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표 클릭 몇번 안 한 죄로 5만 원 추가?
[타박타박 아홉걸음 세계일주 20] 우당탕당 좌충우돌 몰타 입성기
▲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몰타에서 뜨거운 학구열을 뿜어 낼 예정이다. ⓒ 한성은
출발을 알리는 경쾌한 총성
정적을 삼키고 열광하는 함성
떨리는 호흡은 이 전부를 집어삼킬
강렬한 욕망 I'm the fastest gun
- 페퍼톤스, 'Ready, Get Set, go!' 노랫말 중에서
새로운 출발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어느 순간 설레지 않은 적이 있겠냐만은 몰타(Republic of Malta)는 그중에서도 더 특별했다. 어학연수를 계획해 놓았기 때문이다. 배낭 속에는 몰타를 위해 챙겨놓은 노트와 필통이 항상 덜거덕 소리를 내며 따라다니고 있었다.
크레타 섬 여행을 마치고 몰타로 가기 위해 아테네로 돌아왔다. 크레타 섬에서 아테네 피레우스 항구로 가는 페리는 저녁 9시에 출발해서 다음 날 아침 9시에 도착하고 요금은 38유로였다. 한 푼이 아까운 배낭여행자들에게 야간 이동편은 언제나 반갑다. 하루 숙박비를 아끼면서 저렴하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야간 페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을 음식과 누울 자리를 챙기는 것이다. ⓒ 한성은
그리스에서 페리를 탈 때는 가능하면 일찍 서두르는 것이 좋다. 야간 페리라고 해도 가장 저렴한 티켓은 정해진 자리가 없어서 얼른 배에 타서 푹신한 소파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나도 배에 타기 전까지 이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통로에 침낭을 깔고 누워서 갔다.
부끄럽기는커녕 침낭을 펼치고 베개를 꺼내니 주위 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른 배낭여행자들도 여기저기서 나처럼 침낭을 펼치고 있었다. 싸구려 도미토리의 좁은 침대보다 훨씬 쾌적하고 좋았다.
아테네에서 몰타로 가는 가장 저렴한 비행기는 새벽 6시 출발이었다. 몇 시간 쉬려고 아테네에 숙소를 하루 구하자니 돈이 아까워서 온종일 아테네 시내를 어슬렁거리다가 저녁쯤 공항으로 갔다. 어제는 페리에서, 오늘은 공항에서 연이틀 노숙을 하고 아침 비행기에 올라탔다.
노숙이라고는 하지만 배에서는 승무원들이, 공항에서는 경찰들이 내 곁을 지켜주었고 침낭 속은 언제나 포근했기 때문에 비싼 숙소에 누워서 돈 아깝다며 속상해하는 것보다 페리나 공항에서 마음 편하게 노숙하는 것이 훨씬 좋았다. 화장실과 전기 콘센트만 있으면 어디든 훌륭한 숙소였다.
▲ 역시 아테네답게 공항 내에도 승객들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이 있었다. ⓒ 한성은
하지만 역시 세상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터키에서 이미 한바탕 삽질을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무사히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비행기 티켓을 보고 또 보고 했었다. 공항 이름도 정확하고 날짜와 시간도 맞았다. 추가 비용이 생기지 않도록 수하물 규정도 꼼꼼하게 읽고 배낭 무게에 맞게 미리 신청을 마친 후였다. 부스스 일어나 배낭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티켓을 받으러 가니 항공사 직원이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웹-체크인(Web Check in) 안 했네? 45유로 내야 해."
"웹-체크인? 그게 뭐야? 나 돈도 다 냈고 여기 모바일 티켓도 있어."
"비행기 타기 전에 인터넷에서 웹-체크인 해야 해."
"무슨 소리야? 비행기 예약할 때 그런 말 없었어."
"괜찮아. 여기서 체크인하면 돼. 대신 45유로 내야 해."
그랬다. 대부분의 유럽 저가 항공사들은 비행기를 타기 전에 반드시 웹-체크인을 해야 했다. 쉽게 말하면 '나 비행기 진짜 탑니다, 나는 누구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인력 소모를 줄이고 업무 간소화를 위해 저가 항공사들은 승객 스스로 체크인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하물이 없으면 줄 서서 티켓팅할 필요 없이 그대로 비행기를 타면 되는 것이었다.
그제야 옛날에 비행기 타던 일이 생각났다. 10년 전에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전화로 미리 확인(confirm)을 했었다. 컨펌을 안 하면 비행기 표를 갖고 있어도 자리가 없어서 비행기를 못 타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인터넷이 보편화 되면서 그 방식이 바뀌었던 것이다.
몰타행 비행기 표가 90유료였는데 클릭 몇 번 안 해서 45유로를 더 냈다. 내 잘못이긴 하지만 뭔가 억울해서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렸다. 몰타에서 만난 다른 한국 유학생들도 유럽 저가 항공사의 웹-체크인 정책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덕분에 그 친구들은 날벼락을 면했지만, 나는 수강료가 너무 비쌌다.
저가 항공권이 괜히 값이 싼 것이 아니었다. 이후로도 저가 항공은 계속 머리를 아프게 했다. 내가 앉아서 가는 좌석보다 내 배낭 하나가 훨씬 비싼 적도 많았다. 이렇게 하나씩 배워가는 것이 여행이겠지만, 배움의 즐거움보다 지출의 괴로움이 더 컸다. 유럽 최대의 저가 항공사 '라이언에어(Ryanair)' 잊지 않겠다!
