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가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이유
숨겨진 역사를 찾으려는 노력은 문학의 소임
노벨 문학상은 1901년부터 현재까지 108명의 수상자를 냈다. 그 중 여자 수상자는 14명밖에 없어 지금까지는 남성들의 독무대나 다름없다. 다른 분야와 달리 공동 수상자가 네 번 밖에 없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매년 가장 큰 영광을 차지해 왔다.
<정글북>으로 역대 최연소인 42세에 수상한 러디어드 키플링은 대표적인 제국주의 찬양론자였다. 반면, 역대 최고령 수상자는 이란의 도리스 레싱으로 2007년 수상 당시 88세였다. 전체 수상자 평균 연령은 64세로 수상자 상당수는 아직도 현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노벨 문학상 선정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가운데, 올해도 우리 문단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그 동안 서정주, 고은 등의 시인이 후보에 올랐던 노벨 문학상은 우리 문단에겐 아직까지 희망 고문으로 남아 있다. 그 중 노벨 문학상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을 받은 작가는 한국 문인이 아닌 '한국계' 문인이었다.
죽음을 이용하려는 자와 이에 맞서려는 자
김은국의 대표작 <순교자>는 1964년 미국에서 발간 당시 20주 연속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을 정도로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고, '한국계' 미국작가(미국명 Richard E. Kim)로는 처음으로 1967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작가에게 안겨 준 소설이다.
<순교자>는 제목과 같이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무신론자의 눈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평양에서 살해당한 12명의 목사와 살아남은 2명의 목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와 그 해석의 왜곡 문제'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이 대위는 전쟁이 끝나면 대학으로 돌아갈 것을 꿈꾸는 정보장교로 정의감이 투철하다. 이 대위가 처음 평양에서의 경험을 회상하는 부분은 얼마 전 700만 이상의 관객을 끌어 모은 하정우 주연 영화 <터널>에서 구조된 후의 한 장면을 닮았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언론의 모습을 김은국은 반백년 전에 고발한 셈이다.
전쟁 가운데 인간이 한낱 체제 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현실을 보며 호기 좋게 분노를 표출할 줄 알았던 이 대위는 공산주의자에 의한 기독교 목사 처형을 '순교'로 선전하려는 자신의 상관, 장 대령과 대립한다.
장 대령은 12명의 목사들이 어떠한 고백을 하며 최후를 맞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해 죽었는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 대위는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이야말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며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려고 한다.
둘 사이의 이런 갈등은 상명하복이 엄연한 전시 한국 군대에서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 하지만 이 대위가 역사를 전공한 먹물이라는 점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둘의 갈등이야말로 현실적이기도 하다.
12명의 목사와 함께 잡혀갔지만 살아남은 신 목사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이 대위를 압박하는 장 대령은 전형적인 체제 순응형 군인이다. 그에게 '순교'는 공산주의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며 남측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좋은 도구일 뿐이다.
이처럼 장 대령에게는 진실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다. 순교자들을 영웅적이고 성스럽게 포장해야 하고, 살아남은 자는 영광을 증언하는 도구가 되어야만 한다. 그게 정당한 평가라고 믿는 그에게 신 목사는 최적의 도구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 부끄럽고 허약한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 배반한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 장 대령에 대해 반기를 드는 사람은 이 대위 말고도 장 대령의 친구이기도 한 고 군목이 있다. 그는 순교자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는 것이지 인간의 일시적 필요에 봉사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한다.
