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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20년, 엄마는 우리집에 딱 하루 묵었다

[부모님의 뒷모습 27]

등록|2016.09.10 17:01 수정|2016.09.10 17:01
2년 전부터 엄마는 불볕더위가 오면 식사를 잘하지 못한다

▲ 이년 전부터 팔순 엄마는 불볕더위가 오면 식사를 잘하지 못한다. 링거를 한두 번은 맞아야 여름을 지낼 수 있다.(사진은 영화 '나의 아들, 나의 어머니'(2015)의 한 장면) ⓒ 나의아들나의어머니(2015)


엄마는 잘 지내는 걸까? 혹 병원에 입원한 건 아닐까? 이년 전부터 팔순 엄마는 폭염이 오면 식사를 잘 못 했다. 병원에서 링거를 한두 번은 맞아야 여름을 통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올해는 예년보다 훨씬 덥다. 내가 휴가를 떠나기 전에도 식사를 못 하신다고 했으니 분명 식사를 못 하고 계실 게 뻔하다. 전화를 걸어보거나 집으로 찾아가면 금방 확인이 될 일인데 나는 전화도 하지 못하고 8월 첫 주말을 보내고 있다.

7월 말, 죽도 못 드신다는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영양제를 맞춰 드리러. 8월 2일엔 잘 지내고 있다는 엄마의 말이 못 미더워 반찬을 싸 들고 친정에 갔다. 엄마는 한의원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 길이었다. 엄마를 한의원에 내려 드리고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식사를 못 해도 침은 매일 맞으러 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우리가 휴가 다녀온 뒤 며칠이라도 우리 집에 와서 지내는 게 어떻겠냐 물었다. 아버지는 생각해 보겠다 했다.

기숙사에서 지내던 첫째까지 방학이라 방 하나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 다섯 식구만으로도 집이 꽉 차지만 부모님을 오시라 말씀드리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 생각했다.

2박 3일 휴가를 다녀온 뒤에도 친정에 흔한 안부 전화조차 하지 못했다. 팔순 엄마가 여전히 식사를 못 하고 있을 거라 예상을 하면서도 전화를 드리지 못했다. 휴가 가기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며칠 간이라도 지내보자던 그 말을 지킬 엄두가 안 났다. 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에어컨 없는 집이 더웠다. 아이들 밥해 주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 드는데 부모님까지 모셔 와서 매끼 챙겨드릴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통화가 목에 걸려서 전화조차 못하고 하루하루 넘겼다. 아침이면 막내를 데리고 도서관으로 탈출하고 해 질 녘에나 집에 돌아왔다. 드디어 누가 보아도 내가 명명백백한 불효자 반열에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위가 한풀 꺾인 8월 둘째 주말,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가슴이 덜컹 내려왔다. 올 것이 왔구나. 친정에 연락을 못 드린 지 열흘이 더 지나 있엇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엄마가 죽도 통 못 드시는데."

굶으시던 엄마, 비릿한 수채통 냄새를 어찌 맡았을까

죽도 못 먹은 엄마를 보러 가며 난 내 아이들과 남편 아침을 챙겨주고 내 입에도 밥을 꼬박 꼬박 구겨 넣었다. 친정에 가서 벨을 눌렀다. 담 밖에서 들여다보니 엄마가 보인다. 그런데 엄마가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싱크대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

닭을 다듬는 걸까? 그새 기운이 나서 닭죽을 끓여 드시려나? 엄마 하고 불렀다. 엄마가 날 돌아보더니 한숨을 쉬고 장갑을 벗는다. 힘겹게 걸음을 떼어 대문을 열어 주셨다.

아버지는 외출하셨다. 뭘 하고 있었냐 물으며 싱크대로 갔다. 싱크대엔 수채통과 솔이 있다. 수채통엔 물컹하고 누런 물때가 끼어 있다.

"아버지가 설거지는 하셔도 이런 건 안 하잖아?"

팔순 아버지 눈에 수채통에 낀 누런 물 때가 보일 리 없다. 보인다 한들 닦으실까? 단식하면 냄새에 민감해진단 말을 들었다. 엄마도 마찬가지일 거다. 기운도 없고 위장이 텅 빈 엄마가 비릿한 수채통 냄새를 어찌 맡았을까?

왈칵 눈물이 솟는다. 팔순 엄마에겐 굶으면서도 놓을 수 없는 게 살림이구나. 못 본 사이 엄마 얼굴이 핼쓱해졌다. 눈두덩이도 멍이 든 것처럼 거무스레하다. 병원 응급실로 가서 영양제를 맞춰 드렸다.

내가 못 온 사이 엄마는 세 차례 영양제를 맞으셨다고 한다. 영양제 힘으로 더위를 견디고 있었던 거다. 내가 도서관에서 에어컨 바람 쐬며 책 읽고 있을 때 엄마는 이 몸으로 영양제를 맞으러 다녔다.