값비싼 저가 항공은 비행 2시간 만에 몰타에 도착했다. 몰타는 국토 면적이 316km²로 제주도의 1/6 정도 되는 나라다. 그래서 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보면 나라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몰타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슬리에마(Sliema)에 예약해 놓은 숙소로 이동해서 짐을 풀었다. 대부분의 어학원이 수도인 발레타(Valletta)와 슬리에마 지역에 밀집해 있기 때문에 숙박비가 비싸도 어쩔 수 없었다. 얼른 어학원을 정하고 기숙사로 들어가야만 했다.
▲ 몰타는 제주도의 1/6 정도로 강화도와 크기가 비슷한 작은 섬나라이다. ⓒ 한성은
숙소 주인인 로베르타 아주머니는 고양이를 네 마리나 키우고 있었다. 몰타는 원래 개가 유명한 곳이다. 한국 사람들이 애완견으로 많이 키우는 '말티즈'가 바로 몰타 출신의 견종이다. 몰타는 영어식 발음이고 현지에서는 영국식으로 '말타'라고 발음하는데 말티즈는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런데 지금은 말티즈는 차치하고 아예 개를 많이 볼 수 없고, 과거부터 몰타에 오는 배의 선원들이 배에 있는 쥐를 잡기 위해서 태우고 다녔던 고양이들이 섬에 자리 잡고 살고 있다고 했다. 물론 몰타에도 반려동물로 개를 키우는 사람은 많다. 어쨌든 그래서 몰타 거리 어디서나 귀여운 길고양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몰타의 고양이를 주제로 한 사진전도 열리고 사진집도 발간됐단다. 재미있는 것은 '몰타 사람'을 뜻하는 단어도 '말티즈(Maltese)'라는 것이다. 어릴 때 우리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뚱이'도 말티즈였다. 사람을 보고 개라고 하는 것 같아서 한동안 이 단어를 쓸 때마다 참 어색했다.
본격적인 유럽 여행에 앞서 몰타를 계획에 넣은 것은 영어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행 루트를 짜는 중에 우연히 몰타 어학연수에 관한 글들을 읽고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할 겸 나도 어학연수를 계획했다. 그리고 몰타에서 공부하며 외국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 보겠다는 욕심도 있었다.
사실 유럽은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몰타는 오랜 시간 동안 영국의 식민지여서 몰타어와 함께 영어가 공용어였다. 그래서 몰타에는 비영어권 유럽인들이 휴양과 어학연수를 겸해 많이 몰려들었다. 몰타에서 유럽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 놓으면 이후에 유럽 여행을 할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어학연수를 계획한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 몰타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은 지금도 연락을 주고 받으며 지내고 있다. ⓒ 한성은
연수 기간은 대충 2개월 정도로 잡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8월 말부터 북유럽 캠핑카 여행을 하기로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있어 보자 싶었다. 한국에 있는 유학원을 통해 미리 알아보는 방법도 있었지만, 패키지로 판매하는 상품은 예산이 맞지 않아서 포기했었다. 유학원은 몰타 여기저기에 많다고 하니까 하나씩 직접 찾아가 보면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싶었다. 쉽게 말하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일단 몰타에 도착한 것이다.
숙소에 집을 풀고 가장 먼저 갔던 곳은 어학원이 아니라 바로 '아시아 푸드 스토어'였다. 터키나 그리스에는 한인 마트가 없었는데, 이곳 몰타에는 한국 식료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그렇게 큰 규모도 아니었고, 한국 식료품만 전문적으로 유통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작은 가게에는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정식으로 수입처 등록을 하고 영업을 하는 곳이라 가격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아시아 푸드 스토어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수출용'으로 판매 중인 일부 품목은 한국보다 싼 것들도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흰 쌀밥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서 땀을 뻘뻘 흘리며 먹으니 보양식이 따로 없었다. 이곳 덕분에 물가 비싼 몰타에서 두 달 동안 늘 저렴하고 맛있게 밥을 해 먹을 수 있었다.
▲ '아시아 푸드 스토어'는 몰타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 한성은
몰타에서 보낸 2개월은 그야말로 뜨거웠다. 몰타는 부존자원이 부족해서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사실상 여름과 겨울밖에 없는 계절에다 여름이 고온 건조하여 농작물이 자라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지리적 위치를 이용한 중계 무역과 관광 산업이 몰타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 특히 여름 성수기의 몰타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와 빼어난 해변 때문에 유럽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그야말로 쏟아져 들어왔다. 몰타 곳곳에서는 이들을 위한 축제가 하루도 빠짐없이 열렸다. MTV 페스티벌, 와인 축제, 맥주 축제, 프로 레슬링 경기 등등 몰타의 여름은 그야말로 뜨거웠다.
관광객들만큼 유학생들도 많았다. 몰타는 정부 홈페이지에서도 몰타의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홍보하고 있을 만큼 교육산업을 키우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많은 지원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나라지만, 유럽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나 남미에서도 영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모이고 있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몰타에서 보냈던 이야기들을 주제별로 묶어서 소개하려고 한다. 몰타로 휴가를 떠나거나 몰타에서 어학연수를 계획 중인 사람들을 위해서 두 달 동안 겪었던 소소한 일을 조금씩 풀어보아야겠다.
▲ '천국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었던 몰타 코미노(Comino)섬의 블루라군(Blue Lagoon) ⓒ 한성은
▲ 매년 여름 몰타에서 열리는 MTV Music Festival ⓒ 한성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 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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