고백 없는 순교자와 이를 지키려는 자, 그 이유
신에 대한 고백 없이 죽은 자들을 순교자로 만들고, 살아남은 신 목사를 영웅으로 만들고자 했던 장 대령의 의도는 뜻밖에도 신 목사에 의해 거부된다. 사람들은 핍박받는 동안 암담한 영혼 속에 질질 끓던 모든 것들, 모든 슬픔을 쏟아내며 신 목사를 '유다'라 비난하지만, 그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양 떼가 한순간 울부짖는 폭도로 돌변하여 자신을 비난하는데도 몸을 내어놓는 모습을 보며 장 대령은 "그 사람과 내가 서로 정당한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난 미처 몰랐다"고 털어놓는다. 장 대령이 말한 공통의 이해관계는 신 목사에겐 '그가 보호해야 할 교회와 교회의 명예가 있었다'는 것이고, 자신에겐 자신이 지켜야 할 국가와 그 명분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 목사는 교회와 교회의 명예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변호하고자 한 것이었다. 인간 앞에 서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열심히 전파하는 목사가 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변호하는 목사로 절망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려 했던 것이다.
이런 신 목사의 절규에 이 대위는 "당신의 신은 그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알고 있는가? 아무 관심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당신은 사람들을 속이는가?"라고 물으며 스스로도 그 답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이 대위는 "신을 가진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한 인간의 기도 소리를 뒤에 남기고 나는 문을 닫았다"는 말로 자신은 사건의 본질에 있어서 국외자임을 인정하며 물러선다.
인간의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고통이 의미 없고 인간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면 인간은 그 난국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순교자>는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해답을 찾고자 파고든다.
<순교자>가 노벨 문학상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런 질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그 질문은 인간 본성에 대한 고민과 고통당하는 인간에 대한 동정 및 이를 헤쳐 나오는 불굴의 노력을 그리려고 했다. 역사는 그러한 질문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해 왔고, 발전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순교자>는 주제의식과 접근 방법에 있어서 엔도 슈사쿠의 1966년작 <침묵>과 현기영이 1978년 발표한 <순이삼촌>을 떠올리게 한다. <침묵>은 '순교' 혹은 '배교'를 배경으로 '신' 없는 세계의 고통과 의미를 고찰하고, <순이삼촌>은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역사적 비극 속에서 역시 '신 없는 세계의 고통'의 의미를 찾는다는 점에서 닮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소설들은 "문학은 숨겨진 역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명제에 충실하다. 그 중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순교자>다.
시대의 아픔인 4·3을 외면하지 않았던 현기영은 "공동체의 경험에 대한 관심을 시대착오, 혹은 야만이라고 매도하는 따위의 언어도단은 버리자"며 "세계문학은 개별 세계에다 우리 것을 추가해야지, 세계를 너무 흉내 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비록 김은국이 영어로 작품을 발표했지만, <순교자>는 밖으로는 세계 보편성을 지향하며, 안으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깊이 천착한 소설임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순교자>는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을 때, 한반도 공동체의 남다른 경험을 소재로 세계 보편성을 추구하는 작품을 썼다는데 의미가 있다. 10월 중 발표될 노벨 문학상 수상자 선정에 촉각을 세우는 이때, 우리에게 <순교자>를 뛰어넘는 위대한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정글북>으로 역대 최연소인 42세에 수상한 러디어드 키플링은 대표적인 제국주의 찬양론자였다. 반면, 역대 최고령 수상자는 이란의 도리스 레싱으로 2007년 수상 당시 88세였다. 전체 수상자 평균 연령은 64세로 수상자 상당수는 아직도 현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노벨 문학상 선정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가운데, 올해도 우리 문단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그 동안 서정주, 고은 등의 시인이 후보에 올랐던 노벨 문학상은 우리 문단에겐 아직까지 희망 고문으로 남아 있다. 그 중 노벨 문학상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을 받은 작가는 한국 문인이 아닌 '한국계' 문인이었다.