친정에 와서 엄마에게 미음을 끓여드렸다. 아버지는 내내 죽을 끓여 주셨다고 한다. 죽에 따뜻한 물을 더 넣어 저어 드셨는데 그게 잘 먹히지 않았단다. 끓여야 미음이지. 미음이 미숫가루인가 물 넣어 먹게. 아버지는 뭘 하신 걸까?

하긴 그 물음을 하기 전에 넌 뭘 했는데. 팔순 아버지가 안 아픈 것만 해도 고마운 거다. 뭘 더 바라나?

"엄마, 우리 집에 가자. 그러면 굶지는 않잖아?"

엄마는 안 된다고 한다.

자식들에게 신세 지기 싫어하는 엄마

응급실에서 링거 맞는 모습응급실에서 링거 맞는 모습 ⓒ 강정민


내가 결혼한 지 20년이 되었지만, 엄마는 우리 집에 와서 주무신 적이 한 번도 없다. 아니 생각해 보니 딱 하루 있었다. 미국 큰 언니네 갈 때 비행기 시간 맞추느라 딱 하루 자고 갔다. 그뿐이다.

우리 집 뿐 아니라 다른 자식들 어느 집에도 마찬가지다. 자식들에게도 신세 지기 싫어하는 엄마의 성격이 그대로 나온다. 미음을 밥통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월요일에 언니가 친정에 갔다. 언니가 엄마 한의원에 따라가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좌식의자에 앉아서 침을 맞는 엄마의 모습이다. 한의원에선 침을 놓을 때 눕혀서 맞추지 않나? 기운도 없는 분이 저런 자세로 매일 침을 맞는다니 이해가 안 된다.

언니는 자식들 집에 모시고 가든가 병원에 입원을 시켜야지 이렇게 집에 계시다가는 큰일을 치를 거라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우리 집에 모시는 것이 제일 좋을 거 같았다.

맞벌이하는 오빠네나 자영업 하는 작은 언니네보다는 우리 집이 제일 나을 것이다. 다음 날엔 어떻게 하든 엄마를 우리 집에 모시고 와야 한다.

다음 날, 친정에 갔다. 거실 창 안으로 엄마가 보인다. 엄마도 내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대문을 열어 주려고 엄마가 일어서려 하는데 일어서질 못한다. 손으로 방바닥을 이리저리 짚으면서 애를 쓰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하루 만에 기력이 더 떨어졌구나. 저렇게 일어서기도 힘이 드는데 걷다가 넘어지기도 하면 큰일 나겠다 싶다.

"엄마, 괜찮아. 내가 들어갈게. 그냥 가만히 있어."

소리를 질렀다.

대문만 열면 된다. 현관 열쇠는 나에게 있다. 2층 벨을 눌러 사정 이야기하니 문을 열어 준다.

엄마의 눈 흰자위에 벌겋게 핏줄이 서 있다. 눈병이 심해졌다. 안과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엄마는 눈병도 한의원의 침으로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이게 뭐가 좋아졌다는 건지. 엄마의 한의원 타령 또 시작이다. 언니도 도착했다.

"엄마, 우리 집에 가자. 가서 내가 미음도 쒀 드릴게. 우리 동네 의사가 잘 봐. 거기 의사 친절하고 할머니들한테도 인기가 얼마나 많은지 서울에서도 아침부터 환자가 와. 예약도 안 받아."

언니와 나는 왜 우리 집에 가야 하는지 갖은 이유를 댔다.

"안 돼. 한의원 가서 침 맞아야 돼. 며칠 뒤 휴진이라. 그 전에 열심히 맞아야 해."
"엄마 내가 아는 안과 의사한테 엄마 눈 봐 달라고 할게."
"야, 그리고 난 이 전기매트 없으면 추워서 잠을 못 자."
"그럼 아침에 택시 타고 정민이네 갔다가 저녁에 택시 타고 돌아오자. 그럼 되잖아?"
"그럴까?"

엄마의 '그럴까?' 한 마디에 우린 짐을 후다닥 챙겼다. 엄마 몸으로 택시 타고 우리 집으로 출퇴근 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일단은 어떻게든 우리 집으로 가는 게 중요했다.

택시에서 짐을 내리고 동네의원에 갔다. 의원에서 피검사를 하고 영양제를 맞았다. 그 사이 언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언니가 돌아가니 엄마를 내가 혼자 상대해야 한다. 엄마가 영양제 다 맞고 친정에 간다고 하면 뭐라고 못 간다고 해야 할까? 언니는 "절대 보내면 안 돼."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는데, 나는 갖가지 이유를 찾는다.

엄마가 식사 잘하실 때까지 우리 집에 계시면 좋겠다. 하지만 그건 뒷일이고 일단 오늘 밤만이라도 엄마를 보내지 말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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