물 오래 바라보면 물이 되지/ 우리 모두/ 산 되고, 물 될 수 있네/ 우리 안에 우리를 밝힐/ 등불 하나 켤 수 있네 ⓒ 손인식


세상으로 난 내 길

인지상정, 오늘도 붓을 들면 산이 솟고, 먹을 갈면 숲이 펼쳐진다. 마음 안에 산이 들어와 앉으니 내 붓은 산을 그리고, 내 먹은 숲을 펼친다. 자연에 관한 마음이 헤퍼진다. 미주알고주알 속내가 터져 나온다. 산에 대해 숲에 대해 시시로 새로운 느낌이 생긴다. 시나 고전 문장을 훑다가 멋지게 자연을 읊은 구절을 발견하면 쾌재를 부르게 된다. 내 생각을 담아 사자성어를 조어하는 것이 흥미 만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출하고 간결한 작품을 창작하겠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풍성함이나 질긴 노동력이 담긴 작품을 존중하던 것은 어제의 일이 되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인다. 시각적으로 한눈에 드는 작품이어야 하며, 오직 내 감정이 풍부하게 담긴 것이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自由山人(자유산인)/ 산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리는 사람 창작단상 ⇒ 산,/ 싱싱한 자유를 꿈꾸게 하지/ 건강한 자유를 즐기라 하지/ 산, 참 자유가 산에 있음을 뽐내지 않지/ 자기 안의 자기의 것,/ 누리고 즐기는 것이/ 진정 자기 되는 것임을/ 애써 말하지 않지/ 산에 사는 것/ 산의 살진 자유를 배우는 것 ⓒ 손인식


내 일생일대 최고의 선택은 산마을 살이었다. 지난해 내가 산을 주제로 작품전을 열었던 것도, 산마을 살이 이야기를 작품과 함께 묶은 한 권의 책 <산정무한(山情無限)>을 출간한 것도 산마을 살이 덕이다. 산은 오늘도 내게 새롭고 특별하다.

山情無限(산정무한)/ 무한한 산의 정취 창작단상 ⇒ 어둠,/ 하늘인 듯 산마을을 덮다./ 산록을 더듬어 넘은 바람,/ 속옷인 듯 살갗에 붙다./ 밤 깊어갈수록/ 어둠에 씻겨, 산마을/ 가을 물처럼 맑아지다./ 내일 아침이면,/ 꽃 색 더욱 요염하리./ 열매,/ 맛 더욱 도도하리. ⓒ 손인식


나에게 작품은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다. 인연의 실마리며 존재의 증거다. 내 붓질은 늘 서툴고, 내 글줄은 늘 느낌의 언저리만 맴돌지만, 이것은 오직 내 길이다. 오늘 여기, 이국 인도네시아 산마을에서 나는 산을 빌려 세상과 대화를 청한다. 하여 작가로서 바란다. 세상이 세상과 즐겁게 소통하기를 바란다. 세상이 산을 빌려 세상을 쓰기 간절히 바란다.

산정무한59점의 서예 · 문인화 작품, 45편의 창작 단상, 12편의 산문(사진 도판 84)을 한데 어우러낸 책 『산정무한』. 2015년 5월 발간 ⓒ 손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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