죽음을 이용하려는 자와 이에 맞서려는 자
▲ 김은국의 <순교자> ⓒ 문학동네
<순교자>는 제목과 같이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무신론자의 눈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평양에서 살해당한 12명의 목사와 살아남은 2명의 목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와 그 해석의 왜곡 문제'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이 대위는 전쟁이 끝나면 대학으로 돌아갈 것을 꿈꾸는 정보장교로 정의감이 투철하다. 이 대위가 처음 평양에서의 경험을 회상하는 부분은 얼마 전 700만 이상의 관객을 끌어 모은 하정우 주연 영화 <터널>에서 구조된 후의 한 장면을 닮았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언론의 모습을 김은국은 반백년 전에 고발한 셈이다.
"한국전쟁 국군의 북진 초기에 경험했던 어떤 분노. 평양 남쪽 얼마 떨어진 한 산기슭 동굴에 공산주의자들이 정치범 수백 명을 동굴 속에 밀어 넣고 기관총 사격을 한 다음 폭약을 터트려 동굴 입구를 막아버린 사건. 나는 카메라 뒤의 무관심하고 차가운 눈초리들로부터 한 인간이 지닌 고난의 말없는 위엄을 내 온몸으로 지켜주기라도 할 듯이, 남자의 몸 위로 상체를 구부리고 연옥과도 같은 그의 납빛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여보, 대위" 하고 누군가가 고함을 내질렀다. "비켜주시오. 사진 좀 찍게."......"대위, 사진 좀 찍게 비켜주시오." 하는 소리들이 기분 나쁘게 뒤섞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밀쳐내는 것 같았고 나는 분노로 앞이 캄캄해지면서 한 사병이 들고 있던 삽을 낚아채어 카메라들을, 차가운 눈초리들을, 그리고 파리 떼, 그 끔찍한 파리 떼들을 쫓고 때려 부수고 갈기기 시작했다......."
전쟁 가운데 인간이 한낱 체제 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현실을 보며 호기 좋게 분노를 표출할 줄 알았던 이 대위는 공산주의자에 의한 기독교 목사 처형을 '순교'로 선전하려는 자신의 상관, 장 대령과 대립한다.
장 대령은 12명의 목사들이 어떠한 고백을 하며 최후를 맞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해 죽었는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 대위는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이야말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며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려고 한다.
둘 사이의 이런 갈등은 상명하복이 엄연한 전시 한국 군대에서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 하지만 이 대위가 역사를 전공한 먹물이라는 점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둘의 갈등이야말로 현실적이기도 하다.
12명의 목사와 함께 잡혀갔지만 살아남은 신 목사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이 대위를 압박하는 장 대령은 전형적인 체제 순응형 군인이다. 그에게 '순교'는 공산주의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며 남측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좋은 도구일 뿐이다.
"순교자들의 영광에는 어떤 의심의 여지도 있을 수 없다는 걸 자네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그들은 훌륭했고 성자와도 같았어. 왜? 그들은 '순교자들'이고 빨갱이들 손에 희생됐으니까. 간단하지 않은가. 그럼 나머지 생존자들은? 그들 역시 훌륭했고 거룩했지. 왜? 그들 역시 빨갱이들에게 잡혀가서 투옥됐던 사람들이니까. 그 사람들도 놈들에게 고문을 당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기독교 목사들이니까. 그래도 모르겠어? 모든 건 바로 이렇게 돼야 하는 거야. 죽은 자나 생존자나 모두 칭송받을 자격이 있어. 그들은 다 같이 훌륭하고 성자다워야 하는 거야. 알겠나?"
이처럼 장 대령에게는 진실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다. 순교자들을 영웅적이고 성스럽게 포장해야 하고, 살아남은 자는 영광을 증언하는 도구가 되어야만 한다. 그게 정당한 평가라고 믿는 그에게 신 목사는 최적의 도구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 부끄럽고 허약한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 배반한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 장 대령에 대해 반기를 드는 사람은 이 대위 말고도 장 대령의 친구이기도 한 고 군목이 있다. 그는 순교자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는 것이지 인간의 일시적 필요에 봉사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대가 탈영병 백 명을 데려다 백 명의 영웅으로 둔갑시켰다면 좋아. 얼마든지 그래 보게. 그러나 정말이지 그대가 함부로 신앙의 순교자를 날조할 수는 없는 거야. 그거야말로 최대의 경멸을 받아 마땅할 신성 모독이지."
고백 없는 순교자와 이를 지키려는 자, 그 이유
신에 대한 고백 없이 죽은 자들을 순교자로 만들고, 살아남은 신 목사를 영웅으로 만들고자 했던 장 대령의 의도는 뜻밖에도 신 목사에 의해 거부된다. 사람들은 핍박받는 동안 암담한 영혼 속에 질질 끓던 모든 것들, 모든 슬픔을 쏟아내며 신 목사를 '유다'라 비난하지만, 그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양 떼가 한순간 울부짖는 폭도로 돌변하여 자신을 비난하는데도 몸을 내어놓는 모습을 보며 장 대령은 "그 사람과 내가 서로 정당한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난 미처 몰랐다"고 털어놓는다. 장 대령이 말한 공통의 이해관계는 신 목사에겐 '그가 보호해야 할 교회와 교회의 명예가 있었다'는 것이고, 자신에겐 자신이 지켜야 할 국가와 그 명분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 목사는 교회와 교회의 명예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변호하고자 한 것이었다. 인간 앞에 서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열심히 전파하는 목사가 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변호하는 목사로 절망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려 했던 것이다.
"날 좀 도와주시오. 불쌍한 내 교인들, 전쟁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그리고 삶의 피곤에 시달리는 이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고난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을 움켜쥐고 그들을 절망의 바다로 떠내려 보내고 있소. -중략- 우린 절망과 싸우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린 그 절망을 때려 부수어 그것이 인간의 삶을 타락시키고 인간을 단순한 겁쟁이로 쪼그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신 목사의 절규에 이 대위는 "당신의 신은 그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알고 있는가? 아무 관심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당신은 사람들을 속이는가?"라고 물으며 스스로도 그 답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이 대위는 "신을 가진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한 인간의 기도 소리를 뒤에 남기고 나는 문을 닫았다"는 말로 자신은 사건의 본질에 있어서 국외자임을 인정하며 물러선다.
인간의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고통이 의미 없고 인간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면 인간은 그 난국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순교자>는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해답을 찾고자 파고든다.
<순교자>가 노벨 문학상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런 질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그 질문은 인간 본성에 대한 고민과 고통당하는 인간에 대한 동정 및 이를 헤쳐 나오는 불굴의 노력을 그리려고 했다. 역사는 그러한 질문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해 왔고, 발전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순교자>는 주제의식과 접근 방법에 있어서 엔도 슈사쿠의 1966년작 <침묵>과 현기영이 1978년 발표한 <순이삼촌>을 떠올리게 한다. <침묵>은 '순교' 혹은 '배교'를 배경으로 '신' 없는 세계의 고통과 의미를 고찰하고, <순이삼촌>은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역사적 비극 속에서 역시 '신 없는 세계의 고통'의 의미를 찾는다는 점에서 닮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소설들은 "문학은 숨겨진 역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명제에 충실하다. 그 중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순교자>다.
시대의 아픔인 4·3을 외면하지 않았던 현기영은 "공동체의 경험에 대한 관심을 시대착오, 혹은 야만이라고 매도하는 따위의 언어도단은 버리자"며 "세계문학은 개별 세계에다 우리 것을 추가해야지, 세계를 너무 흉내 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비록 김은국이 영어로 작품을 발표했지만, <순교자>는 밖으로는 세계 보편성을 지향하며, 안으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깊이 천착한 소설임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순교자>는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을 때, 한반도 공동체의 남다른 경험을 소재로 세계 보편성을 추구하는 작품을 썼다는데 의미가 있다. 10월 중 발표될 노벨 문학상 수상자 선정에 촉각을 세우는 이때, 우리에게 <순교자>를 뛰어넘는 위대한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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